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속 아이돌은 ‘이제 대세’

리허설을 끝낸 뮤지컬 ‘모래시계’ 출연진들. [박해윤 기자]

“아이돌 캐스팅, 그거 뮤지컬 제작사에서 표 팔아먹으려고 꼼수 부리는 거잖아.” 

아직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요즘 뮤지컬 업계를 너무도 모르는 것이다. 예전과 달리 ‘아이돌’이라는 꼬리표는 뮤지컬 시장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돌이 출연하는 공연이 전석 매진을 기록하는 것도 아니다. ‘내 배우’에게는 한없이 후할지언정 ‘뮤덕’(뮤지컬 덕후)의 지갑은 결코 쉽게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기만 믿고 무대에 오른다 해도 실력이 없으면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약진하는 아이돌 출신 배우가 늘고 있는 것처럼, 뮤지컬 시장도 그렇게 서서히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뮤지컬계 잔뼈 굵은 1세대 아이돌들

뮤지컬 ‘더 라스트 키스’ 연습을 하고 있는 EXO의 수호. [지호영 기자]

S.E.S.의 바다(최성희)와 핑클의 옥주현. 1세대 아이돌이자 각 그룹의 자존심인 메인보컬이던 이들은 비슷한 시기 뮤지컬에 도전해 ‘출신 성분’에 대한 선입견에 맞서 고군분투했다. 첫맛은 썼다. ‘페퍼민트’에 바다가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고, ‘아이다’의 옥주현은 극에 녹아든 배우가 아니라 새로운 경연을 앞두고 긴장한 가수에 가까웠다. 아이돌이라는 명패는 ‘이쪽 시장’에서는 쉽게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옥주현은 이제 관객을 몰고 다니는 스타가 됐고, 관객은 ‘노트르담 드 파리’에 출연한 바다에게 ‘바스메랄다’(바다+에스메랄다)라는 칭호를 안겼다. 

뮤지컬 시장은 오랫동안 남자 배우들이 주도해왔다.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 주요 소비층이 여성이니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지난해 공연계에서 소비를 주도한 건 ‘30대 여성’이었다. 인터넷 종합쇼핑몰 인터파크가 1월 10일 발표한 ‘2016 인터파크 공연 결산’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공연 예매자 151만2876명(중복 예매 제외) 가운데 여성은 69%였고, 연령대는 30대가 36.7%로 가장 많았다. 신한카드의 빅데이터 분석 결과도 마찬가지다. 재단법인 예술경영지원센터가 2015년 10월부터 2016년 9월까지 1년간 서울·경기 소재 공연시설과 예매처 등 공연 관련 가맹점을 1회 이상 이용한 신한카드 사용자 5000여 명의 카드명세를 조사한 결과 이들의 성별과 연령대는 30대 초반 여성이 8.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뮤지컬 ‘광화문연가’에 출연하는 그룹 인피니트의 성규. [사진 제공·CJ E&M]

뮤지컬 무대에 도전하는 아이돌의 성비는 남성이 압도적이다. 남성이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는 작품과 캐릭터가 많은 것도 있지만 ‘소녀팬’과 ‘누나팬’의 애정도 무시할 수 없다. 



명작 드라마를 뮤지컬로 옮긴 ‘모래시계’에는 인피니트 출신의 이호원(호야)과 하이라이트의 손동운이 출연 중이다. 손동운은 ‘모래시계’에서 과묵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보디가드 백재희 역을 맡아 갈고닦은 검도 및 춤 실력을 선보이고 있다. 백재희는 드라마 방송 당시 이정재가 맡아 주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 캐릭터. 그는 프레스콜을 마치고 언론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액션으로 짜인 안무를 끝내고 노래를 하면 숨도 차고 힘들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 좀 더 열심히 해 100%를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며 각오를 전했다. 

