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를 지난 50년간 지배해온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의 공감대가 오늘 신고립주의(new isolationism)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지난 10월28일 미 상원이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을 거부하자, 클린턴 대통령의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인 새뮤얼 샌디 버거가 공화당을 비난하며 분에 차 토해낸 말이다. 그는 또 “신고립주의자들은 미국 주위에 요새화된 담을 둘러치고 그 뒤에 은둔해버리는 생존주의자(survivalist)의 외교정책을 맹신하고 있다”고 공화당을 호되게 공격했다.
샌디 버거는 클린턴 외교정책의 총지휘자다. 클린턴의 외교정책에 샌디 버거만큼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은 찾기 힘들다. 클린턴의 첫번째 안보담당 보좌관이자 샌디 버거의 전임자였던 앤서니 레이크나 클린턴의 첫번째 국무장관이었던 워런 크리스토퍼도 영향력 면에서는 그와 견줄 바가 못됐다. 올브라이트 현 국무장관도 행정부 내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샌디 버거에 앞자리를 내줄 판이다.
CTBT의 상원 부결은 샌디 버거를 정점으로 한 민주당 외교정책의 또 하나의 실패작이자, 클린턴 외교 정책의 참패로 기록됐다. 클린턴 민주당의 외교정책 치고 어느 것 하나 순조로운 것이 없었다. 유엔 분담금 지불은 낙태문제를 볼모로 한 공화당의 딴죽에 걸렸고, 코소보 공습 때는 공화당 주도의 하원이 공습 지지를 거절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원은 외교지원 예산을 대폭 삭감시켜 버렸다. ‘외교’ 라는 말만 붙어 있으면 공화당이 사사건건 반기를 들었고, 급기야 CTBT에 이르러 샌디 버거의 입에서 ‘신고립주의자’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여론은 냉랭하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최근 사설에서 공화`-`민주 양당을 싸잡아 비난했다. 핵실험금지조약을 다루는 것을 보니 양당 모두 직무태만이며, 의회는 이제 더이상 외교정책을 놓고 사려깊은 대화를 할 만한 곳이 아니라고 꼬집은 것이다.
상원의 CTBT 거부가 신고립주의 논쟁을 불러오긴 했지만, 공화`-`민주 양당의 첨예한 대결이 우선 화근거리였다. 민주당은 지난 3년간 CTBT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상원 표결이 있기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CTBT는 민주당의 화두가 아니었다. 공화당이 조약 거부의 핵심적인 이유로 내세운 것은 금지 조약이 허점이 많고 불명확하다는 것이었다. 미국 내 핵무기 축적분에 대한 관리의 위험성과 잠재적인 핵무기 침략국 저지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화당 지도부 역시 금지조약을 방치해 왔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신고립주의 논쟁은 여전히 살아 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공화당 보수 진영에 신고립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인 것은 샌디 버거가 처음이 아니다. 그의 전임자인 앤서니 레이크도 민주당의 외교정책에 번번이 반기를 드는 공화당을 ‘아무것도 모르는 신고립주의자들’(neo`-`know`-`nothing`-`isolation-ists)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현재 미국이 펼치고 있는 외교정책을 볼 때 과연 신고립주의라는 표현이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클린턴 대통령 자신이나 공화당 지도부, 외교정책을 집행하는 고위 관료들이 주장하는 미국의 대외 정책은 사실상 한 맥락이다. 즉, 미국이 어차피 국제 관계에 개입 또는 간여(engage)하게 된다면,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외교정책을 확산시켜 분명한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고, 이에 대해서는 공화당 보수 진영이든 민주당의 진보 진영이든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국제관계 전공자들이 정의내리는 신고립주의는 샌디 버거가 말한 ‘울타리 안으로 숨어든다’는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미국이 세계의 일에 개입될(engaged) 수는 있지만, 반드시 세계를 지배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겸손한 의미의 개입이 진정한 신고립주의라는 것이다.
세계 질서를 미국의 정치`-`경제적 구조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로 미 외교정책의 핵심이어야 한다는 것이 클린턴의 주장인 반면, 진정한 의미의 신고립주의는 세계 질서를 미국화시켜 세계의 중심에 미국을 자리매김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핵실험금지조약을 거부한 공화당 보수진영을 신고립주의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논객인 짐 만은 “CTBT에 반대 표를 던진 공화당의 상원의원들 가운데에는 세계에서 미국이 강력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이들을 신고립주의자라고 부르기보다는 “일방주의자’(unilateralist)로 부르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짐 만은 또 “이 일방주의자들은 미국이 세계에서 한 발짝 물러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다른 국가들과 협조해 같이 일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힘에 모든 것을 의지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고 지적한다.
100년 전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치렀다. 그 이후 미국의 ‘고립주의자’들은 늘 미국의 힘의 한계를 강조했다. 미국은 미국의 이미지대로 세계를 바꿀 수도 없고 바꾸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외교정책에서 대통령에게 과도한 힘을 부과하는 것을 견제한 것도 고립주의자들이었다. 비밀 외교와 외교에서의 속임수를 경고한 것도 이들이었다.
신고립주의는 좌파는 물론 보수주의도 포용했다. “미국은 쳐부수어야 할 괴물을 찾아 해외로 나가서는 안된다”고 설파한 존 퀸지 애덤스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자였고 고립주의자였다. 못돼먹은 괴물을 찾아 자꾸 밖으로 나가게 되면 미 정책의 근본적인 좌우명이 자유에서 무력으로 바뀌게 되리라는 것이 그의 우려였다.
보수주의자이자 외교관인 조지 캐넌도 애덤스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확산을 위한 미 양당의 외교정책을 경고한다. “우리 자신의 국익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바로 그것이다. 만일 국내에서 우리가 목표로 삼는 것이 그리 흉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이들에게 무례하고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거나 우월감의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자신의 국익을 추구하게 되면 세계를 좀더 낫게 만드는 데 반드시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는 것이 조지 캐넌의 주장이다. 클린턴은 신고립주의를 혹평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국내의 강력한 힘으로 해외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려면, 오로지 국내 문제에만 집착하는 위험천만한 유혹을 극복해야만 한다”라고.
월남전 당시 언론인 월터 리프먼은 미국의 무분별한 세계 개입을 경고했다. “미국은 세계를 돌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의무대로라면 끊임없이 전쟁에 개입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미국이 정의의 십자군 전사라는 망상에 젖게 된다.” 이렇게 말했던 월터 리프먼 역시 참전론을 주장했 던 외교 전문가들로부터 ‘신고립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런 비난에 대해 월터 리프먼은 이렇게 응수했다.
“신고립주의는 어리석은 글로벌리즘에서 생산돼 나온 것이다. 우주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아니 적어도 지구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나는 신고립주의자 가운데 하나이며,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