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홈쇼핑에서 인테리어 가구와 싱크대, 욕실 같은 리모델링 상품을 팔기 시작하면서 최근 몇 년간 국내 주요 가구업체의 주가가 상당히 많이 올랐다. 사진은 한 본보기 집 내부.
인구 고령화는 나라마다 시차가 있는데, 일본은 우리보다 대략 20년 정도 빠르다. 일본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서는 초고령 사회에 2006년 진입했다. 한국은 이보다 20년 늦은 2026년 쯤 초고령 사회에 도달하게 된다.
실패학의 교재
경제 측면에서 일본을 학습과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이 지금까지 크게 세 번 정도 있었다. 먼저 1970~80년대다. 패전 후 일본은 6·25전쟁을 계기로 무섭게 고속성장을 구가한다. 특히 70년대 이후에는 전자산업, 자동차산업을 필두로 막강한 제조업 경쟁력을 구축한다. ‘경제적 동물’ ‘일본식 경영’ 같은 표현이 등장했던 시기다. 미국 내 최고 동아시아 전문가로 꼽히는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가 쓴 ‘NO. 1으로서의 일본(Japan as number 1: Lessons for America)’이 출간된 때도 1979년이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영국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최강 국가로 떠오른 미국에서도 일본식 경영을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던 시절이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일본에 대한 인식은 180도 바뀌었다. 1989년과 90년대 초 주식과 부동산 버블의 붕괴로 시작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경제정책 결정자들 사이에서는 ‘실패학의 교재’로 인식됐다. 정책당국자들의 고민은 위기가 왔을 때 어떻게 하면 일본처럼 되지 않을까에 초점이 맞춰졌다. 즉 반면교사로서 일본을 연구하자는 것이었다.
최근 국내 금융가에서 일본이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증시의 부활이다. 아베노믹스 이후 일본 증시가 상대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일본 펀드 투자자가 늘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장기 저성장 국면에서 나타난 여러 변화와 그에 대한 대응법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어떤 기업이 살아남았고, 산업구조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며, 자산시장에서는 투자 스타일과 대상 측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저성장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자.
자본주의는 성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시장과 경쟁을 바탕으로 부(富)를 창출한다. 성장이 없다는 것은 부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때때로 공황이나 금융위기 같은 충격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기도 하지만 길게 보면 자본주의는 우상향의 성장 곡선을 보여왔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노동과 자원의 단순 투입만으로는 성장이 되지 않는, 다시 말해 성장의 질(質)을 따지는 시기가 오게 된다. 흔히 얘기하는 산업구조의 변화 시기다. 철강, 조선 같은 대형 굴뚝 기업들은 경제 성장의 주역이었고 여전히 중요한 경제적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이들 산업의 성장세는 둔화된다. 제조업에 기반을 둔 경제구조를 지식과 서비스산업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이유다.
고성장에서 저성장으로 접어들면 몇 가지 확실히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난다. 가격 파괴 같은 유통혁명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소비자들이 가격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무조건 싸다고 사지는 않는다. 제품 질도 따진다. 생산자가 이 두 가지를 만족시키는, 즉 싸고 좋은 물건을 만드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저성장기에 경쟁력 없는 기업들이 무덤으로 향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저성장기에는 승자가 더 많이 가져간다. 패자에게는 개평이나 떡고물조차 허용되질 않는다.
글로벌 투자가 포인트
글로벌시장에서 유통과 제조를 결합한 새로운 강자들이 전통 유통업보다 더 각광받는 것도 가격 파괴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일본 유니클로 같은 SPA 브랜드들은 제조와 유통을 같이한다. 반대로 기존 유통업체들은 PB(자체 브랜드)로 제조업에 뛰어든다. 제조와 유통의 경계가 없어지는 셈이다. 좋은 제품을 낮은 가격에 팔면서도 수익을 낼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과 경쟁력을 갖춘 곳들이 승자가 되고 있다. 물론 이들 기업은 투자자에게도 높은 보상을 안겨줬다.
저성장 속에서 새로운 성장을 모색하는 곳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성장 시대에는 대표적인 업종 가운데 하나가 건설업이다. 건설업은 고성장의 직접적인 수혜를 입는다. 도로를 건설하고 항만을 만들며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서 건설업은 빠질 수 없다. 그런데 만일 도로를 다 건설하고, 항만도 거의 다 만들고, 주택 공급률도 높아지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성장을 모색했던 기업들의 예가 가구회사들이다. 아파트 신축이 많을 때는 건설회사를 대상으로 빌트인(built-in) 영업을 해야 한다. 아파트 공급이 충분히 이뤄지면 빌트인 영업이 아니라 가정주부들을 직접 공략해야 한다. 대규모 신규 공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승부를 볼 수 있는 기업들은 저성장 시기라도 새로운 성장을 할 것이다. 이는 과거 일본이 그랬고, 최근 국내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일이다. TV 홈쇼핑에서 인테리어 가구뿐 아니라 싱크대와 욕실 같은 리모델링 상품을 팔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되는 일이다. 최근 몇 년간 국내 주요 가구업체의 주가가 상당히 많이 올랐다.
금융투자 쪽에서는 ‘현금흐름’ ‘해외투자’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일본에서 많이 팔리는 주요 펀드는 주식형 펀드가 아니다. 월지급식 펀드가 주류를 이룬다. 펀드 규모 상위 랭킹은 늘 월지급식 유형의 펀드들이 차지하고 있다. 월지급식 펀드의 투자 지역은 일본이 아니다. 금리가 0%에 가깝기 때문에 일본보다 금리가 높은 나라의 채권에 투자한다. 물론 우리나라와는 상황이 다르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주식형 펀드가 주류이고, 월지급식 펀드는 아직 규모가 일천하다. 그러나 일본처럼 월지급식 시장이 커지지는 않더라도 현금흐름과 해외투자는 중요한 화두가 될 것임에 분명하다.
한국 경제의 위기를 다룰 때마다 나오는 것이 ‘샌드위치론’이다. 선진국과 중국 같은 이머징 국가 사이에 끼인 신세라는 뜻이다. 그러나 투자 아이디어라는 쪽으로 생각하면 샌드위치 신세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한중일을 예로 들면 일본은 우리의 미래고, 중국은 우리의 과거다. 일본을 통해 현재 우리를 들여다보고 우리를 통해 중국을 본다면, 그 속에서 좋은 투자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국가별 발전 단계가 다르다는 점을 통해 투자 기회를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