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 방탄소년단이 다섯 번째 미니 앨범으로 컴백했다. 발매와 동시에 음원 차트 1위는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날 승자는 따로 있었다. 아이유가 기습적으로 ‘가을 아침’을 공개한 것이다. 22일 발매 예정인 두 번째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둘’의 선(先)공개곡으로 나온 이 노래는 제목에 걸맞게 아침 7시에 공개됐음에도 하루 종일 차트 1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가수 가운데 아이유만이 가진 능력이 있다면 진심 어린 존경과 탁월한 곡 해석력을 바탕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거장과 명곡을 현재로 소환해낸다는 것이다. 김창완과 부른 산울림의 ‘너의 의미’, 조덕배의 ‘나의 옛날이야기’ 등 전곡에 걸쳐 놀라운 해석력을 보여줬던 첫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발매 전부터 그랬다.
CF를 통해서는 고(故) 김광석과 함께 ‘서른 즈음에’를 불렀고, 최백호와는 ‘낭만에 대하여’를 노래했다. 그의 리메이크 능력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동시대 노래에도 적용된다. 가을방학의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 같은 곡이 아이유의 목소리를 통해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대표적 노래들이다.
아이유는 명곡에 담긴 감정의 근원을 깊숙한 고갱이에서 끄집어낸다. 반면 ‘스타오디션-위대한 탄생’ 같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흔히 범하는, 원곡을 과잉 기교로 떡칠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최대한 담담하게, 하지만 정교하게 감정선을 훑어가면서 스스로 빠져든다. 때로는 잔망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가을 아침’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어쿠스틱 기타와 보컬, 딱 둘로 이뤄진 원곡 분위기를 훼손하지 않고 가녀리고 담담하게 짚어나간다. 짧은 에세이 분량의 가사에 낭송하듯 음을 입혀 호흡을 칠한다.
이 노래는 1952년생 양희은이 91년 발표한 앨범 ‘양희은 1991’에 담긴 곡이다. 양희은이 중년에 이르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서른에 자궁암, 서른여덟에 자궁근종을 겪고 이겨냈다. 그 끝에서 마주한 음악은 청아한 20대의 목소리로 부르던 과거의 그것과는 달랐다. 깊고도 관조적인, 청승과 신파 따위는 없는 목소리로 품은 이 앨범에는 범접할 수 없는 의연함이 있었다. 그 전의 한국 대중음악이 가보지 못했던 지점이다.
20대 양희은에게 김민기가 있었다면 40세가 된 양희은에게는 27세 이병우가 있었다. 지금은 ‘괴물’ ‘관상’ 등 영화음악 감독으로 유명한 이병우는 당시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기타를 공부 중이었다. 유학 전 조동익과 함께 ‘어떤날’로 앨범 두 장을 냈고, 기타 솔로 앨범을 두 장 더 냈다. 양희은은 그런 이병우를 ‘기용’했고 둘은 미국의 한 허름한 스튜디오에서 만나 총 8곡을 녹음했다. 모든 노래를 이병우가 작곡했고 양희은은 몇 곡의 가사를 썼다. 다른 어떤 악기도 없이, 오직 양희은의 목소리와 이병우의 기타만 존재하는 이 명반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후 둘이 함께 음악을 하는 일은 다시 없었다. 이 둘만 무대에 올려 이 앨범의 첫 곡 ‘그해 겨울’부터 끝 곡 ‘잠들기 바로 전’을 순서대로 들려주는 공연을 만드는 게 로망인 기획자를 여럿 만났지만 성사한 이는 못 봤다.
이병우가 가사도 쓴 ‘가을 아침’을 아이유 목소리로 들으며 이병우가 언젠가 아이유와 앨범 하나를 통째로 작업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봤다. 둘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0년 이병우가 출연한 방송에 아이유가 게스트로 나와 어떤날의 ‘그런 날에는’을 불렀다. 아이유가 4월 발매한 ‘Palette’에 담긴 ‘그렇게 사랑은’은 이병우가 작사, 작곡, 연주까지 한 곡이다. 아이유를 믿고 이병우도 믿는 나에게, 두 음악인의 좀 더 깊은 작업은 양희은과 이병우의 합동공연만큼이나 큰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