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선 아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구려의 유적지는 어디가 있을까? 광개토대왕은 396년에 한강 유역을 수중에 넣었다. 그의 아들 장수왕은 더욱 밀고 내려와 국경선을 동서로, 영덕에서 아산만까지 넓혔다. 551년에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의 나제동맹에 밀려 한강 유역에서 퇴각할 때까지 고구려는 150년 가량 삼팔 이남을 점령했다. 그 기간 그 어딘가에 고구려는 자취를 남겨 놓았을 테지만, 이제 와 찾아볼 만한 건 지극히 드물다.
국보 205호로 지정된 장수왕 때 세워진 충주시의 중원 고구려비가 비석으론 유일하다. 1979년에 비문이 판독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기 전까지는 민가의 돌기둥이 되기도 했던 하찮은 것이었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공하면서 차지했다는 전략적 요충지 관미성조차 어디인지 불확실하다. 임진각 못미쳐서 자유로 옆의 통일전망대가 있는 오두산이라고도 하고, 강화도 교동도의 화개산성이라고도 하고, 예성강 근처라고도 한다. 강화도 고려산에는 연개소문이 태어났다고 전해오는 집터가 있다지만,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빈터일 뿐이다.
가까스로 남겨진, 그것도 놀라운 변신과 애절한 사연을 담은 온달의 유적지 온달산성이 거의 유일하게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고구려의 자취다.
‘삼국사기’ 열전편에는 온달의 생애가 적혀 있다. 고구려 평원왕(?∼590년 일명 평강왕) 시절에 마음 착한 온달이 살았다. 얼굴이 기이하게 생기고, 다 떨어진 옷과 낡은 신발을 신고 다녀서 사람들이 바보라고 놀렸다. 그는 문전 걸식을 하여 눈먼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때 평강왕에게는 잘 우는 공주가 있었다. 왕은 공주를 달래려고, 그렇게 울기만 하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놀렸다. 공주가 시집갈 나이가 되자, 왕은 귀족 집안의 자제와 혼인시키려 했다. 공주는 이를 마다하고 아버지가 예전에 했던 말을 지키라고 요청했다. 크게 화가 난 평강왕은 공주를 쫓아냈고,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 그의 아내가 되었다.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남편에게 적절한 조언도 하였다. 훌륭한 말을 고르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무술을 연마하도록 했다. 온달은 무술경연대회에 입상하고, 북쪽에 쳐들어오는 북주(北周) 세력을 물리쳐서 일약 왕의 호감을 사게 되고, 사위로서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바보 온달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부마가 된 것이다.
평강왕의 뒤를 이은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은 왕 앞에 나아가 잃어버린 옛땅을 되찾으려 하오니 군사를 내어 주십사고 간청했다. 그때 그가 비장하게 펼친 각오는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온달은 죽령의 북쪽인 영춘까지 진출하게 된다. 590년의 일이다. 영춘에 있는 온달산성은 온달과 그의 여동생이 하루아침에 쌓았다고 전한다. 여동생이 산 아래 강변에서 치마폭에 돌을 나르다가 잠시 쉬었다는 곳은 ‘쉬는 돌’(休石洞)이라는 지명을 얻어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성산(城山) 밑 남한강가에서 온달산성을 오르는 데는 30분쯤 걸린다. 둘레 682m의 웅장한 성곽이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다. 단양 지방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석회암으로 쌓았다. 널빤지처럼 얇고 평평하여 마치 모전석탑을 보는 듯하다. 돌을 쌓을 때도 한 층은 동에서 서로, 한 층은 남에서 북으로 엇쌓아서 견고하게 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비결이다. 성벽 또한 높고 웅장하여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굽이 흐르는 남한강 줄기가 훤히 내려다보여 방어기지로서 맞춤하게 느껴진다.
이웃한 장발리 마을에는 선돌이 하나 있는데, 마고할멈이 성 쌓는 일을 돕다가 온달이 신라군에 패하여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팽개친 돌이라고 한다. 과장이 심하지만, 온달이 이 지역과 맺고 있는 인연의 깊이가 느껴진다. 그럼 문헌엔 어떻게 나와 있을까?
