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5

2015.09.14

재수충 300일 “돈 잃고, 병 얻고”

등록금에 재수 비용까지 내는 반수생 …강남식 사교육이 오히려 ‘남는 장사’

  • 김지현 객원기자 bombom@donga.com

    입력2015-09-11 17:1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재수충 300일 “돈 잃고, 병 얻고”

    ‘입시 명문’으로 불리는 서울의 한 재수학원.

    바깥 공기는 옥상에서만 맡을 수 있었다. 외출은 불가능했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7시까지 독서실 자리에 앉으면 사감선생이 출석 확인을 했다. 8시 아침식사, 영어듣기 후 9시부터 오후 4~5시까지 수업을 들었다. 이후 저녁식사와 샤워, 보충수업을 제외하고 자정까지 자습을 했다. 심하게 아픈 경우에만 병원에 갔고 주로 사감선생이 약을 사왔다. 가족 면회도 금지라 부모는 딸을 위한 참고서, 약 등을 학원에 맡겨놓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휴대전화 반입과 인터넷 사용 금지는 말할 것도 없다. 똑같은 체육복을 입은 스무 살 남짓 여학생들은 저녁이 되면 옥상에 올라가 수다를 떨었다. 성적이 안 오른다, 가족과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차가운 밤공기를 느낄 무렵 동네에는 교회 십자가의 불빛이 붉게 켜졌다. 10개도 넘는 십자가를 보면 괜스레 울적해졌다. 스물두 살 사수생 언니는 남자친구가 옆 건물 옥상에 올라와 10m 남짓 거리를 두고 눈물겨운 데이트를 했다. 12년 전 기자가 재수하던 시절 이야기다. 경기 의왕 모 여학생 전용 기숙학원으로, 지금은 폐쇄됐다.

    ‘좋은 대학에 가자’는 결심 하나로 150여 명 여학생은 자발적으로 ‘갇혀’ 지냈다. 한 달에 2박3일간 외출이 허용됐지만 마음 편히 놀고 들어오는 학생은 없었다. 휴가가 끝나면 한 반에 두세 명은 학원에 돌아오지 않았다. ‘또 한 명의 경쟁자가 탈락했다’는 묘한 안도감과 ‘나는 끝까지 가야 한다’는 긴장감이 교차했다. 제 나름 성공적인 수험생활을 마무리하고 집에 오니 대학에서 보낸 학사경고 성적표가 와 있었다. 혹여나 딸이 재수에 실패할까 봐 이미 합격한 대학에 어머니가 몰래 등록을 했던 것이다. 거액의 학원비와 재학생 신분 유지를 위한 대학등록금까지 납부하면서. 대학은 그만큼 ‘인생이 걸린 것’이었다.

    들어가고 싶어도 못 가는 강남 학원

    기자가 지금 재수를 한다면 12년 전보다 더한 ‘불효’를 저질렀을 것이다. 현재 경기도 내 기숙학원 비용은 한 달 평균 220만~250만 원 선에, 3개월마다 20만 원의 교재비가 추가된다. 이과이거나 논술 강좌를 신청하는 경우는 더 비쌌다. 숙식과 교육, 생활지도가 포함된 비용이라 해도 일반 가계에는 큰 부담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직후인 12월부터 11개월 동안 등록한다고 치면 총 2500만~3000만 원 비용이 든다. 국내 사립대 4년치 등록금 액수와 맞먹는다. 일반 재수종합반 학원에 다녀도 1000만~2000만 원이 사교육비로 들어간다. “돈 없으면 재수도 못 한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일부 재수생이 자신을 벌레만도 못한 ‘재수충(蟲)’이라고 비하하는 이유다.

    비싼 재수 비용에도 전국 수능 응시자 가운데 졸업생 비율은 20% 내외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1년간 공부를 더해 충분히 성적을 높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지난해 졸업생의 수능 영역별 표준점수 평균은 재학생보다 7~11점 높았다. 수능에서 한두 문제로 등급이 갈리는 상황을 고려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점수다.



