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꼭 50년이 되는 해다. 정부를 세운 지 만 2년도 채 되지 않은 1950년은 매우 불안했다. 38선에는 남북한군 사이의 총격전이 잦았고, 북한에서는 중공군과 소련군에 속해 있던 조선인 병사들이 들어와 속속 사단을 창설하고 있었다. 육본 정보국과 맥아더 원수가 지휘하는 미 극동군 정보참모부 산하 한국인 첩보대인 KLO, 미 극동 공군 첩보부대인 ASIS, 갓 창설된 CIA 극동지부장 하리마오 박씨(한국계 미국인) 등은 자신의 상관에게 끊임없이 6월 전쟁 가능성을 보고하였다.
하지만 그해 1월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한국을 미국의 대공산권 방어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5월1일 메이데이를 앞두고 남한에서는 남로당 계열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는 첩보가 있었다. 5월30일 제2대 총선이 끝난 직후인 6월7일 북한은 돌연 “남북한 총선거를 하자”고 제의했다. 이렇게 정황이 뒤숭숭해지자 육본은 6월11일부로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하달하였다. 그런데 미 군사고문단장(대령)이 채병덕 당시 육군 총참모장에게 강력히 비상경계령 해제를 요구하였다. 미 군사고문단장이 비상경계령 해제를 요구한 이유는 지금까지도 비밀에 싸여 있다.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것은 6월24일 0시부터였고, 그날 밤(토요일) 장교들은 육군참모대 구내에 완공한 장교구락부 낙성식에 참석해 흥겨운 댄스파티를 벌였다. 약 3분의 1 정도의 전후방 장병들도 외출 외박을 나갔다. 그날 밤 태풍 엘시 때문에 전국적으로 뇌성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가 걷힐 때쯤인 25일 새벽 4시, 38선 전역이 뇌성 대신 포성으로 시끄러워지고, 폭우 대신 ‘탄우’(彈雨)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전쟁 직전 8개 사단이던 국군은 개전 3일만에 3개 사단이 전멸하는 타격을 입었다. 반면 10개 사단, 1개 여단으로 전쟁을 시작한 인민군은 곧 3개 사단을 증설해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다.
전쟁은 20세기 한반도를 휘젓은 ‘광풍’이었다. 이 광풍에 휩쓸려 남한에서는 230만, 북한에서는 292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과 중국 역시 엄청난 ‘크로스 펀치’를 맞아 미군은 5만4260명, 인해전술을 펼친 중국군은 그보다 훨씬 많은 장병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월남전에서 희생된 한국군 수가 5000여명인 것에 비하면 미군과 중국군의 희생은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광풍의 산물로 20세기 후반과 21세기를 관류할 동북아의 국제질서가 만들어졌다. 이렇듯 전쟁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규정해 버렸는데도,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의 필요성을 모르듯이 우리는 한국전쟁의 의미를 망각한 채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이 역사적인 한국전쟁을 기리는 행사가 6월25일 중앙기념식을 필두로 전국에서 이뤄진다. 미국을 비롯한 19개 UN 참전국들도 한국과 자기 나라에서 대규모 기념행사를 갖는다. 북한은 북한대로 그들이 말하는 ‘조국해방전쟁 전승일’ 기념식을 가질 것이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지원했다는 뜻으로 ‘항미원조전’(抗美援朝戰)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 중국은 미국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으므로 항미원조전 기념식을 성대히 열 것이다.
그렇다면 UN을 비롯한 우리 쪽이 해석하는 한국전쟁의 성격은 무엇일까. 우리쪽 행사를 주관할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회(위원장 백선엽 예비역 대장)는 이 전쟁을 “공산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고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전쟁”이라며 ‘자유수호전쟁’으로 명명했다. 기념사업회는 이 의미를 고취시키기 위해 만 3년에 걸쳐 낙동강 방어전 행사-인천상륙작전 행사 등을 열 계획이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은 이러한 행사를 위축시킬지도 모른다. 남북정상회담은 전쟁을 통해 왜곡돼 버린 한반도 질서를 우리 힘으로 바로잡자는 것이다. 그런 만큼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은 6·25전쟁 50주년 기념 행사가 정치 논리에 따라 축소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해 1월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한국을 미국의 대공산권 방어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5월1일 메이데이를 앞두고 남한에서는 남로당 계열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는 첩보가 있었다. 5월30일 제2대 총선이 끝난 직후인 6월7일 북한은 돌연 “남북한 총선거를 하자”고 제의했다. 이렇게 정황이 뒤숭숭해지자 육본은 6월11일부로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하달하였다. 그런데 미 군사고문단장(대령)이 채병덕 당시 육군 총참모장에게 강력히 비상경계령 해제를 요구하였다. 미 군사고문단장이 비상경계령 해제를 요구한 이유는 지금까지도 비밀에 싸여 있다.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것은 6월24일 0시부터였고, 그날 밤(토요일) 장교들은 육군참모대 구내에 완공한 장교구락부 낙성식에 참석해 흥겨운 댄스파티를 벌였다. 약 3분의 1 정도의 전후방 장병들도 외출 외박을 나갔다. 그날 밤 태풍 엘시 때문에 전국적으로 뇌성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폭우가 걷힐 때쯤인 25일 새벽 4시, 38선 전역이 뇌성 대신 포성으로 시끄러워지고, 폭우 대신 ‘탄우’(彈雨)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전쟁 직전 8개 사단이던 국군은 개전 3일만에 3개 사단이 전멸하는 타격을 입었다. 반면 10개 사단, 1개 여단으로 전쟁을 시작한 인민군은 곧 3개 사단을 증설해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다.
전쟁은 20세기 한반도를 휘젓은 ‘광풍’이었다. 이 광풍에 휩쓸려 남한에서는 230만, 북한에서는 292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과 중국 역시 엄청난 ‘크로스 펀치’를 맞아 미군은 5만4260명, 인해전술을 펼친 중국군은 그보다 훨씬 많은 장병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월남전에서 희생된 한국군 수가 5000여명인 것에 비하면 미군과 중국군의 희생은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광풍의 산물로 20세기 후반과 21세기를 관류할 동북아의 국제질서가 만들어졌다. 이렇듯 전쟁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규정해 버렸는데도, 물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의 필요성을 모르듯이 우리는 한국전쟁의 의미를 망각한 채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이 역사적인 한국전쟁을 기리는 행사가 6월25일 중앙기념식을 필두로 전국에서 이뤄진다. 미국을 비롯한 19개 UN 참전국들도 한국과 자기 나라에서 대규모 기념행사를 갖는다. 북한은 북한대로 그들이 말하는 ‘조국해방전쟁 전승일’ 기념식을 가질 것이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지원했다는 뜻으로 ‘항미원조전’(抗美援朝戰)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 중국은 미국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으므로 항미원조전 기념식을 성대히 열 것이다.
그렇다면 UN을 비롯한 우리 쪽이 해석하는 한국전쟁의 성격은 무엇일까. 우리쪽 행사를 주관할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회(위원장 백선엽 예비역 대장)는 이 전쟁을 “공산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고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전쟁”이라며 ‘자유수호전쟁’으로 명명했다. 기념사업회는 이 의미를 고취시키기 위해 만 3년에 걸쳐 낙동강 방어전 행사-인천상륙작전 행사 등을 열 계획이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은 이러한 행사를 위축시킬지도 모른다. 남북정상회담은 전쟁을 통해 왜곡돼 버린 한반도 질서를 우리 힘으로 바로잡자는 것이다. 그런 만큼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은 6·25전쟁 50주년 기념 행사가 정치 논리에 따라 축소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