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모 신문사의 입사시험에서 실제 있었던 일. 신입사원을 뽑기 위해 입사지원서를 검토하던 한 간부는 지원서 하나를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지원서에는 자신이 ‘게이’임을 정정당당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 필기시험을 통과한 이 지원자 때문에 사내에서는 그를 뽑을지 말지로 한동안 논란이 벌어졌고, 결국 그를 합격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지금 그 신문사에 잘 다니고 있다.
결코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다. 세상은 이렇게 변하고 있다. 지금의 상식이 내일이면 ‘비상식’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세상이다. 어쨌거나 멀게만 느껴지고 ‘오긴 올까’ 생각되었던 21세기가 왔다. 정말로! 그런데도 세상은 무너지지도 않았고, 지구가 멸망하지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뭐가 어쨌는데?”
물론 한 세기가 바뀌고 새 천년이 왔다고 해서 인간과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주변 환경이 한꺼번에 바뀌는 것은 아니다. 21세기의 새 변화는 분명 지난 20세기에 진행됐던 것이고, 우리가 그리는 21세기 또한 ‘20세기가 보는 21세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21세기 또한 지나간 세기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은 인간이 건설하는 세기가 될 것이고, 인류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위대한 세기’가 될 수도 있는가 하면, ‘추악한 세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또한 새 밀레니엄의 문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 1만년 동안 인간의 DNA에 괄목할 만한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수백년 동안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기적을 만들 수도 있고, 괴물을 만들 수도 있다. 이런 도전은 기실 ‘과학’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의 문제다.”
20세기의 문이 열리던 1900년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불씨를 피우는 신문 ‘이스크라’ (불꽃)를 창간했다. 그리하여 20세기 전반기는 ‘혁명의 세기’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1949년 중국 혁명, 1958년 쿠바 혁명…. 바로 그래서 새 천년의 벽두에 우리들이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는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무엇을 얘기하는지에 따라 세상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다. 자, 당신들은 뭘 말할 것인가. 밀레니엄의 화두로 무엇을 잡을 것인가. ‘병 속의 새’에 대해? 아니면, 디지털?
지난 12월3일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소장 이명현)는 ‘지식지배사회의 빛과 그늘’이란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 심포지엄에서 김남두교수(서울대·철학)는 ‘지식의 지배:성격과 과제’라는 주제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변화에서, 그리고 그 변화를 설명하는 데 지식이 하나의 열쇠개념이 된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 지식은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가 되었다. 새로운 지식의 창출능력이나 응용능력이 기업이나 국가 모두의 생존에 직결된 사안이라는 주장도 부인될 수 없다. …지식지배시대라는 얼마간 생경한 말로 이 시대와 앞으로 오는 시대를 규정하면서 우리는 왜 지식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려 한다….”
지식이 21세기 최대의 화두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인 듯하다. 지난 10월 중순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 전세계 유네스코 위원들이 한데 모인 제30차 총회에서도 주제는 역시 지식이었다. ‘강대국의 흥망’을 쓴 미국 예일대 폴 케네디 교수는 총회의 특별포럼 연사로 참석해 정보의 ‘빈익빈 부익부’ 문제를 지적했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현재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인구는 전세계 인구의 4%(2억4000만명) 정도. 그러나 미국은 인구의 25%(5000만명)가 인터넷을 상용하고 있다. 이처럼 인터넷을 통한 지식과 정보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재화(財貨)와 정신의 편중이나 과독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김남두교수는 “특정 형식의 지식이 명령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지식의 지배는 일종의 체제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미 성립돼 있는 이 체제 내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이 체제에 적응하는 이외의 선택은 없다” 면서 “지구 전체가 하나의 시장이 되면서 경쟁의 강도는 치열해지며, 따라서 생산요소로서의 지식, 관리체계로서의 지식이 공동체나 기업의 생존에 직결된 요인이 된다”고 강조한다.
