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식 선수 [사진 제공·정규식]
인터뷰를 하다 보면 정말 뻔한 질문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물을 때가 있다. 인터뷰이가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꿈이 뭐예요?”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 유니폼을 입고 있던 그는 이렇게 답했다.
“좋은 아빠가 되는 겁니다.”
“프로야구팀 가는 게 아니고요?”
운동장 바닥에 흩어져 있던 포수 장비를 챙기던 그가 고개를 들고 답했다.
“그건 목표죠. 야구를 그만둔 다음에도 계속하고 싶은 게 꿈 아닌가요?”
2013년 12월 제주 서귀포시 강창학구장에서 그렇게 정규식(28)을 처음 만났다.
그는 그로부터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신인선수 지명회의(드래프트)를 통해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게 되면서 목표를 이뤘다. 지명받았을 때도, 군대에 갈 때도 그는 꼭 기자에게 안부를 전했다.
지난해 11월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들고 말했다. “제대 축하해요.” 눈치 없는 인사말이었다. 그는 “LG 트윈스 와서 한 거라곤 군대 간 것밖에 없는데 방출 통보를 받았습니다”라고 답했다.
프로 기회 찾아왔지만 설 타석 없었다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날을 위해.’정규식은 경기 성남 성일중을 졸업한 뒤 일본 교토국제고로 야구 유학을 떠났다. 야구부원만 200명이 넘는 오사카가쿠인대에서도 그는 붙박이 주전 포수였다. 그를 원하는 일본 프로야구팀도 있었지만 그는 사회인(실업) 야구를 택했다. 한 실내 포장마차에서 만난 정규식은 “저는 제가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전 포수) 아베 신노스케(39)만큼 할 줄 알았어요. 똑같이 우투좌타 스타일이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사회인 야구팀에서 뛰다 몸값 높여 프로팀에 가는 선수도 많으니까 그렇게 될 줄 알았죠”라고 말하고 ‘소맥’ 폭탄주 잔을 비웠다.
그가 뛰던 ‘하쿠와 빅토리즈’는 파친코 업체가 모기업이었다. 정규식은 매일 오전 야구 대신 파친코 기계를 조립하고 당첨 확률을 조정하는 일을 했다. 오후에는 배팅볼 30~40개를 치는 게 전부였다. 제대로 된 포수 코치도 없었다. 정규식은 야구를 접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에서 재일교포였던 모교 이사장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 사정을 들은 이사장은 그에게 ‘절친’을 소개해줬다. 김성근 전 고양 원더스 감독이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야구 유니폼을 입었다.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이상했다. 정규식은 “LG 2군(퓨처스리그) 숙소에 도착하자 ‘너 진짜 LG에 잘못 왔다’는 선배가 적잖았어요”라고 회상했다. 그럴 만했다. LG는 이미 그해(2015년) 신인 1차 드래프트 때 덕수정보산업고 포수 김재성(22)을 지명한 상태였다.
정규식은 “재성이가 정말 잘하기는 하는데 그래도 고교 레벨이었어요. 경험은 제가 앞서니까 열심히 하면 제가 먼저 1군에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라고 말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LG는 김재성에게 기회를 더 많이 줬다. 김재성은 그해 9월 1일 1군 데뷔전을 치렀다. 정규식은 방출되기 전까지 끝내 1군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서울 잠실야구장은 휴가 때 관중 자격으로 1군 경기를 보러 간 게 전부다. 정규식은 “2016년 2월 대만 (2군) 스프링캠프에 가 있었는데 집에서 영장이 나왔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어차피 2군에도 자리가 없으니 군대부터 빨리 갔다 오자고 생각했죠. 그런데 군대에서 야구가 하고 싶어 미치겠는 거예요. 제가 수색대라 사단에서 몸을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수색하러 가면 운동하기가 어려웠어요. 사단에 있을 때는 혼자 방망이 들고 스윙 연습은 할 수 있는데 공을 던지고 싶어도 받아줄 사람이 없었어요. 우연히 선임 한 명이 중학생 때까지 야구를 했다는 걸 알게 돼 ‘공 좀 받아달라’고 부탁했죠. 그런데 선임이 제대하고 나니까 공을 던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도 곧 제대라고 생각하면서 참았죠. 그러면 정말 야구를 실컷 하게 될 테니까요”라고 했다.
당일에도 예상치 못한 방출
LG 트윈스 2군에서 훈련하던 정규식. [사진 제공·정규식]
애석하게도 그는 제대 이후 야구를 실컷 할 수 없었다. ‘말년 휴가’ 도중 방출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정규식은 “그 날 오전만 해도 장비 담당자가 ‘내년 유니폼 맞추러 오라’고 전화를 주셨어요. 다시 전화가 오더니 ‘오늘은 어렵겠다. 다음에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있는데 팬들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괜찮느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었죠. 그런데 결국 프런트에서 전화가 오더라고요. ‘미안하게 됐다’고. 그래서 ‘아니, 전달만 하시는 분이 뭐가 미안합니까.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처음 든 생각은 ‘왜 지금인가’ 하는 거였어요. 거의 모든 팀이 10월이면 다음 해 팀 구성을 끝내거든요. 일본 쪽까지 알아봤는데 ‘미안하다, 지금은 인원 정리가 끝났다’고 하더라고요. 조금만 미리 말해줬으면 군대에서라도 몸을 좀 더 만들어 다른 팀을 알아볼 기회가 있었을 텐데…. 후임 누구한테 힘들어도 공 좀 받아달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잔을 들이켰다.
다행히 그의 방출 소식을 접한 한 지방 구단으로부터 ‘테스트를 받으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는 원더스 시절 동료였던 김동은(28·개명 전 김선민)과 함께 몸 만들기에 돌입했다. 김동은 역시 2017시즌을 마지막으로 kt 위즈에서 방출 통보를 받은 신세였다. 결과는 두 선수 모두 ‘탈락’. 이번에도 뽑힌 건 ‘군 미필’ 선수였다.
정규식은 “12월 31일, 1월 1일 놀고 싶은 것도 다 포기하고 정말 미친 듯이 운동만 했는데 안되더라고요. 6개월 만에 공을 던지는데 될 리가 없었죠. 게다가 진짜 투수가 던지는 공을 얼마 만에 치는 건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게 맞겠어요”라고 말했다.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그 뒤에도 ‘야구’가 그를 아주 찾지 않은 건 아니다. 일본어 실력이 필요한 구단에서는 ‘프런트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묻기도 했고, 김 전 감독 역시 한 수도권 구단 ‘불펜 포수’ 자리를 알아봐 주기도 했다. 정규식은 “감독님하고 통화할 때마다 ‘너랑 나랑, 아들(김정준 전 한화 이글스 코치)만 일자리가 없다’고 하시더니 혼자만 좋은 데(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가셨어요”라며 웃었다.
사실 횟집에 들어선 그에게 제일 먼저 건넨 인사는 “꿈이 뭐예요?”였다. 이번에 그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 대신 아직 목표는 잡지 못했다.
정규식은 ‘구직광고’를 내주겠다는 제안에 “성격 시원시원하고 일본어 할 줄 압니다. 야구도 프로선수까지 했습니다. 야구와 일본 두 가지를 키워드로 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 아직 정확히 그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게 목표를 선물해주실 분은 연락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
방출된 포수, 아니 의욕 충만한 ‘예비역 병장’ 정규식의 꿈은 이제 막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