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고 복잡한 일상에 시달리다 문득 인생이 실마리를 풀 수 없는 난마(亂麻)처럼 느껴질 때, 잠시 한 템포 멈춰서서 마음을 위무시키고 정화시켜줄 수 있는 책을 들춰보자. ‘삶의 가장 기초적인 지혜’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되짚어주는 책들을 읽다 보면 복잡다단하게만 여겨지던 ‘인생’이 실은 굵직한 몇개의 원칙을 뼈대로 이뤄진 건축물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최근 서점가에 선을 보인 ‘항아리’ (열림원)와 ‘도요새’(문학동네), ‘기다리는 사람은 자유롭다’(동아일보사)가 바로 그런 책들이다.
‘항아리’는 시인 정호승씨가 펴낸 ‘어른이 읽는 동화’. 허드렛일만을 하면서 자기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회의하다 범종 밑에 묻혀 아름다운 종소리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맡게 돼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는 항아리, 메마른 사막에서 태어난 자기 운명을 저주하다 지나친 욕심을 부린 바람에 뿌리가 뽑혀 죽은 선인장, 꿀맛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꿀통에 한발을 담갔다가 결국 꿀 속에 묻혀 황홀경 속에서 죽는 파리…. 무생물과 동식물, 때로는 가상의 동물인 비익조(比翼鳥)와 인면조(人面鳥) 등이 화자(話者)로 등장해 자신의 정체성을 자문하고, 남과 더불어 사는 미덕을 체득하는 과정을 통해 삶의 비의(秘意)를 풀어가는 우화집이다. 시인의 시작품만큼이나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 명료한 메시지 전달이 특징이다.
시인 하종오씨가 펴낸 ‘도요새’는 여러 가지 문맥에서 ‘항아리’를 많이 닮아 있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컨셉트나, 비슷한 연배의 저자들이 80년대 문단의 대표시인이라는 점이 그러하다. 낮은 톤의 목소리, 새의 ‘낢’을 인생과 비유한 우화라는 점에서는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연상시킨다. 이 책에서 시인은 도요새의 운명을 ‘신에게로 귀의하는 삶’ ‘이상향을 추구하는 창조적인 삶’ ‘현실에서의 평범한 삶’ 세가지 종류로 분류한다. 작가는 주인공 도요새가 이 세가지 유형의 삶 사이에서 방황하다 결국은 ‘월동지를 찾아 먼길을 날고, 짝을 만나 새끼치고 나는 법을 가르치다 죽는’ 운명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평범한 인생의 소중함’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날개가 달린 새는 뒤로 날지 않는다” “새는 날면서 두 눈을 감지 않는다” “스스로 알을 깨는 건 자신과의 최초의 싸움이다” 등의 명제는 새를 빗대 인생을 은유할 때 자주 쓰이곤 한, 다소 ‘식상한’ 표현이기는 하되, 여전히 매력적인 문장들이다.
한편 ‘기다리는 사람은 자유롭다’라는 책은 제목이 드러내주는 바대로 ‘기다림’의 매력과 미덕을 설명해주는 책이다. 저자 에마 고도는 기다림을 일컬어 “자극과 충족 사이에서 욕망의 한 국면을 의식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인간을 짐승과 구별시켜 주는 문화의 본질적 요소”라고 갈파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질 들뢰즈의 말을 빌려 기다림을 ‘마조히즘의 한 형식’이라고 정의하는가 하면 “사랑을 보다 굳건하게 결합시켜 주는 촉매제이며, 새로운 것에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현재 있는 것을 중지시켜 주는 창조적 형식”이라며 예찬한다. 오죽하면 ‘기다림’을 상징하는 문학 속의 두 인물, ‘에마 보바리’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이름을 따 ‘에마 고도’라는 필명을 지었을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카프카의 ‘소송’ 등 문학 작품과 영화 ‘바톤 핑크’ ‘카사블랑카’, 그리고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들뢰즈를 넘나들며 텍스트를 제시하고 분석해내는 저자의 박식함은 단연 돋보인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친절한 역주와 대체로 무난한 흐름의 문체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번역문투’가 불퉁거리고 튀어나와 눈에 거슬린다는 사실.
세 권 모두 100쪽을 약간 넘거나 200쪽이 채 안되는 경량급 부피에다 한껏 공들인 일러스트들이 시원하게 책을 장식하고 있어 ‘책 읽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다’고 하소연하는 현대의 바쁜 독자들도 부담없이 책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항아리/ 정호승 지음/ 열림원 펴냄/ 124쪽/ 7000원
도요새/ 하종오 지음/ 문학동네 펴냄/ 208쪽/ 6000원
기다리는 사람은 자유롭다/ 에마 고도 지음/ 안인희 옮김/ 동아일보사 펴냄/ 112쪽/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