지난 97년 1월 정보통신부 산하의 사단법인으로 등록된 비영리 연구기관인 ‘새문명아카데미’ (www.anc. or.kr)’에서 올해부터 지식공유화 사업을 위한 세미나를 잇따라 개최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다. 이 단체는 지난 10월 ‘민간 주도의 지식공유시스템 모색과 지식대국의 길’이라는 주제로, 11월에는 ‘국가지식공유 네트워크 운용 및 지식국가로의 이노베이션’이라는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또한 삼성(아리샘)이나 LG그룹(EDS) 등이 지식공유시스템(KMS)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이것이 없으면 그만큼 경쟁에서 낙후되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주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디지털, 인터넷, 사이버, e-비즈니스, 정보화 사회 등도 결국은 ‘지식문명’의 일부에 속하는 구성요소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불안한 사실은 디지털 문화에 기초한 지식문명과 지식산업이 앞으로의 인류에게 어떤 괴물들을 만들어줄지 정확하게 모른다는 데 있다. SF영화 ‘데몰리션 맨’이나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 등이 일찍이 예언한 바처럼 21세기의 인간들은 ‘살이 맞닿는 섹스’를 꺼리게 되고, 사이보그와 사랑에 빠져 갈등하게 되며, 컴퓨터가 지배하는 가상현실 속에서 로고스를 잃은 채 살아갈지도 모른다.
혹시 ‘걸프전 증후군’을 알고 있는지. 이 증후군은 지난 90, 91년 걸프전에 참전한 일부 장병들이 겪고 있는 만성적인 통증, 소화장애, 구토증, 피부 발진, 피로, 기억력 상실 및 집중력 장애 등의 광범위한 증상이 포함된 질병. 이에 대해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월19일 걸프전 당시 이라크의 신경가스 공격으로부터 미군 장병들을 보호하기 위해 투약했던 약물인 ‘피리오스티그민 보롬화물’(PB)이 걸프전 증후군의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걸프전 당시 미국이 PB를 투약한 장병들은 전체 참전 장병 69만7000여명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30여만명. 걸프전은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결국 그들에게 승리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걸프전이 전세계의 이목을 끈 것은 전쟁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스펙터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요소 가운데는 ‘환경 재앙’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중에 ‘베네통’의 이미지 광고에도 차용된, 원유를 잔뜩 뒤집어쓰고 시커멓게 변해 빨간 눈만 내놓은 갈매기가 해변에서 죽어가는 장면은 전세계인들에게 전쟁의 참혹함보다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지구는 정말로 새도 지저귀지 않고 싹도 돋지 않는 ‘불임의 땅’이 될 것인가.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자행되는 환경오염의 실태를 보고 있노라면, 이같은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기도 어렵다.
환경 재앙의 심각성은 지구적 환경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원하지 않는 변화를 겪게 된다는 데 있다. 환경호르몬의 정체를 최초로 밝힌 ‘도둑맞은 미래’란 책이 지적하고 있듯, 체내로 들어간 화학물질이 마치 호르몬처럼 행동하면서 인체의 정상적인 생리기능을 방해하거나 교란시킨다. 이로 인해 남성과 수컷의 정자수가 감소하거나, 수컷이 암컷화되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간디는 일찍이 서구식 산업주의가 인류 모두에게 최악의 저주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식의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는 데카르트적 합리성은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지구의 모든 생명과 인류 절멸의 위기를 초래했다. 기존 사유의 틀로는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인간중심에서 생태중심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 생태철학이 나오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다.
생태주의는 성장 제일주의적 산업문명을 넘어서는 탈근대적 문명전환운동을 지향한다. 지배가 아닌 공존,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 시장 경쟁이 아닌 나눔의 공동체가 목표가 된다. 지배와 복종, 억압과 차별, 부자와 가난한 자, 환경파괴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사회를 이룩하려는 모색의 한 가운데에 생태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기에도 그랬지만 21세기에도 환경과 생태주의가 더욱 ‘처절한’ 화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복제양 둘리의 충격과 인간복제의 가능성, 유전자 조작을 통한 생명공학의 발전은 세기를 넘어서 인류에게 더 심각한 경고음을 발산한다. 그래서 서울대 장회익교수(물리학)는 “이제 인류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제는 ‘원하는 바’를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적정의 성취’에 맞추어 조정해낼 것인지 하는 점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또 하나의 얘기.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모 국가에서는 외교관을 해외에 파견할 때 그 외교관 자녀의 크레파스 비용까지도 부담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경비가 너무 많아져 혼자 사는 독신을 선호하고, 이에 따라 ‘게이 외교관’도 늘어나는 추세라는 것. 최근 우리 나라에 부임한 한 외교관도 이같은 ‘게이 외교관’이라는 얘기다.