    수능을 60여 일 앞둔 9월 재수생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공부하며 막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재수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은 ‘돈’과 ‘성적’이다. 둘 중 하나가 부족하면 재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한때 입시촌의 중심이던 서울 노량진 학원가를 찾았다. 체육복 바지를 입고 학원가를 기웃거리는 재수, 삼수생들의 모습은 여전하다. 서점에서 만난 하종훈(27·가명) 씨는 돈 때문에 강남 대신 노량진 학원에서 삼수 중이었다. 그는 스무 살 때 강남권 학원에서 재수를 했지만 올해는 경제 사정으로 노량진을 택했다고 했다.

    “2007년 처음 재수를 했어요. 1년 동안 학원비 1000만 원, 고시원비랑 생활비로 1000만 등 총 2000만 원이 들었습니다. 잃은 것은 돈, 얻은 것은 병이더군요. 하는 수 없이 서울 내 하위권 대학에 갔지만 일찍 취업한 친구들을 보고 학벌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껴 다시 수능 준비를 하고 있어요. 비싼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노량진에 있는 친척집에 머물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재수충 300일 “돈 잃고, 병 얻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60여 일 앞둔 9월 초, 서울의 한 재수학원에서 몇몇 학생이 엎드린 채 잠들어 있다.

    평생 죄책감 들라, 재수 비용 대는 부모들

    하씨는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성적이 뛰어나거나 경제적 여력이 충분한 아이들이 강남권 명문학원에 진입하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노량진 등에서 재수생활을 한다. 재수종합반과 단과반 등 원하는 시간표를 짜보니 강남에서는 한 달 학원비만 120만~150만 원이 들고, 노량진에서는 80만~100만 원에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학원가에는 학원이 운영하는 학사(學舍)가 있지만 하씨는 “숙식, 빨래 서비스 포함해 한 달 80만~90만 원을 내야 해 감당할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재수 중인 이은화(19·여) 씨는 성적 때문에 노량진 모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씨는 “옛날에 노량진에서 잘 가르치던 선생님 대다수가 강남 학원가로 이동했다. 노량진보다 강남에 있는 선생님들의 실력이 낫다는 것은 수험생들 사이에서 정설”이라며 “강남에 있는 명문학원에서 공부하고 싶지만 성적이 안 좋아 원하는 학원 진입에 실패했다. 나보다 수준 높은 친구들과 경쟁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럼 입시 명문이라 불리는 학원은 어떨까. 재수학원 가운데 입학생 성적이 가장 높다는 서울 강남구 A학원을 찾았다. 이곳의 학생 대부분은 서울 내 중상위권 이상 대학에 지망한다. 쉬는 시간에 만난 학생들의 분위기는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의대를 목표로 재수 중인 구본준(19) 씨는 “수업 분위기가 좋아 만족하고 있다”며 “성적이 좋은 친구들이 모여서인지 공부에 대한 마음가짐이 잘 잡혀 있다. 10여 개월 동안 슬럼프에 빠진 적은 없었고 한 달 학원비로 100만 원 정도가 드는데 가계에 큰 부담은 아니다. 이대로만 노력하면 시험도 잘 볼 것 같다”고 말했다.

