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레 소잉카(86년 ‘늪지대의 사람’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 피에르 부르디외(‘텔레비전에 대하여’로 유명한 프랑스 사회학자), 마거릿 드래블(영국 소설가), 개리 스나이더(미국 생태주의 시인), 이스마일 카다레(‘죽은 군대의 장군’으로 알려진 알바니아 출신 소설가), 가라타니 고진(70년대 일본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준 문학평론가)…. 귀동냥으로라도 이름은 들어보았을 세계적인 문인과 석학 19명이 한꺼번에 한국에 온다. 그리고 김우창 유종호 등 한국을 대표하는 문인 학자 55명이 이들과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9월26일(화) 개막되는 2000년 서울 국제문학포럼은 ‘경계를 넘어 글쓰기-다문화 세계 속에서의 문학’이라는 주제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 행사를 단순히 문인들의 집안잔치로 보기 어려운 까닭은, 이 포럼의 주요 토론주제인 세계화와 정체성의 위기, 민족문화 보존이 결코 문학계의 고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포럼의 조직위원장인 김우창 교수는 “오늘날 인류는 다양한 민족이 다양한 문화를 이루며 수많은 경제 속에 다원화된 삶을 살고 있다. 이는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가 곧 세계 모두가 부딪치는 문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와 세계가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하고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됐다”며 이번 포럼을 통해 문학은 세계공동체적 의식을 표현하는 하나의 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주최측인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은 “아랍권 빼고는 다 온다”는 말로 이 행사의 위상을 강조했다. 일단 포럼의 규모나 참가자들의 문학적 위치, 지명도 등에서 전례 없는 행사임에는 틀림없다. 더욱이 이번 포럼에 참가하는 세계적인 문인들 대부분이 망명이나 내전 등으로 여러 나라의 문화를 체험한 경력이 있어 풀어놓을 자신의 이야기가 많다는 게 특징이다. 또 김종길 정현종 황동규 등 한국 참가자들 역시 끊임없이 시대의 주목을 받으며 한국문학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해온 사람들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다음은 포럼에 참가하는 해외초청 주요 발제자의 논문 요지다.
한때 미국 학계를 달군 문학에서의 정전(canon) 논쟁은, 권위와 이를 개혁하려는 창조적 의지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과 관련된다. 그러나 특정 텍스트를 정전화(신성화)하는 일보다 사람들은 창조정신을 불구상태로 만드는 검열의 정전에 더 열광적이다. 크메르 루주하의 캄보디아에서는 독일어든 중국어든, 어떤 언어로 되어 있든 외국어로 된 텍스트를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범죄자가 됐다. 그것은 정전(canon)이 아니라 차라리 대포(cannon)라 해야 옳다. 의견을 달리하는 반체제 작가의 머리 위로 쏘아대는 경고성 포탄이기 때문이다. 이 대포들은 경고성 발포로 시작해 예외 없이 창조적 공간에 직격탄을 쏘아댄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로운 흐름을 통해 경계는 반드시 사라져야 하며, 문학이야말로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에 이용되는 가장 친숙한 운송수단이다. 이 점 때문에 문학작품 생산자들은 그와 같은 창조적 의사소통 작업을 누구보다 앞서 수행해나갈 사람들이다.
자연을 대하는 정신의 눈 필요
나는 북미 서부 워싱턴주 퓨젯 사운드의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노자와 장자의 도교 경전에 심취했고, 인도불교와 대승경전을 거쳐 선사상에 도달했다. 그리고 교토에서 도겐(道元·13세기 일본 선승)을 알게 됐다. 자연 경치는 그냥 기차나 차로 지나치면 정확하게 볼 수 없다. 자연경치를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 한가운데를 며칠이고 걸어 지나가는 것뿐이다. 도겐은 단지 좌선을 통해 산과 강을 안 것이 아니라 직접 걸었고, 평생 일본과 중국의 산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그 점에서 보면 도겐은 원형적 생태학자라 할 수 있다. 도겐의 ‘산수경’을 보면 “산은 나라에 속하나, 실제로 그것을 사랑하는 자에게 속한다”고 했다. 이 말이야말로 정부와 기업이 그들 소유의 자원을 남용할 때 그것을 문제삼고 간섭해도 좋다는 근거가 되지만, 도겐이 진짜 하려는 말은 이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여러 층에서, 정신의 눈과 비인간인 중생의 눈과 생태학적 상상으로 보게 한다. 번식기의 해표들로 덮여 있어 악취로 가득한 태평양 연안의 바위섬이 해표들에게는 보석 같은 궁전이나 다름없다. 우리에게는 해표의 눈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예언가들은 시장논리가 문화분야에도 혜택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즉 신기술과 경제혁신은 공급되는 문화재의 양과 질을 개선하고 그에 따라 소비자의 만족도도 향상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리는 ‘공급의 획일성’이라는 말로 반박해야 한다. 획일화는 국가 차원을 넘어 전 지구적으로 행해진다.