‘삼국사기’에는 온달의 최후가 적혀 있다.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고, 화살에 맞아 퇴각하다가 전사했다.”
여기서 아단성이 어디인가? 논란이 있다. 서울 광장동의 아차산성(峨嵯山城)이 곧 아단성이라는 주장을 사학자 이병도씨가 편 적이 있다. 이는 실학자 정약용이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아단성을 아차성으로 비정(比定)한 뒤로 주류를 이루어왔다. 하지만 아차산성은 온달이 회복하겠다는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 땅과 너무나 멀고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여타의 자료도 부족하다. 이에 맞서 아단성이 온달산 성이란 새로운 지적은 훨씬 설득력이 있다. 고구려 때에 영춘현을 을아단현(乙阿旦縣)이라고 했고, 위쪽을 뜻하는 ‘을’자가 탈락되어 아단성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지방엔 온달에 관련된 전설이 많고, 온달산성 주변 지명들 또한 군사적 용어여서 신빙성을 더한다. 단양의 향토사가인 윤수경씨의 조사에 따르면, 온달산성을 중심으로 4km 안의 82개 마을 이름 중 46개가 군사용어였다. 장군목, 둔친목, 분산골, 피바위골 따위의 이름이 좋은 예다.
계립현과 죽령을 회복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던 온달의 말 때문인지, 숨을 거둔 온달의 “장례를 치르려니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고를 듣고 달려온 평강공주가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됐는데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며 울며 달래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온달편의 마지막 대목이다. 북한에서 발행된 ‘가요집’(김상훈 편, 1983년 문예출판사)에는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부른 ‘귀호곡’(歸號哭)이 있었다고 한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난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위 증즐가 태평성대/ 날러는 엇디 살라 하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위 증즐가 태평성대/ 잡사와 두어라 마나난/ 선하면 아니올셰라/ 나난 위 증즐가 태평성대/ 셜은 님 보내압노니 나난/ 가시난닷 도셔오쇼서/ 나난 위 증즐가 태평성대”
‘악장가사’에 실린 이 고대 가요 ‘가시리’가 ‘귀호곡’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 있다고 위 책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단정짓기는 곤란하다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1400년이나 흘러 조각나버린 옛 일의 파편들을 모아 붙여보려 하니, 학설이 구구하기는 남북이 다를 바 없다.
국보 205호로 지정된 장수왕 때 세워진 충주시의 중원 고구려비가 비석으론 유일하다. 1979년에 비문이 판독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기 전까지는 민가의 돌기둥이 되기도 했던 하찮은 것이었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공하면서 차지했다는 전략적 요충지 관미성조차 어디인지 불확실하다. 임진각 못미쳐서 자유로 옆의 통일전망대가 있는 오두산이라고도 하고, 강화도 교동도의 화개산성이라고도 하고, 예성강 근처라고도 한다. 강화도 고려산에는 연개소문이 태어났다고 전해오는 집터가 있다지만,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빈터일 뿐이다.
가까스로 남겨진, 그것도 놀라운 변신과 애절한 사연을 담은 온달의 유적지 온달산성이 거의 유일하게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고구려의 자취다.
‘삼국사기’ 열전편에는 온달의 생애가 적혀 있다. 고구려 평원왕(?∼590년 일명 평강왕) 시절에 마음 착한 온달이 살았다. 얼굴이 기이하게 생기고, 다 떨어진 옷과 낡은 신발을 신고 다녀서 사람들이 바보라고 놀렸다. 그는 문전 걸식을 하여 눈먼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때 평강왕에게는 잘 우는 공주가 있었다. 왕은 공주를 달래려고, 그렇게 울기만 하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겠다고 놀렸다. 공주가 시집갈 나이가 되자, 왕은 귀족 집안의 자제와 혼인시키려 했다. 공주는 이를 마다하고 아버지가 예전에 했던 말을 지키라고 요청했다. 크게 화가 난 평강왕은 공주를 쫓아냈고,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 그의 아내가 되었다.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남편에게 적절한 조언도 하였다. 훌륭한 말을 고르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무술을 연마하도록 했다. 온달은 무술경연대회에 입상하고, 북쪽에 쳐들어오는 북주(北周) 세력을 물리쳐서 일약 왕의 호감을 사게 되고, 사위로서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바보 온달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부마가 된 것이다.