전통적인 가족제도의 변화 내지 이에 대한 도전, 혹은 붕괴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늘상 일어나는 일이다. 사이버 결혼정보회사인 ‘닥스클럽’(www.daksclub.co.kr)의 지난 11월 ‘사이비 미팅 대축제’를 통해 만난 회사원 이모씨와 의사 신모씨는 미팅 5일만에 초고속으로 결혼에 합의하고 12월에 결혼했다. 서로 바쁘고 거주지도 먼 이들이 데이트를 한 곳은 사이버 공간의 채팅 룸. 이처럼 만남에서부터 연애까지도 사이버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이버 연애는 이제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동국대 조은 교수(사회학)는 21세기를 전망하는 ‘창작과비평’(99년 봄호)의 특집에서 ‘가족제도의 운명과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이라는 논문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보사회의 진전은 사이버 가족의 등장도 예고한다. 결혼개념에 변화가 오고, 직접 만나는 일 없이 가상공간에서 부부생활을 하는 ‘사이버 부부’도 가능하다. 사이버 결혼이나 사이버 부부는 성 사랑 결혼 등을 둘러싼 개념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자신이 만든 이상형의 파트너와 가상공간에서 연애를 하거나 사이버섹스를 하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배타적 사랑에 기반한 성과 결혼을 이상시하던 낭만적 가족의 각본이 변화할 것이며 친밀함의 구조변동을 또 한 차례 경험할 수도 있다. 사이버공동체는 여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공동체의 개념 또한 바꾸어놓을 것이다.”
보다 가까운 시간 안으로 가족의 의미가 재정의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가족성원들은 외부와 연결되는 다양한 개인회선을 보유함으로써 가족원보다는 네트워크에 의존한 인간관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고, 세대가 다른 부모와 자녀는 각각 자신의 행동원칙과 시간대를 가짐으로써 가족의 개인화가 더욱 가속되며, 부부끼리도 개인화된 네트워크가 확장되게 된다. 이른바 ‘네트워크형 가족’의 부상이라고 할까. 전통적 부계 혈연가족은 긴장과 해체의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족의 변화는 결국 성(섹슈얼리티)의 다원화나 규범의 변화와도 직결된다. 조은 교수는 “재생산 기능으로서의 성의 의미는 탈색되고 쾌락을 위한 성이 더욱 일반화함에 따라 섹슈얼리티에 대한 규범이 변화하고, 이를 둘러싼 기존의 가치가 전복되며,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급진적 담론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지금도 동성애의 ‘커밍 아웃’과 함께 성정치(sexual politics)가 정치 판도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날로 커지는 추세다.
21세기는 ‘유토피아’일까, 아니면 ‘디스토피아’가 될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결국 사람들이 위의 세 가지 화두에 대해 얼마나 성실한 모색과 노력을 기울이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지원서에는 자신이 ‘게이’임을 정정당당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 필기시험을 통과한 이 지원자 때문에 사내에서는 그를 뽑을지 말지로 한동안 논란이 벌어졌고, 결국 그를 합격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지금 그 신문사에 잘 다니고 있다.
결코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다. 세상은 이렇게 변하고 있다. 지금의 상식이 내일이면 ‘비상식’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세상이다. 어쨌거나 멀게만 느껴지고 ‘오긴 올까’ 생각되었던 21세기가 왔다. 정말로! 그런데도 세상은 무너지지도 않았고, 지구가 멸망하지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뭐가 어쨌는데?”
물론 한 세기가 바뀌고 새 천년이 왔다고 해서 인간과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주변 환경이 한꺼번에 바뀌는 것은 아니다. 21세기의 새 변화는 분명 지난 20세기에 진행됐던 것이고, 우리가 그리는 21세기 또한 ‘20세기가 보는 21세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21세기 또한 지나간 세기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은 인간이 건설하는 세기가 될 것이고, 인류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위대한 세기’가 될 수도 있는가 하면, ‘추악한 세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또한 새 밀레니엄의 문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난 1만년 동안 인간의 DNA에 괄목할 만한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수백년 동안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기적을 만들 수도 있고, 괴물을 만들 수도 있다. 이런 도전은 기실 ‘과학’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의 문제다.”
20세기의 문이 열리던 1900년 블라디미르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불씨를 피우는 신문 ‘이스크라’ (불꽃)를 창간했다. 그리하여 20세기 전반기는 ‘혁명의 세기’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1949년 중국 혁명, 1958년 쿠바 혁명…. 바로 그래서 새 천년의 벽두에 우리들이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는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무엇을 얘기하는지에 따라 세상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다. 자, 당신들은 뭘 말할 것인가. 밀레니엄의 화두로 무엇을 잡을 것인가. ‘병 속의 새’에 대해? 아니면, 디지털?