시장논리에 따르면 최대다수가 선호하는 것을 생산해야 하므로 생산자는 상대 상품을 모방하고, 어느 사회나 국가에서도 통용될 만한 상품을 만들어내게 마련이며, 그것이 곧 맥도널드 문화다. 공산주의 독재체제에서는 정권이 ‘검열’을 했지만, 이제 금권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처럼 세계화가 초래한 문화의 위기상황에서 문화생산자는 어느 때보다 위협받고 있으며, 그래서 오히려 드물고 필요하며 소중한 존재가 됐다.
인터넷은 문학을 대체할 수 없다
삶은 문학의 원천이 될 수도 있지만 문학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삶이 문학에 노골적인 방식으로 개입하면, 문학을 파괴할 수도 있다. 문학은 삶, 시민, 관중, 독자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문학의 질을 떨어뜨리는 부정적 요소를 가리킨다. 과학이 문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의견에 반대한다. 문학은 과학의 발전과 관계가 없다. 문학에 중요한 것은 외적 세계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 내면세계의 발견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터넷 때문에 문학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인터넷이 위대한 문학, 다시 말해 질 높은 문학작품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칼 폴라니는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암에 비유했다. 자본주의는 농업공동체와 봉건국가 사이의 틈새에서 태어나 그 내부 세포들을 침략하여 자신의 생리에 따라 그 세포들의 성향을 변형시켰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여전히 기생적이다. 그렇다면 소비자로서의 노동자 그리고 노동자로서의 소비자의 초국적 연계망은, 말하자면 항암성 세포들의 문화다. 그것을 자본과 국가가 제거하려 한다면 먼저 자신들의 생산조건부터 제거해야 한다. 내가 읽은 바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이런 문화의 창출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상품과 화폐 사이의) 가치형태에 내재한 비대칭적 관계가 자본을 생산하는데, 역으로 자본을 종식시킬 수 있는 입장전환의 계기가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므로 이런 계기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트랜스크리티시즘의 과제가 될 것이다(논문 결론 부분).
도덕적 임무와 투기 구분 배워야
21세기 시점에서 글을 쓰는 작가는 거의 필연적으로 역사 언어 인종 그리고 문화적 전유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조건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V.S. 나이폴이나 샐먼 루시디처럼 영어나 유럽의 다른 언어권 작가들이 끊임없이 탈식민지상황의 아프리카, 알제리, 동인도제도, 캐리비안제도를 주제로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작가 내부의 검열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를테면 감히 영국 백인여성이 영연방 흑인남성처럼 글을 쓸 수 있는가. 아니면 호주의 백인 원주민 소년이나 또는 원주민 소년을 위해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식이다. 또 인종차별적이고 반유대적이며 동양차별적인 묘사가 담겨 있는 책을 문학의 정전으로 계속 포함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정전의 목록에서 삭제해야 하는가를 놓고 망설인다. 이것이 역사와 문화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탈식민주의적 상황에서 작가들은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선배들보다 도덕적 임무와 상업적 투기를 구분하는 방법을 잘 배워야만 한다.
이 행사를 단순히 문인들의 집안잔치로 보기 어려운 까닭은, 이 포럼의 주요 토론주제인 세계화와 정체성의 위기, 민족문화 보존이 결코 문학계의 고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포럼의 조직위원장인 김우창 교수는 “오늘날 인류는 다양한 민족이 다양한 문화를 이루며 수많은 경제 속에 다원화된 삶을 살고 있다. 이는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가 곧 세계 모두가 부딪치는 문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와 세계가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하고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됐다”며 이번 포럼을 통해 문학은 세계공동체적 의식을 표현하는 하나의 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주최측인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은 “아랍권 빼고는 다 온다”는 말로 이 행사의 위상을 강조했다. 일단 포럼의 규모나 참가자들의 문학적 위치, 지명도 등에서 전례 없는 행사임에는 틀림없다. 더욱이 이번 포럼에 참가하는 세계적인 문인들 대부분이 망명이나 내전 등으로 여러 나라의 문화를 체험한 경력이 있어 풀어놓을 자신의 이야기가 많다는 게 특징이다. 또 김종길 정현종 황동규 등 한국 참가자들 역시 끊임없이 시대의 주목을 받으며 한국문학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해온 사람들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다음은 포럼에 참가하는 해외초청 주요 발제자의 논문 요지다.
한때 미국 학계를 달군 문학에서의 정전(canon) 논쟁은, 권위와 이를 개혁하려는 창조적 의지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과 관련된다. 그러나 특정 텍스트를 정전화(신성화)하는 일보다 사람들은 창조정신을 불구상태로 만드는 검열의 정전에 더 열광적이다. 크메르 루주하의 캄보디아에서는 독일어든 중국어든, 어떤 언어로 되어 있든 외국어로 된 텍스트를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범죄자가 됐다. 그것은 정전(canon)이 아니라 차라리 대포(cannon)라 해야 옳다. 의견을 달리하는 반체제 작가의 머리 위로 쏘아대는 경고성 포탄이기 때문이다. 이 대포들은 경고성 발포로 시작해 예외 없이 창조적 공간에 직격탄을 쏘아댄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로운 흐름을 통해 경계는 반드시 사라져야 하며, 문학이야말로 사상의 자유로운 이동에 이용되는 가장 친숙한 운송수단이다. 이 점 때문에 문학작품 생산자들은 그와 같은 창조적 의사소통 작업을 누구보다 앞서 수행해나갈 사람들이다.