    구씨는 운이 좋은 편이다. 이곳 재수생 중에도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석진(19·가명) 씨는 “재수종합반과 다른 학원 단과반, 과외까지 받느라 한 달에 250만 원이 나간다. 대학을 하향 지원하더라도 꼭 장학금 받고 들어가기로 부모님과 약속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옆에 있던 박인준(19·가명) 씨도 “논술과외 비용까지 합쳐 매달 220만~230만 원이 든다. 집에서 ‘삼수까지는 못 시켜준다’고 했는데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할 경우 어떡하나 불안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경제적 여력이 없는 학생은 고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학으로 수험생활을 하기도 한다. 경기 안산에 사는 채기원(20·가명) 씨는 고교 3학년 학생의 수학과외를 하면서 자신도 3년째 대입을 준비 중이다. 재수할 때는 부모가 지원해줬지만 삼수 때는 경제적 부담 때문에 주로 독학을 하고 있다. 채씨는 고교생 때 학생회장을 하며 각종 대외활동, 봉사활동을 했지만 내신 성적이 좋지 않았다. 자신에게 유리한 리더십 관련 전형으로 수시모집에 지원했으나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는 데는 실패했다. 채씨는 “성적이 모자라도 학생회장 경력이나 자기소개서, 대외활동 등이 남보다 우수할 거라 믿었는데 결국 ‘공부를 포함해 다 잘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며 “지금 과외를 하는 고3 학생과 같이 수능을 보는데 학생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시험을 잘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늘어가는 재수 비용에 부모들은 등골이 휜다.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이형운(52) 씨는 아들이 지난해에 ‘반수’(대학에 입학한 후 재수)를 했다. 아들은 부모가 실망할까 봐 반수를 비밀로 하고 1년을 휴학한 후 대학등록금을 학원비에 보탰다. 하지만 등록금을 다 쓰게 되자 반수 사실을 털어놨고, 이씨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아들의 재수 비용을 대느라 8년 동안 들어놓은 적금을 깨야 했다.

    “학원비를 아무리 아껴도 2000만 원이 들더군요. 이 돈 다 대고 대학등록금까지 지원해주면 은퇴 후 먹고살 길이 빠듯해요. 아들이 대학 졸업하면 내 나이 예순인데 노후대책 세우는 건 꿈도 못 꿔요. 노후가 돼서야 노후 준비 시작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래도 자식 대학 가고 싶다는데 지원해주지 않으면 평생 죄책감이 들 것 같아서….”

    재수충 300일 “돈 잃고, 병 얻고”

    서울의 한 재수학원에서 학생들이 6월 모의평가 성적우수자 명단을 보고 있다.

    ‘재수 만만한’ 강남 학생 서울대로 쏠려

    문제는 재수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지난해 수능 응시자 중 졸업생 비율이 높은 고교 20개교 가운데 13개교가 서울 강남, 서초구에 소재했다. 수능 응시자 중 졸업생 비율은 서울 강남구 휘문고의 경우 104.6%, 단대부고는 91.6%에 육박했다. 100% 이상 수치는 고3 재학생보다 더 많은 재수, 삼수생이 수능을 봤다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서울 강남권 학생들이 타 지역 학생들보다 더 많이 재수를 선택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현상은 ‘강남 학생 서울대 쏠림 현상’을 유발하고 있다. 2015년도 서울대 입학생 가운데 서울지역 학생은 전체의 40%(1306명)였으며, 그중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 출신 학생(432명)이 약 33%였다. 2014년도의 28.7%보다 더 높아진 수치다. 특히 정시모집으로 들어온 신입생 중에 강남 3구 출신이 52.2%로 절반이 넘었다. 그중에서 강남구 소재 고교 졸업생은 239명으로 서울지역 합격자의 18.3%를 차지해 2014년도 수치인 16.7%보다 상승했다.

