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당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긴 냉전을 유지하던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화해
분위기가 절정을 이루는 만찬에서 닉슨 대통령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평화의 축배를 들었다. 이때 축배주로 사용된 와인이
슈램스버그 블랑 드 블랑(Schramsberg Blanc de Blancs) 1969년산이다.
슈램스버그는 캘리포니아 주 나파 밸리(Napa Valley)에서 만드는 스파클링 와인이다. 지금은 나파 밸리가 세계적 와인 산지이지만 1970년대 초반엔 무명이었다. 그런데 국빈 만찬에 슈램스버그라니, 생뚱맞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슈램스버그는 1862년 독일인 이민자 제이컵 슈람(Jacob Schram · 슈램)이 설립했다. 와인메이커 가문 출신인 그는 와인에 대한 열정 못지않게 마음도 따뜻했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에선 철도 건설 중국인 노동자가 대량 실직했다. 슈램은 그들에게 와인 숙성용 동굴 파는 일을 맡겼다. 곡괭이로는 하루에 6인치(약 15cm)밖에 팔 수 없었지만, 그는 중국인 노동자를 17년이나 고용해 동굴을 완성했다. 그들에게 생계를 이을 기회를 준 것이다. 미국 포도로 만들고 중국인이 판 동굴에서 숙성된 와인이니 슈램스버그는 미 · 중 정상 간 화해 만찬에 가장 적합한 와인이었다. 최대 350만 병까지 넣을 수 있는 이 동굴은 현재 최고 와인 숙성고이자 나파 밸리의 명소로 꼽힌다.
1905년 슈램이 사망하자 슈램스버그는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와이너리를 이어받은 아들은 와인에 뜻이 없어 곧 와이너리를 매각했고, 여러 주인을 거치다 슈램스버그는 결국 황폐화되고 말았다.
슈 램스버그를 되살린 건 잭(Jack)과 제이미 데이비스(Jamie Davies) 부부였다. 1965년 슈램스버그를 매입한 그들에게는 샴페인처럼 고급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고 싶다는 당찬 포부가 있었다. 그들이 첫 출시한 와인은 1965년산 블랑 드 블랑이었다. 블랑 드 블랑은 ‘백포도로 만든 흰 와인’이라는 뜻으로, 샤르도네(Chardonnay) 100%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이다. 이 와인은 미국 와인 역사상 첫 블랑 드 블랑이었고,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 쓰인 바로 그 와인이다.
슈램스버그 블랑 드 블랑은 경쾌하다. 풋사과, 자몽, 복숭아 등 과일향이 상큼하고 흰 꽃의 화사함과 향신료의 매콤함이 와인에 복합미를 더한다. 여운에서 느껴지는 산미가 산뜻해 기분 좋게 입맛을 돋우므로 식전주로 좋다. 해산물과 두루 잘 어울리며 고기 요리에 곁들이면 기름진 뒷맛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슈램스버그의 최고 스파클링 와인 제이 슈램(J. Schram)도 샤르도네가 주원료다. 이 와인은 슈램에게 헌정하는 와인으로, 7년이라는 긴 숙성을 거친다. 가장 좋은 재료로만 만들기 때문에 연간 생산량은 약 2만5000병에 불과하다. 잘 익은 사과향과 달콤한 열대과일향이 풍부하고, 묵직한 보디감과 부드러운 거품은 마치 크림처럼 입안을 가득 채운다. 제이 슈램의 우아한 향미와 섬세한 질감을 충분히 느끼려면 순한 치즈나 감자전처럼 향이 진하지 않은 음식을 곁들이는 것이 좋다.
닉슨 전 대통령 이후 백악관 만찬에서 슈램스버그는 100번 넘게 서빙됐다고 한다. 한여름 무더위에 지친 나 자신에게 가끔 작은 선물을 해보면 어떨까. 대통령의 와인 슈램스버그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