자연을 대하는 정신의 눈 필요
나는 북미 서부 워싱턴주 퓨젯 사운드의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노자와 장자의 도교 경전에 심취했고, 인도불교와 대승경전을 거쳐 선사상에 도달했다. 그리고 교토에서 도겐(道元·13세기 일본 선승)을 알게 됐다. 자연 경치는 그냥 기차나 차로 지나치면 정확하게 볼 수 없다. 자연경치를 알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 한가운데를 며칠이고 걸어 지나가는 것뿐이다. 도겐은 단지 좌선을 통해 산과 강을 안 것이 아니라 직접 걸었고, 평생 일본과 중국의 산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그 점에서 보면 도겐은 원형적 생태학자라 할 수 있다. 도겐의 ‘산수경’을 보면 “산은 나라에 속하나, 실제로 그것을 사랑하는 자에게 속한다”고 했다. 이 말이야말로 정부와 기업이 그들 소유의 자원을 남용할 때 그것을 문제삼고 간섭해도 좋다는 근거가 되지만, 도겐이 진짜 하려는 말은 이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여러 층에서, 정신의 눈과 비인간인 중생의 눈과 생태학적 상상으로 보게 한다. 번식기의 해표들로 덮여 있어 악취로 가득한 태평양 연안의 바위섬이 해표들에게는 보석 같은 궁전이나 다름없다. 우리에게는 해표의 눈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예언가들은 시장논리가 문화분야에도 혜택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즉 신기술과 경제혁신은 공급되는 문화재의 양과 질을 개선하고 그에 따라 소비자의 만족도도 향상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리는 ‘공급의 획일성’이라는 말로 반박해야 한다. 획일화는 국가 차원을 넘어 전 지구적으로 행해진다.
시장논리에 따르면 최대다수가 선호하는 것을 생산해야 하므로 생산자는 상대 상품을 모방하고, 어느 사회나 국가에서도 통용될 만한 상품을 만들어내게 마련이며, 그것이 곧 맥도널드 문화다. 공산주의 독재체제에서는 정권이 ‘검열’을 했지만, 이제 금권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처럼 세계화가 초래한 문화의 위기상황에서 문화생산자는 어느 때보다 위협받고 있으며, 그래서 오히려 드물고 필요하며 소중한 존재가 됐다.
인터넷은 문학을 대체할 수 없다
삶은 문학의 원천이 될 수도 있지만 문학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삶이 문학에 노골적인 방식으로 개입하면, 문학을 파괴할 수도 있다. 문학은 삶, 시민, 관중, 독자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문학의 질을 떨어뜨리는 부정적 요소를 가리킨다. 과학이 문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 의견에 반대한다. 문학은 과학의 발전과 관계가 없다. 문학에 중요한 것은 외적 세계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 내면세계의 발견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터넷 때문에 문학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인터넷이 위대한 문학, 다시 말해 질 높은 문학작품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칼 폴라니는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암에 비유했다. 자본주의는 농업공동체와 봉건국가 사이의 틈새에서 태어나 그 내부 세포들을 침략하여 자신의 생리에 따라 그 세포들의 성향을 변형시켰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여전히 기생적이다. 그렇다면 소비자로서의 노동자 그리고 노동자로서의 소비자의 초국적 연계망은, 말하자면 항암성 세포들의 문화다. 그것을 자본과 국가가 제거하려 한다면 먼저 자신들의 생산조건부터 제거해야 한다. 내가 읽은 바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이런 문화의 창출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한다. 말하자면 (상품과 화폐 사이의) 가치형태에 내재한 비대칭적 관계가 자본을 생산하는데, 역으로 자본을 종식시킬 수 있는 입장전환의 계기가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므로 이런 계기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트랜스크리티시즘의 과제가 될 것이다(논문 결론 부분).
도덕적 임무와 투기 구분 배워야
21세기 시점에서 글을 쓰는 작가는 거의 필연적으로 역사 언어 인종 그리고 문화적 전유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조건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V.S. 나이폴이나 샐먼 루시디처럼 영어나 유럽의 다른 언어권 작가들이 끊임없이 탈식민지상황의 아프리카, 알제리, 동인도제도, 캐리비안제도를 주제로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작가 내부의 검열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를테면 감히 영국 백인여성이 영연방 흑인남성처럼 글을 쓸 수 있는가. 아니면 호주의 백인 원주민 소년이나 또는 원주민 소년을 위해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식이다. 또 인종차별적이고 반유대적이며 동양차별적인 묘사가 담겨 있는 책을 문학의 정전으로 계속 포함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정전의 목록에서 삭제해야 하는가를 놓고 망설인다. 이것이 역사와 문화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탈식민주의적 상황에서 작가들은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선배들보다 도덕적 임무와 상업적 투기를 구분하는 방법을 잘 배워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