작곡가 고(故) 이영훈의 명곡으로 꾸려진 뮤지컬 ‘광화문 연가’에는 인피니트의 리더이자 리드보컬인 성규와 피에스타의 린지가 출연한다.

편견은 여전히 존재해

‘황태자 루돌프’는 ‘더 라스트 키스’로 제목을 바꾸고 3년 만에 관객을 만난다. 주인공인 황태자 루돌프 역에는 뮤지컬 배우 카이와 전동석 외에도 데뷔 후 처음으로 뮤지컬에 도전하는 EXO 수호와 빅스 레오(정택운)가 낙점됐다. 에프엑스의 루나는 이들의 상대역인 마리 베체라 역을 맡았다. 빅스의 켄(이재환)은 현재 뮤지컬 ‘타이타닉’에 출연 중이다. ‘에드거 앨런 포’에서는 지난여름 공연한 ‘나폴레옹’에서 조연을 맡았던 비투비의 이창섭이 주인공으로 우뚝 섰다. 같은 그룹의 서은광은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으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 ‘올슉업’에는 1세대 아이돌인 god 출신 손호영, 쥬얼리 출신 박정아에 이어 현역 아이돌인 B.A.P의 대현(정대현)과 펜타곤의 진호 등이 나온다. 

팬들의 ‘무한 실드’라는 핵우산 아래 있다 뮤지컬이라는 이름의 정글로 나오면 매의 눈을 가진 관객들과 마주하게 된다. 한 공연에 꽂히면 몇십만 원은 통 크게 내놓지만 별로인 공연에는 예매할 때 마우스 커서조차 가져가지 않는 냉정한 관객들이다.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장문의 팩트(fact)리엇 미사일을 여지없이 쏘아대는 무서운 평론가들이다. 

슈퍼주니어의 리드보컬이자 솔로 앨범을 여러 차례 낸 규현(조규현)은 안정적인 가창력과 연기력을 바탕으로 대극장 주연을 꾸준히 맡아온 아이돌 출신 뮤지컬 배우다. 규현의 오랜 팬인 직장인 신주연(25) 씨는 규현 때문에 뮤지컬을 처음 접했다 장르의 매력에 빠진 경우다. 요즘도 한 달에 3~4번씩 뮤지컬을 본다. 

“슈퍼주니어 멤버 중에서도 규현을 제일 좋아해요. 하지만 솔로곡이 아닌 이상 규현의 목소리를 길게 듣기가 쉽지 않은데, 뮤지컬에선 온전히 한 넘버를 부르잖아요. 뮤지컬 무대라면 규현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처음으로 뮤지컬 ‘삼총사’를 봤어요. 공연 자체가 흥겹고 노래들도 좋아서 달타냥은 규현으로 계속 봤지만 다른 캐스팅들은 바꿔가며 봤죠.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뮤지컬 배우가 생겨서 다른 작품들도 섭렵하게 됐어요. 티켓 구매 비용이 적잖지만 새로운 취미를 갖게 돼 만족하고 있어요.” 

그런 규현의 인터뷰에서 뮤지컬에 대한 질문이 빠질 수 없다. 그때마다 나오는 키워드가 바로 ‘욕’이다. 2014년 초 세 번째 뮤지컬인 ‘해를 품은 달’의 주연을 맡은 그는 한 인터뷰에서 “뮤지컬 팬 가운데 95%가 나를 욕했고 나머지 5%는 무관심했다. 나는 인터넷에 올라온 욕을 일부러 다 읽는다. 욕 중에 일리 있는 부분은 연기에 반영한다. ‘보다 보니 괜찮더라’는 글이 올라올 때까지 바꿔가는 맛, 바로 뮤지컬이 주는 재미”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돌이 욕을 먹는 건 마땅히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여느 배우들이 차근차근 밟아온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주연을 맡는 건 특혜이기 때문”이라고도 말했다. 뮤지컬 ‘그날들’ 출연을 앞두고도 그는 슈퍼주니어 컴백 기자회견에서 “아이돌이 뮤지컬을 한다고 욕을 먹은 지 5년이 됐다. 뮤지컬이 2순위는 아니다. 남는 시간이 없을 정도로 양쪽 다 올인하고 있다. 쉬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인터넷만 접속하면 자기 욕을 하는 마당에 누가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이제는 이런 이야기를 웃으며 전하고 예능프로그램에서도 뮤지컬 노래를 흥얼댈 수 있는 그의 모습 뒤에는 숨은 노력이 있었다. 

