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K-99 연구진이 상온 초전도체를 개발했다면서 7월 26일 공개한 시료 시연 모습. [뉴시스]
“국내 연구진이 상온 초전도체를 정말 개발했다 해도 기술 상용화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게다가 최근 테마주로 묶여 주가가 급등한 기업들은 상온 초전도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2차전지 관련주도 과열 양상을 보였지만, 상온 초전도체 테마주에 대한 ‘묻지 마’ 식 단타 투기에 비하면 양반이다.”(증권투자업계 관계자)
최근 주가가 급등락하며 롤러코스터를 탄 상온 초전도체 테마주와 관련해 증권투자업계는 물론, 해당 기업 관계자들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때아닌 상온 초전도체 논란은 국내 연구진이 7월 22일 논문 사전공개 사이트 ‘아카이브’에 “상온·상압에서도 초전도성을 갖는 물질 ‘LK-99’를 개발했다”는 취지의 논문 초고 2건을 공개하면서 시작됐다. 이석배 퀀텀에너지연구소 대표와 오근호 한양대 명예교수, 김현탁 미국 윌리엄앤드메리대 연구교수 등 연구진은 “구리, 납, 인회석 등으로 구성된 LK-99가 127도 이하 상온에서 초전도 현상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당장 상온 초전도체株로 돈 버는 게 중요”
상온 초전도체는 현실화될 경우 과학기술의 혁명적 발전을 가능케 할 ‘꿈의 물질’로 불린다. 초전도체란 전기 저항이 제로(0)인 물질을 뜻한다. 전기가 저항 없이 회로를 흐를 경우 낭비되는 에너지가 없어진다. 이를 다양한 분야에 응용하면 큰 폭의 기술 발전이 가능하다. 초전도체 자체는 지금도 개발돼 쓰이고 있다. 초전도 자석이 사용되는 자기공명영상(MRI) 장치가 대표적이다. 다만 현 단계의 초전도체 기술은 영하 270도에 가까운 저온 상태가 유지돼야 제구실을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고 관리도 까다롭다. 상온·상압 조건에서 초전도체를 구현할 수 있다면 전력 산업의 효율을 대폭 높이는 것은 물론, 자기부상열차나 핵융합 발전도 현실화할 수 있다. 이에 세계 수많은 연구자가 상온 초전도체 개발에 뛰어들었으나 현재까지 성공한 사례는 없다.LK-99 연구진의 주장은 7월 말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다. 국산 상온 초전도체가 현실화될 경우를 상상한 각종 ‘밈’ 이미지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퍼지기도 했다. 8월 들어서는 투자자 사이에서 상온 초전도체 테마주 리스트가 돌며 투자 기대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일부 주식투자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중요한 것은 LK-99가 진짜 상온 초전도체인지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당장 시장에 뛰어들어 돈을 버는 것”이라며 테마주 투자를 독려하는 이가 적잖았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주식 리딩방에는 상온 초전도체 테마주에 투자해 두 자릿수, 많게는 세 자릿수 수익률을 거뒀다는 ‘인증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금융당국이나 언론이 계속 테마주 과열에 경고음을 내도 투자자 상당수가 “리스크가 있어도 꼭지만 안 잡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심정으로 단타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뚜렷한 근거 없이 상온 초전도체 테마주로 묶인 기업들 주가는 최근 세 자릿수 상승률을 보였다. 가령 코스닥 상장사 ‘서남’ 주가는 종가 기준 7월 27일 3420원에서 28일 4350원, 31일 5000원을 넘기더니 8월 들어 1일 6500원, 2일 8450원, 3일 1만980원으로 가파르게 올랐다. 한국거래소의 투자경고 종목으로 지정돼 8월 4일 하루 거래가 정지됐으나, 주말이 지난 첫 거래일인 7일 서남 주가는 1만2610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그래프 참조). 2주도 안 된 사이 주가가 268% 급등한 것이다. 이 같은 주가 추이는 다른 초전도체 테마주도 비슷하다. 코스피에 상장된 ‘덕성’ 주가는 종가 기준 7월 27일 3680원에서 8월 7일 1만1900원으로 정점을 찍어 223%의 가파른 상승률을 보였다.
합성피혁 제조업체가 상온 초전도체 테마주?
LK-99가 실제 상온 초전도체인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상온 초전도체 수혜주’는 없다는 게 ‘주간동아’ 취재에 응한 국내 증권투자업계, 과학계 인사들의 중론이다. “기존 초전도체와 달리 상온에서 구현 가능한 물질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는 게 LK-99 연구진의 주장인데, 이를 사업 포트폴리오에 이미 반영한 기업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최근 주가가 뛴 기업의 면면을 보면 이 같은 지적이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덕성의 경우 합성피혁 주원료와 전자재료를 생산하는 업체다. 한때 초전도 현상을 이용한 반도체 웨이퍼 제조 장비를 만들었으나 현재는 중단한 상태다. 덕성 관계자는 8월 9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최근 상온 초전도체 테마주로 주가가 급등한 것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덕성은 합성피혁을 열심히 수출하는 회사다. 상온 초전도체가 사업과 관련된 것도 아니라서 특별한 입장이 없다”고 답했다.
