이몽룡이 서울로 올라가고 신관 사또가 남원으로 부임하는 ‘신년맞이’ 대목을, 중고제의 달인 김창룡이 ‘창극 춘향전’(1934년 녹음)에서 말 달리는 듯한 자진모리 장단으로 호탕하게 부르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선풍을 일으키며 1990년대 우리 대중음악계를 장악한 랩 음악과 우리 전통음악의 내면적인 힘이 근원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판소리와 랩을 아우르는 이 힘의 정체는 단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음악인류학적인 차원에서의 5음계 문화나 리듬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귀족(양반)문화와 백인문화라는 정교하고 치밀한 지배문화 체제가 은연중에 강요하는 보이지 않는 억압에 대한 본능적인 일탈이며 해방의 무의식이다.
그러나 세상은 인형들의 가면무도회를 빚어내는 매스미디어의 거품으로 뒤덮여 있고 우리의 음악이 걸어가야 할 밤길의 별자리는 스모그에 갇혀 있다. 우리는 자신의 땅에서 유배된 자와 같다. 우리 노래의 정체성이 고작 이정현이나 샤크라의 국적불명 패션 오리엔털리즘이라고 말하는 자기 모멸의 사도마조히즘에 구금당하고 싶지는 않다.
90년대 거의 유일한 주류 밴드였던 넥스트의 구성원들이 신해철과 결별하고 패닉의 김진표와 만나 결성한 밴드 노바소닉의 두번째 앨범의 질풍 같은 랩메탈(요즘 서태지 때문에 조명받고 있는 바로 그 장르)을 듣다 보면 다시금, 현재 우리 대중음악의 지형도에서 고리타분하다면 고리타분한 ‘한국’적 아이덴티티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한국적 아이덴티티는 그저 서구적 음악문법에 우리의 전통음악을 기계적으로 뒤섞는 것으로 해소될 수 없다. 그것은 ‘만남’이지 ‘창조’는 아닌 것이다. 새 천년의 음악가들은 이제 신해철이 지휘하던 넥스트 시절의 전통음악 혼합실험과 신중현의 독창적인 기타 리프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투지를 길러야 한다.
노바소닉의 ‘진달래꽃’과 ‘Jr.’는 가장 서구적인 음악 패턴을 구사해왔던 이들의 전력을 감안했을 때 자신의 것, 나아가 우리의 것을 향한 매우 고심에 찬, 그러나 세련된 접근방식이다. 김진표의 낮고 깊은 래핑엔 어느새 관록의 울림이 일고 있으며, 김세황의 날이 선 듯한 기타 톤은 밴드의 하모니를 일체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아직은 껍질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다. 노바소닉은 무엇보다도 광활한 우리 리듬의 바다 속에서 더욱 화려하고 자유로운 호흡을 건져내야 할 것이다. 독창성은 비약이 아니라 진화를 통해 연금된다.
자, 다시 묻는다. 21세기 우리 노래의 진정한 영웅은 누구일 것인가? 과연 그런 인물이 등장할 수는 있을 것인가? 신중현 혹은 송창식의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원일의 패기만만(覇氣滿滿)과 김수철의 권토중래(捲土重來)와 신해철의 당랑거철(螳螂拒轍)이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는 바로 그런 얼굴을 기대한다.
판소리와 랩을 아우르는 이 힘의 정체는 단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음악인류학적인 차원에서의 5음계 문화나 리듬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귀족(양반)문화와 백인문화라는 정교하고 치밀한 지배문화 체제가 은연중에 강요하는 보이지 않는 억압에 대한 본능적인 일탈이며 해방의 무의식이다.
그러나 세상은 인형들의 가면무도회를 빚어내는 매스미디어의 거품으로 뒤덮여 있고 우리의 음악이 걸어가야 할 밤길의 별자리는 스모그에 갇혀 있다. 우리는 자신의 땅에서 유배된 자와 같다. 우리 노래의 정체성이 고작 이정현이나 샤크라의 국적불명 패션 오리엔털리즘이라고 말하는 자기 모멸의 사도마조히즘에 구금당하고 싶지는 않다.
90년대 거의 유일한 주류 밴드였던 넥스트의 구성원들이 신해철과 결별하고 패닉의 김진표와 만나 결성한 밴드 노바소닉의 두번째 앨범의 질풍 같은 랩메탈(요즘 서태지 때문에 조명받고 있는 바로 그 장르)을 듣다 보면 다시금, 현재 우리 대중음악의 지형도에서 고리타분하다면 고리타분한 ‘한국’적 아이덴티티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한국적 아이덴티티는 그저 서구적 음악문법에 우리의 전통음악을 기계적으로 뒤섞는 것으로 해소될 수 없다. 그것은 ‘만남’이지 ‘창조’는 아닌 것이다. 새 천년의 음악가들은 이제 신해철이 지휘하던 넥스트 시절의 전통음악 혼합실험과 신중현의 독창적인 기타 리프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투지를 길러야 한다.
노바소닉의 ‘진달래꽃’과 ‘Jr.’는 가장 서구적인 음악 패턴을 구사해왔던 이들의 전력을 감안했을 때 자신의 것, 나아가 우리의 것을 향한 매우 고심에 찬, 그러나 세련된 접근방식이다. 김진표의 낮고 깊은 래핑엔 어느새 관록의 울림이 일고 있으며, 김세황의 날이 선 듯한 기타 톤은 밴드의 하모니를 일체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아직은 껍질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다. 노바소닉은 무엇보다도 광활한 우리 리듬의 바다 속에서 더욱 화려하고 자유로운 호흡을 건져내야 할 것이다. 독창성은 비약이 아니라 진화를 통해 연금된다.
자, 다시 묻는다. 21세기 우리 노래의 진정한 영웅은 누구일 것인가? 과연 그런 인물이 등장할 수는 있을 것인가? 신중현 혹은 송창식의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원일의 패기만만(覇氣滿滿)과 김수철의 권토중래(捲土重來)와 신해철의 당랑거철(螳螂拒轍)이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는 바로 그런 얼굴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