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브 잡스 당시 애플 최고경영자가 ‘아이팟 터치’ 출시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GETTYIMAGES]
저장장치는 음악 플레이어뿐 아니라, 고사양 컴퓨터 개발에도 꼭 필요하다. 컴퓨터는 전자회로를 이용해 정보를 연산하고 처리하는 전자기기다. 필요한 정보는 기억장치로부터 가져와 읽고, 처리가 끝나면 다시 기억장치로 보내 저장한다. 기억장치에는 주기억장치와 보조기억장치가 있다. 대표적인 주기억장치는 램(RAM)과 롬(ROM)으로 불리는 반도체 집적회로다. 램은 일종의 공용 사무실 책상처럼 작업할 자료나 문서를 놓고 열심히 일하다, 컴퓨터를 끄면 마치 퇴근하는 것처럼 싹 치워버리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롬은 모니터 옆에 상사가 붙여놓은 포스트잇 같다. 중요한 정보들이라 반영구적으로 보고 읽을 수 있으나, 함부로 수정하거나 찢어버릴 수는 없다. 기억된 정보를 읽기만 하지만 전원이 끊겨도 저장된 정보가 삭제되지 않는 롬과 매번 정보가 날아가버리지만 자유롭게 읽고 쓸 수 있는 램이 존재해 컴퓨터는 빠르게 정보들을 계산하고 처리할 수 있다.
만약 컴퓨터 기억장치가 램과 롬으로만 구성된다면 컴퓨터는 영화 ‘메멘토’ 속 주인공처럼 전원을 켤 때마다 처음부터 모든 업무를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나마 뭐라도 기록할 수 있는 곳은 램뿐인데, 이 녀석은 전원이 내려가면 동시에 깨끗이 지워버린다. 그래서 별도의 물리적 저장장치인 보조기억장치가 필요하다. 통상적으로 이걸 저장장치라고 하는데, 주기억장치보다 속도는 느리지만 컴퓨터 전원이 꺼져도 저장된 정보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어제 작업하던 과제를 이어서 하거나 완료된 과제를 두고두고 열어볼 수 있는 것도 저장장치가 개발된 덕분이다. 저장장치는 인간 뇌로 치면 기억을 담당한다. 많은 용량을 더 작고 가벼운 장치에 빠르게 담기 위한 노력은 차세대 컴퓨터를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하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도달한 똑같은 결론
거대자기저항을 발견한 물리학자 페터 그륀베르크(왼쪽)와 알베르 페르. [GETTYIMAGES]
희대의 천재 존 폰 노이만이 제시한 기술적 특이점이라는 개념이 있다.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해 인류가 이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역사적 변화를 겪게 되는 가상의 순간을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특이점’이라는 거창한 표현으로 다가가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거대자기저항이 세상에 가져다준 변화의 폭은 충분히 작은 변곡점 정도로 봐줄 만하다. 거대자기저항이라는 기술이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에 적용되기 전에는 제곱인치(in²)당 고작 1기가비트(Gb) 용량을 담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거대자기저항을 응용한 기술이 적용되자마자 같은 크기에 저장되는 용량은 300Gb로 예전보다 300배나 증가했다.
거대자기저항을 발견한 두 명의 물리학자, 독일 페터 그륀베르크와 프랑스 알베르 페르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둘 다 각자 자리에서 컴퓨터나 하드디스크의 성능을 개선하는 것과는 무관한 기초연구에만 매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륀베르크는 독일 율리히연구소에서, 페르는 파리11대에서 고체물리학을 연구했다. 당시 그들이 관심을 둔 주제는 전류에 대한 자기장의 방향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저항인 자기저항이었다. 이것을 기존보다 강하게 만들기 위해 고민하던 중 두께가 ㎚(나노미터) 단위인 얇은 막을 만드는 반도체 제조기술이 발전하면서 연구의 실마리를 찾았다. 자성체와 비자성체를 샌드위치처럼 여러 층으로 포갠 다층막을 이용했더니 자성체를 통과하는 자기저항이 극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여기엔 전자의 물리적 특성인 스핀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자기장과 스핀의 방향이 반대일 경우에만 전자가 산란하는 특성을 이용해 더 높은 자기저항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륀베르크는 강자성체인 철 사이에 비자성체인 크롬을 끼워 넣었는데, 크롬층의 두께가 얇을수록 자기저항이 커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페르는 그륀베르크와 비슷한 방식으로 극저온에서 60층의 다층막을 만들어 실험했다. 철의 층 배열을 바꾸거나 크롬층의 두께를 조정하며 계속해서 실험하던 페르는 어느 시점에서 자기저항이 80% 이상 증가하는 결과를 얻었다. 거대자기저항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서로의 연구에 대해 전혀 모르던 두 과학자는 각자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으로 동일한 결과를 얻었다. 쉰 살이 다 된 나이에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발견을 해낸 그륀베르크와 페르는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후 거대자기저항의 발견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했다.
살아생전 수많은 사람에게 도달한 연구 성과
아이팟(왼쪽)이 성공한 건 작고 가벼운 대용량 저장장치 발명 덕분이다. [GETTYIMAGES]
하지만 그륀베르크와 페르, 두 과학자가 발견한 거대자기저항은 곧바로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비롯한 다양한 저장장치의 용량을 극적으로 늘렸고,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만들었다. 불과 10년 만에 말이다. 컴퓨터와 음악 플레이어를 통해 전 세계 수억 명의 사람이 혜택을 고스란히 누렸다. 아무리 기초과학이 상용화되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상용화된 거대자기저항 기술은 더욱 간편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다층막을 만들었고, 막에 사용되는 원소와 층의 방향에 따라 3만 종류가 넘는 조합이 적용됐다. 이제 훨씬 더 고도화한 대용량 저장장치들이 개발되고 있고, 심지어 저장할 필요 없이 거대한 저장장치로부터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송받는 스트리밍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그 치열한 경쟁은 바로 그륀베르크와 페르, 두 과학자로부터 시작했다.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던 아이디어가 구체적 성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하지만 아주 얇은 막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자와 스핀에 대한 신비로운 해석은 거대자기저항이라는 응용 기술로 발전해 현실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대중에게 과학의 경이로움을 알리는 과학 크리에이터로서 과학을 소재로 매주 방송을 하고 영상 콘텐츠도 제작한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대용량 파일이 여전히 내 하드디스크에 오래도록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는 것 역시 불가능이란 없다고 믿었던, 두 과학자의 집요한 연구 덕분이다. 자식 같은 영상 파일들을 함부로 버리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준 두 과학자의 공로에 경의를 표한다.
궤도는…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감시센터와 연세대 우주비행제어연구실에서 근무했다. ‘궤도’라는 예명으로 팟캐스트 ‘과장창’, 유튜브 ‘안될과학’과 ‘투머치사이언스’를 진행 중이며, 저서로는 ‘궤도의 과학 허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