테마주로 묶인 또 다른 업체 서남은 초전도 선재를 제조·판매하는 회사다. 상온 초전도체가 상용화될 경우 기존 초전도 기술과 관련된 업체는 오히려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상온 초전도체 수혜주라는 명목으로 서남 주가가 급등한 것도 합리적 근거가 없는 셈이다. 서남 측은 8월 4일 자사 홈페이지에 올린 공지에서 “서남은 초전도 전기기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회사”라면서도 “현재 상온·상압 초전도체를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연구기관과 어떠한 연구 협력이나 사업 교류가 없다”고 밝혔다.
한편 LK-99가 실제 상온 초전도체일 가능성은 낮다는 게 국내외 과학계의 중론이 돼가는 분위기다. 한국초전도저온학회가 8월 4일 최종 결론이 아니라고 전제하면서도 “현재까지 공개된 데이터로는 LK-99가 상온 초전도체일 가능성이 낮다고”고 밝힌 데 이어, 국제학술지 ‘네이처’도 “상온·상압 초전도체에 대한 한국 연구팀의 주장은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실험적·이론적으로 화제가 될 만한 연구는 나오지 않았다”면서 국내외 연구자들의 회의적 시각을 조명했다. 이에 대해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는 “LK-99가 실제 상온 초전도체가 아닐 가능성이 점점 더 농후해지고 있다”며 “LK-99 연구진은 정식 논문을 발표한 게 아닌, 사전등록 사이트에 일종의 초고를 게시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절차적 정당성’도 확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명예교수는 “미국에서도 상온 초전도체를 개발했다는 주장이 나와 과학계가 논쟁을 벌이고 있으나, 이로 인해 주식시장이 과열되지는 않는다”면서 “이번 상온 초전도체 논란과 이른바 테마주의 급등락은 국내 언론이 불확실한 사안을 섣불리 보도하면서 벌어진 소동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상당수 초전도체 테마주는 8월 8일 오전까지 강세를 보이다가 이날 오후 들어 폭락했고, 9일과 10일까지 하락세가 이어졌다. 8일 미국 메릴랜드대 응집물리이론센터(CMTC)가 SNS에 “LK-99는 초전도체가 아니다”라는 취지의 글을 올리고, 이 내용이 국내 언론에 보도되면서부터다. CMTC 측은 SNS에 “슬프지만 우리는 이제 게임이 끝났다고 믿는다. LK-99는 초전도체가 아니다”라면서 “(LK-99는) 상온, 심지어 저온에서도 초전도성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다만 일부 테마주는 이 같은 발표에도 오히려 상승세를 보였다. 코스닥 시장에서 초전도체 테마주로 간주된 ‘신성델타테크’ 주가(종가 기준 7월 27일 1만2200원→8월 7일 2만4800원으로 103% 급등)는 8월 8일 전날 대비 1600원 내린 2만3200원에 장을 마감했으나, 9일 다시 3400원 올라 2만6600원을 기록했고 10일 3만4550원을 기록했다.
일각에선 ‘알고리즘 매매’ 가능성 지적
초전도체 테마주의 급락을 두고 일각에선 ‘알고리즘 매매’ 가능성도 제기됐다. 알고리즘 매매는 투자자가 설정한 조건에 따라 컴퓨터가 단시간에 다량의 주문을 자동 처리하는 방식이다. 고경범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8월 9일 낸 보고서에서 “초전도체 관련주의 (주가) 조정과 거래량 증가는 8월 8일 오후 2시부터 사실상 20분 만에 완료됐다”면서 “‘패닉 셀링’(공황 매도)이라고 보기에는 조정 시간이 극히 짧다”고 분석했다. “특히 오후 2시 12분쯤 매도 주문이 주가 하락에 결정적이었는데, 해당 테마로 시세를 견인한 기존 매수자의 매도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최근 각종 테마주 주가가 요동치자 금융당국도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8월 8일 “최근 테마주를 중심으로 한 주식시장의 급등락과 관련해 단기간에 과도한 투자자 쏠림, 레버리지(빚투) 증가, 단타 위주 매매 등 과열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테마주 관련 불법 주식 리딩방 운영이나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한 엄정 대처를 예고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테마주 현상은 한국 증권시장의 고질적 병폐”라며 “기존 테마주는 선거철에 특정 후보와 연관돼 있다는 이유로 주가가 올랐다가 원상회복되곤 했는데, 최근에는 선거뿐 아니라 사회적 이슈가 부각되면 특정 주가가 요동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황 선임연구위원은 “주식시장이 단타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은 대단히 우려스럽다”면서 “기업 펀더멘털이 아닌, ‘내일 주가가 당장 오를까’가 투자 기준이 되는 것은 주식시장 발전을 저해한다”고 덧붙였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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