    입시 전문가는 “부유한 강남 학생들이 국민 세금을 받아 서울대에 다니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20년 넘게 입시를 지도해온 학원강사 정모(44) 씨는 “강남 출신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고급 사교육을 많이 받아 타 지역 학생들보다 성적이 좋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재수 비용에 대한 부담이 적다. 특히 요즘 수능에서 영어, 국어가 점점 쉬워져 성적 좋은 강남 학생들은 독학으로 재수하거나 한두 과목만 수강해 재수 비용을 적게 낸다. 이런 학생들이 서울대에 간다. 비록 초중고교 때 적잖은 사교육비를 투자하지만, 타 지역 학생들이 각각 3000만 원에 육박하는 재수 비용과 4년제 사립대 등록금을 내는 것과 비교하면 강남 학생들이 ‘남는 장사’를 하는 셈이다. 이런 구조는 우리 사회의 부익부 현상을 더욱 심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입시 지옥 속에서 재수생들은 1년 내내 앓는다. 수능을 본 후 1월까지는 재수를 준비하면서도 지원한 대학의 합격 소식을 기다리느라 불안하다. 2월부터는 마음을 잡고 본격적으로 재수를 시작했다 4~5월쯤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해 6월 전국연합학력평가(모의평가) 후에는 슬럼프에 빠지기도 한다. 이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컨디션 회복이 어려운 여름철을 그냥 흘려보내게 된다. 9월 모의평가를 치고 나면 성적 향상을 포기하느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느냐의 고민에 빠진다. 이후 11월까지는 ‘빼도 박도 못 하는’ 공부 정리 기간이다. 1년 동안 몸과 마음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교육비는 계속 투자되고 재수생들은 스무 살에 인생이 결정되는 단 한 번의 시험에 최대 에너지를 쏟는다. 그리고 남는 것은 대학 4년을 이미 다닌 것과 같은 비용과 은퇴를 앞둔 부모의 한숨이다. 불황에도 계속해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고 그렇게 투자한 교육이 앞날을 보장하지도 못하는 것이 교육 강국이라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입시제도 따라 흔들리는 재수생 현황

    정시 확대와 ‘물수능’이 재수생 증가 이끌어


    입시제도에 따라 재수생 비율도 바뀐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응시자 가운데 졸업생 및 검정고시생 비율은 2006년 28.83%에 달했다 2008년 23.35%로 줄어든 이후 2011년 23.63%, 2013년 23.31%, 2014년 21.34%까지 감소했고 2015년 22.39%로 소폭 늘었다. 2016년도에는 약 23%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진학사 관계자에 따르면 ‘대학의 정시모집 인원이 늘어나거나 수능이 쉬울 때’ 재수생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입시정책은 대학마다 다르지만 최근 서울대는 수시모집 인원을 줄이고 정시모집 인원을 늘리면서 입학전형을 간소화하고 있다. 서울대는 정시모집 인원을 2014년도 552명에서 2015년도 771명으로 39.7% 늘렸고, 2014년도까지는 정시모집 1단계에서 수능으로 선발하고 2단계에서 대학별고사(논술, 면접)와 학생부 비교과 성적을 합산했지만 2015년도부터는 단계별 선발을 없애고 수능 성적 100% 일괄 선발로 바꿨다. 이러한 서울대의 정책이 다른 대학들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다.

    ‘물수능’이라고 불릴 만큼 수능이 쉬워진 것도 재수생 증가의 원인이다. 한두 문제만 틀려도 등급이 바뀌는 경우가 있어 ‘실수만 안 하면 시험을 훨씬 잘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재수를 택하는 경우가 느는 것이다.

    한편 입시제도가 바뀌면 재수생 비율이 확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2008년도 입시제도는 수능 문제를 고교 교과내용 안에서 출제하고 입시에서 학생부 비중을 강화하는 것이 골자였다. ‘학교 교육 정상화’를 궁극적인 목표로 한 정책이었다. 따라서 이미 학생부 성적을 바꿀 수 없는 졸업생들은 재수를 선택하지 않았다. 대입에 수능의 영향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한 결과였다. 따라서 “2008년 재수생 비율은 2007년에 비해 크게 감소했고 하향 안정 지원의 추세를 보였다”는 것이 입시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하지만 입시제도가 바뀌어도 2~3년이 지나면 재수생이 늘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수능 언어영역 강사인 김모(43) 씨는 “입시정책이 변한 후 몇 년 동안은 재수가 유리한지 지켜보는 시기”라며 “변화한 입시제도에 익숙해진 졸업생은 자신에게 유리한 점을 찾아내 재수를 하게 돼 있다”고 말했다.
    재수충 300일 “돈 잃고, 병 얻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