지난 12월3일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소장 이명현)는 ‘지식지배사회의 빛과 그늘’이란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 심포지엄에서 김남두교수(서울대·철학)는 ‘지식의 지배:성격과 과제’라는 주제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변화에서, 그리고 그 변화를 설명하는 데 지식이 하나의 열쇠개념이 된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 지식은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가 되었다. 새로운 지식의 창출능력이나 응용능력이 기업이나 국가 모두의 생존에 직결된 사안이라는 주장도 부인될 수 없다. …지식지배시대라는 얼마간 생경한 말로 이 시대와 앞으로 오는 시대를 규정하면서 우리는 왜 지식이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려 한다….”
지식이 21세기 최대의 화두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인 듯하다. 지난 10월 중순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 전세계 유네스코 위원들이 한데 모인 제30차 총회에서도 주제는 역시 지식이었다. ‘강대국의 흥망’을 쓴 미국 예일대 폴 케네디 교수는 총회의 특별포럼 연사로 참석해 정보의 ‘빈익빈 부익부’ 문제를 지적했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현재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인구는 전세계 인구의 4%(2억4000만명) 정도. 그러나 미국은 인구의 25%(5000만명)가 인터넷을 상용하고 있다. 이처럼 인터넷을 통한 지식과 정보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재화(財貨)와 정신의 편중이나 과독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김남두교수는 “특정 형식의 지식이 명령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지식의 지배는 일종의 체제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미 성립돼 있는 이 체제 내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이 체제에 적응하는 이외의 선택은 없다” 면서 “지구 전체가 하나의 시장이 되면서 경쟁의 강도는 치열해지며, 따라서 생산요소로서의 지식, 관리체계로서의 지식이 공동체나 기업의 생존에 직결된 요인이 된다”고 강조한다.
지난 97년 1월 정보통신부 산하의 사단법인으로 등록된 비영리 연구기관인 ‘새문명아카데미’ (www.anc. or.kr)’에서 올해부터 지식공유화 사업을 위한 세미나를 잇따라 개최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다. 이 단체는 지난 10월 ‘민간 주도의 지식공유시스템 모색과 지식대국의 길’이라는 주제로, 11월에는 ‘국가지식공유 네트워크 운용 및 지식국가로의 이노베이션’이라는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또한 삼성(아리샘)이나 LG그룹(EDS) 등이 지식공유시스템(KMS)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이것이 없으면 그만큼 경쟁에서 낙후되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주제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디지털, 인터넷, 사이버, e-비즈니스, 정보화 사회 등도 결국은 ‘지식문명’의 일부에 속하는 구성요소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불안한 사실은 디지털 문화에 기초한 지식문명과 지식산업이 앞으로의 인류에게 어떤 괴물들을 만들어줄지 정확하게 모른다는 데 있다. SF영화 ‘데몰리션 맨’이나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 등이 일찍이 예언한 바처럼 21세기의 인간들은 ‘살이 맞닿는 섹스’를 꺼리게 되고, 사이보그와 사랑에 빠져 갈등하게 되며, 컴퓨터가 지배하는 가상현실 속에서 로고스를 잃은 채 살아갈지도 모른다.
혹시 ‘걸프전 증후군’을 알고 있는지. 이 증후군은 지난 90, 91년 걸프전에 참전한 일부 장병들이 겪고 있는 만성적인 통증, 소화장애, 구토증, 피부 발진, 피로, 기억력 상실 및 집중력 장애 등의 광범위한 증상이 포함된 질병. 이에 대해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0월19일 걸프전 당시 이라크의 신경가스 공격으로부터 미군 장병들을 보호하기 위해 투약했던 약물인 ‘피리오스티그민 보롬화물’(PB)이 걸프전 증후군의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걸프전 당시 미국이 PB를 투약한 장병들은 전체 참전 장병 69만7000여명 중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30여만명. 걸프전은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결국 그들에게 승리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걸프전이 전세계의 이목을 끈 것은 전쟁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스펙터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요소 가운데는 ‘환경 재앙’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중에 ‘베네통’의 이미지 광고에도 차용된, 원유를 잔뜩 뒤집어쓰고 시커멓게 변해 빨간 눈만 내놓은 갈매기가 해변에서 죽어가는 장면은 전세계인들에게 전쟁의 참혹함보다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지구는 정말로 새도 지저귀지 않고 싹도 돋지 않는 ‘불임의 땅’이 될 것인가.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자행되는 환경오염의 실태를 보고 있노라면, 이같은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보장하기도 어렵다.