아이돌이 뮤지컬에 도전하는 게 우리나라만의 특별한 현상도 아니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작품에 탤런트 제이슨 도노번을 출연시켰다. 그때도 10대 팬들이 선물을 들고 공연장 앞에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프랑스에서도 아이돌이 뮤지컬 주연을 맡는 일이 주요 기삿거리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 아이돌이 국내에서 더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건 케이팝(K-pop)의 인기와 흥행이 시너지 효과를 가져온 결과라 볼 수 있다.

뮤지컬과 아이돌 서로를 원한다

올해 전 세계 트위터에서 가장 화제가 된 주제는 ‘KPOP’이었다. 트위터는 올 한 해 전 세계 이용자가 생성한 트위트와 계정들을 분석해 ‘#ThisHappend’ ‘#2017어떤일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올해의 기록을 공개했는데, 글로벌 트위터 계정 가운데 가장 많이 트위트 된 계정은 1위가 방탄소년단(@BTS_twt), 2위가 세븐틴(@pledis_17), 9위가 몬스타엑스(@OfficialMonstaX)였다. 톱10 노래 중에도 케이팝 4곡이 포함됐는데 1위는 EXO의 ‘#kokobop’이었고, 3위와 8위는 갓세븐의 ‘#youare’와 ‘#neverever’였다. 방탄소년단의 ‘#love_yourself’는 7위였다. 올해 신설된 계정 가운데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은 EXO(@weareoneEXO)였고, 다음이 워너원(@WannaOne_twt)이었다.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의 국장인 박병성 공연평론가는 “공연에 나오는 아이돌 배우를 표지에 내세우면 잡지 판매량이 평소와는 확 달라진다. 그런 걸 보며 아이돌의 인기를 실감한다”고 말했다. 제작사들은 왜 끊임없이 아이돌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걸까. 

“새로운 관객 유인책으로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배우를 찾다 보니 아이돌을 섭외하는 겁니다. 작품에 아이돌이 한 명이라도 출연하면 아무래도 언론의 관심이 높아지고,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 반응도 좋거든요. 그런 특수를 노리는 것이겠죠. 많은 뮤지컬 현장을 취재하지만, 확실히 아이돌이 나오면 어떤 작품이든 언론사 카메라가 오는 숫자부터 다르거든요.” 

뮤지컬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 역시 아이돌 캐스팅이 주는 작품 홍보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일단 검증된 작품이 아니라면 아이돌을 캐스팅하는 게 이슈화하기에 좋습니다. 검증된 작품도 새로운 홍보 포인트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아이돌 한두 명이 들어가면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죠. 온·오프라인 노출도가 달라지다 보니 제작사들도 아이돌을 캐스팅하려 합니다.” 

반대로 아이돌은 왜 뮤지컬 무대의 문을 지속적으로 두드릴까. 박 평론가는 “드라마나 영화는 연기 자체로 대중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반면, 뮤지컬은 노래로 연기를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는 중간 단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아이돌은 수명이 길지 않은데 다른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연기자로서 변신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확실히 아이돌 캐스팅은 기존에 없던 관객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제작사에게는 긍정적이다. 인터파크 관계자는 “12월 2일 이화여대 삼성홀에서 폐막한 ‘서른 즈음에’는 다른 공연장과 달리 남성 팬들이 앞자리에 많았다. 여성 아이돌그룹 러블리즈의 케이가 출연한 덕분이었다고 본다. 여성 관객이 압도적으로 많은 뮤지컬 공연장에서 관객 성비까지 바꾸는 게 아이돌 파워”라고 말했다. 