평강왕의 뒤를 이은 영양왕이 즉위하자, 온달은 왕 앞에 나아가 잃어버린 옛땅을 되찾으려 하오니 군사를 내어 주십사고 간청했다. 그때 그가 비장하게 펼친 각오는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온달은 죽령의 북쪽인 영춘까지 진출하게 된다. 590년의 일이다. 영춘에 있는 온달산성은 온달과 그의 여동생이 하루아침에 쌓았다고 전한다. 여동생이 산 아래 강변에서 치마폭에 돌을 나르다가 잠시 쉬었다는 곳은 ‘쉬는 돌’(休石洞)이라는 지명을 얻어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성산(城山) 밑 남한강가에서 온달산성을 오르는 데는 30분쯤 걸린다. 둘레 682m의 웅장한 성곽이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다. 단양 지방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석회암으로 쌓았다. 널빤지처럼 얇고 평평하여 마치 모전석탑을 보는 듯하다. 돌을 쌓을 때도 한 층은 동에서 서로, 한 층은 남에서 북으로 엇쌓아서 견고하게 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비결이다. 성벽 또한 높고 웅장하여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굽이 흐르는 남한강 줄기가 훤히 내려다보여 방어기지로서 맞춤하게 느껴진다.
이웃한 장발리 마을에는 선돌이 하나 있는데, 마고할멈이 성 쌓는 일을 돕다가 온달이 신라군에 패하여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팽개친 돌이라고 한다. 과장이 심하지만, 온달이 이 지역과 맺고 있는 인연의 깊이가 느껴진다. 그럼 문헌엔 어떻게 나와 있을까?
‘삼국사기’에는 온달의 최후가 적혀 있다.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신라군과 전투를 벌였고, 화살에 맞아 퇴각하다가 전사했다.”
여기서 아단성이 어디인가? 논란이 있다. 서울 광장동의 아차산성(峨嵯山城)이 곧 아단성이라는 주장을 사학자 이병도씨가 편 적이 있다. 이는 실학자 정약용이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아단성을 아차성으로 비정(比定)한 뒤로 주류를 이루어왔다. 하지만 아차산성은 온달이 회복하겠다는 계립현과 죽령의 서쪽 땅과 너무나 멀고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여타의 자료도 부족하다. 이에 맞서 아단성이 온달산 성이란 새로운 지적은 훨씬 설득력이 있다. 고구려 때에 영춘현을 을아단현(乙阿旦縣)이라고 했고, 위쪽을 뜻하는 ‘을’자가 탈락되어 아단성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지방엔 온달에 관련된 전설이 많고, 온달산성 주변 지명들 또한 군사적 용어여서 신빙성을 더한다. 단양의 향토사가인 윤수경씨의 조사에 따르면, 온달산성을 중심으로 4km 안의 82개 마을 이름 중 46개가 군사용어였다. 장군목, 둔친목, 분산골, 피바위골 따위의 이름이 좋은 예다.
계립현과 죽령을 회복하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던 온달의 말 때문인지, 숨을 거둔 온달의 “장례를 치르려니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부고를 듣고 달려온 평강공주가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됐는데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며 울며 달래자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온달편의 마지막 대목이다. 북한에서 발행된 ‘가요집’(김상훈 편, 1983년 문예출판사)에는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부른 ‘귀호곡’(歸號哭)이 있었다고 한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난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위 증즐가 태평성대/ 날러는 엇디 살라 하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위 증즐가 태평성대/ 잡사와 두어라 마나난/ 선하면 아니올셰라/ 나난 위 증즐가 태평성대/ 셜은 님 보내압노니 나난/ 가시난닷 도셔오쇼서/ 나난 위 증즐가 태평성대”
‘악장가사’에 실린 이 고대 가요 ‘가시리’가 ‘귀호곡’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 있다고 위 책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단정짓기는 곤란하다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1400년이나 흘러 조각나버린 옛 일의 파편들을 모아 붙여보려 하니, 학설이 구구하기는 남북이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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