환경 재앙의 심각성은 지구적 환경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원하지 않는 변화를 겪게 된다는 데 있다. 환경호르몬의 정체를 최초로 밝힌 ‘도둑맞은 미래’란 책이 지적하고 있듯, 체내로 들어간 화학물질이 마치 호르몬처럼 행동하면서 인체의 정상적인 생리기능을 방해하거나 교란시킨다. 이로 인해 남성과 수컷의 정자수가 감소하거나, 수컷이 암컷화되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간디는 일찍이 서구식 산업주의가 인류 모두에게 최악의 저주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식의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는 데카르트적 합리성은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지구의 모든 생명과 인류 절멸의 위기를 초래했다. 기존 사유의 틀로는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인간중심에서 생태중심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 생태철학이 나오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다.
생태주의는 성장 제일주의적 산업문명을 넘어서는 탈근대적 문명전환운동을 지향한다. 지배가 아닌 공존,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 시장 경쟁이 아닌 나눔의 공동체가 목표가 된다. 지배와 복종, 억압과 차별, 부자와 가난한 자, 환경파괴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사회를 이룩하려는 모색의 한 가운데에 생태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기에도 그랬지만 21세기에도 환경과 생태주의가 더욱 ‘처절한’ 화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복제양 둘리의 충격과 인간복제의 가능성, 유전자 조작을 통한 생명공학의 발전은 세기를 넘어서 인류에게 더 심각한 경고음을 발산한다. 그래서 서울대 장회익교수(물리학)는 “이제 인류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제는 ‘원하는 바’를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적정의 성취’에 맞추어 조정해낼 것인지 하는 점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또 하나의 얘기.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모 국가에서는 외교관을 해외에 파견할 때 그 외교관 자녀의 크레파스 비용까지도 부담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경비가 너무 많아져 혼자 사는 독신을 선호하고, 이에 따라 ‘게이 외교관’도 늘어나는 추세라는 것. 최근 우리 나라에 부임한 한 외교관도 이같은 ‘게이 외교관’이라는 얘기다.
전통적인 가족제도의 변화 내지 이에 대한 도전, 혹은 붕괴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늘상 일어나는 일이다. 사이버 결혼정보회사인 ‘닥스클럽’(www.daksclub.co.kr)의 지난 11월 ‘사이비 미팅 대축제’를 통해 만난 회사원 이모씨와 의사 신모씨는 미팅 5일만에 초고속으로 결혼에 합의하고 12월에 결혼했다. 서로 바쁘고 거주지도 먼 이들이 데이트를 한 곳은 사이버 공간의 채팅 룸. 이처럼 만남에서부터 연애까지도 사이버 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이버 연애는 이제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동국대 조은 교수(사회학)는 21세기를 전망하는 ‘창작과비평’(99년 봄호)의 특집에서 ‘가족제도의 운명과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이라는 논문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보사회의 진전은 사이버 가족의 등장도 예고한다. 결혼개념에 변화가 오고, 직접 만나는 일 없이 가상공간에서 부부생활을 하는 ‘사이버 부부’도 가능하다. 사이버 결혼이나 사이버 부부는 성 사랑 결혼 등을 둘러싼 개념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자신이 만든 이상형의 파트너와 가상공간에서 연애를 하거나 사이버섹스를 하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배타적 사랑에 기반한 성과 결혼을 이상시하던 낭만적 가족의 각본이 변화할 것이며 친밀함의 구조변동을 또 한 차례 경험할 수도 있다. 사이버공동체는 여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공동체의 개념 또한 바꾸어놓을 것이다.”
보다 가까운 시간 안으로 가족의 의미가 재정의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가족성원들은 외부와 연결되는 다양한 개인회선을 보유함으로써 가족원보다는 네트워크에 의존한 인간관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고, 세대가 다른 부모와 자녀는 각각 자신의 행동원칙과 시간대를 가짐으로써 가족의 개인화가 더욱 가속되며, 부부끼리도 개인화된 네트워크가 확장되게 된다. 이른바 ‘네트워크형 가족’의 부상이라고 할까. 전통적 부계 혈연가족은 긴장과 해체의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족의 변화는 결국 성(섹슈얼리티)의 다원화나 규범의 변화와도 직결된다. 조은 교수는 “재생산 기능으로서의 성의 의미는 탈색되고 쾌락을 위한 성이 더욱 일반화함에 따라 섹슈얼리티에 대한 규범이 변화하고, 이를 둘러싼 기존의 가치가 전복되며,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급진적 담론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지금도 동성애의 ‘커밍 아웃’과 함께 성정치(sexual politics)가 정치 판도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날로 커지는 추세다.
21세기는 ‘유토피아’일까, 아니면 ‘디스토피아’가 될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결국 사람들이 위의 세 가지 화두에 대해 얼마나 성실한 모색과 노력을 기울이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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