“직접 공연장에 오지 않더라도 일반인이 뮤지컬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니아 관객의 경우 자신이 좋아하는 공연에 실력이 부족한 배우가 들어오면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중요한 건 아이돌인지가 아니라 실력이 있는 배우냐는 점입니다. 아이돌이라 거부감을 보이다가도 막상 무대에서 잘하면 오히려 급호감으로 돌아서는 관객도 많거든요.”

아이돌만으로는 관객 유혹 어려워

뮤지컬 ‘모래시계’에서 백재희 역을 맡은 아이돌그룹 하이라이트의 손동운. [박해윤 기자]

그런데 간혹 아이돌이 출연하는 뮤지컬 회차를 소셜커머스 사이트에서 1+1 티켓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공연 직전까지 빈자리가 가득한 경우도 있다. 그럼 대체 왜 아이돌을 섭외한 걸까. 전문가들이 내놓은 추정은 다음과 같다. △실제로 제작사가 아이돌의 인기를 과대평가해 미스 캐스팅을 저질렀다 △그래도 아이돌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작품 홍보 효과가 다르니까 넣었다 △정말 원하는 아이돌을 캐스팅하지 못해 차선으로 캐스팅했다 등이다. 

박 평론가는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아이돌 한 명 없이 티켓 파워 있는 배우들만 모아 성공한 사례다. 뮤지컬계에서 가장 이상적이기는 한데, 그럴 수 있는 뮤지컬 배우와 작품이 많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인지도를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접 장르로 눈을 돌리다 보면 아이돌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옥주현, 바다, 김준수, 규현처럼 이미 검증된 아이돌 출신 말고 아직 관객들이 눈치채지 못한 보석 같은 아이돌 배우들이 있을까. 원 교수는 “아이돌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굉장히 많은 훈련을 거친다. 트레이닝이 잘 돼 있어 실제로 무대에서 잘할 때가 많고, 자신의 활동 영역보다 뮤지컬 무대에서 더 가치가 돋보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빅스의 켄이나 에프엑스의 루나가 이제 안정적인 연기력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이라이트의 양요섭도 연기와 노래의 균형이 잘 맞는 배우”라고 말했다. 박 평론가 역시 “남자 아이돌 가운데 김준수와 규현 외 다른 이를 꼽자면 빅스의 켄이 기대된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소녀시대 출신 서현이 언젠가 ‘위키드’에 출연하고 싶다며 뮤지컬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렇게 열심히 뮤지컬을 찾아보면서 참여 의사를 밝히다 뮤지컬에 입문하는 아이돌도 있다”고 말했다. 

아이돌일 때보다 뮤지컬 무대에서 더 빛나는 배우도 있다. 원 교수는 “크레용팝 출신의 초아(허민진) 역시 연기와 노래가 다 안정적인 배우”라고 평가했다. 

“관객은 앞으로 점점 더 영리해집니다. 아이돌이 나오니까 표를 사는 게 아니라, 아이돌이 어떤 식으로 작품 완성도에 도움이 될 것인지를 생각하는 거죠. 비싼 뮤지컬 티켓 값 대비 효용 가치를 계산하는 현상이 앞으로 더욱 두드러질 겁니다. 흥미로운 점은 예전에 아이돌이 많이 나오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게 단순히 산술적으로 티켓 판매에 보탬이 되지 않더라는 거예요. 뮤지컬은 아이돌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결국 다른 배우들과 조화 및 앙상블이 필요한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나이나 이미지에 맞지 않는 미스 캐스팅은 작품과 배우 모두에게 독이 됩니다. 아이돌도 뮤지컬 활동을 하고자 할 때 그런 부분을 더 계산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