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조선중앙TV가 7월 20일 도·시·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 소식을 전하며 방송한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의 투표 모습.
“남조선 종편은 너무 노골적이에요. 거 좀 살살하라고 하세요.” 이번 고위급 접촉에 관여한 남측 당국자들이 전한 황병서 총정치국장의 판문점 회담장 발언이다. 북측이 남한 언론을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있다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평양의 2인자로 손꼽히는 인물이 개인적인 감상평을 남길 만큼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정치와 언론의 관계, 정책과 민심의 관계에 어느 때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최근 북한 수뇌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방증인 까닭이다.
#2 8월 19일과 20일, ‘발칸 반도에서 가장 유명한 록밴드’로 불리는 슬로베니아 라이바흐(Laibach)가 평양 봉화예술극장과 금성학원에서 공연을 가졌다. 콘서트에 군복을 입고 나서는 등 특이한 행동으로 정평이 나 있는 팀이긴 하지만, 서방의 상업 록밴드가 북한에서 공연을 가진 것은 역시나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북한 언론은 이날 공연 소식과 사진을 보도하며 평양 주민, 유럽지역 친선·문화교류 대표단, 북한 주재 외교관과 국제기구 대표, 관광객 등이 공연을 관람했다고 전했다.
“평양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기 때문에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이바흐의 멤버 이보 살리거가 미국 음악잡지 ‘롤링스톤’과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북한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레미송’을 편곡해 연주했더니 관객들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호응해줬다는 것. 살리거는 공연 뒤 한 중년 남성이 “이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다는 것을 전에는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슬로베니아 록밴드 라이바흐가 8월 19일 북한 평양에서 가진 공연 모습.
2015년 8월 평양에는 그간 찾아볼 수 없던 일들이 넘쳐난다. 특히 대중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지는 낯선 모습은 우리가 알던 그 평양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매일 저녁 조선중앙TV에서 방송되는 ‘오늘호 중앙신문개관’은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기관지 ‘청년전위’와 ‘평양신문’까지 4대 일간지 주요 기사를 하나하나 소개한다. 역시 한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의 방송을 그대로 흉내 낸 포맷이다. 이들 신문이 전 지면을 컬러로 인쇄하기 시작한 것도 최근 들어서 일이다.
정보 당국자들과 전문가들은 이러한 북한 언론의 변화 배후에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여동생 김여정이 있다고 분석한다. 김여정이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맡아 사실상 북한의 언론과 문화예술을 총괄하면서 상상하기 힘든 과감한 행보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 선전·선동을 실제 정책 수행 못지않게 중시하는 사회주의국가 특성상 이 부서는 대표적인 파워그룹 가운데 하나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후계자 수업을 시작한 1960년대 후반 선전선동부 문화예술 지도과장으로 업무를 시작했고, 70년대 초반까지 부부장과 부장을 거치며 기록영화와 방송제작을 총괄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 아버지가 20대에 맡았던 임무를 역시 20대인 딸이 물려받았다는 의미다.
남북 고위급 접촉에 북측 대표로 참석했던 황병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이 8월 25일 협상을 타결한 뒤 평양에서 접촉 경위와 타결 내용을 밝히고 있다. 서방국가의 브리핑을 연상케 하는 이 같은 보고 형식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
1987년생으로 알려진 김여정은 김 제1비서와 함께 10대 시절 2년을 스위스 베른에서 보냈다. 배다른 형제인 김정남이나 친형인 김정철이 여전히 해외에 머물고 있는 것과 달리, 김여정은 2011년 12월 김정일의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2014년
3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에서 투표하는 모습이 이름과 함께 공식적으로 북한 전파를 탔다. 요컨대 김정은을 제외하면 ‘백두혈통’ 가운데 로열패밀리로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 고립무원이나 다름없던 어린 시절,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오누이의 정서적 유대감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워싱턴의 북한 전문가인 마이클 메이든 NK리더십워치 운영자는 근래 들어 북한 언론의 반응성(responsiveness)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고 설명한다. 남측이나 외국 언론에서 제기한 의혹이나 문제에 대해 답변을 내놓는 데 전에는 통상 3~4일이 걸렸지만, 올해 들어서는 24시간 이내로 단축됐다는 것. 서방국가 정부가 위기 상황에서 발휘하는 언론 대응 기법이나 전략적 홍보 기술을 차용하기 위해 애쓴 기색이 역력하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러한 변화는 ‘젊은 리더가 이끄는 젊은 일꾼들의 작품이 아니고서는 해석하기 어렵다’는 얘기다(8월 14일자 ‘38노스’ 기고문).
언뜻 어수룩한, 알고 보면 세심한
북한 언론의 달라진 태도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남북한 최고통치자의 보도사진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은 변영욱 ‘동아일보’ 사진부 차장은, 김정은의 모습이 북한 관영언론에 등장하는 횟수가 김정일 시대에 비해 늘어난 데다 특히 그 형식이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전통적으로 북한 언론에서는 최고통치자의 사진을 통해 ‘이상적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대중적 지도자’라는 이미지보다 강조해왔지만, 김정은 시대에는 대중적 지도자 이미지의 빈도(54.6%)가 이상적 지도자 이미지(40.2%)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난다는 것. 아버지와 달리 부인 이설주와 동행하는 모습을 자주 공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인민과 친밀한 최고존엄’의 모습을 시각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실세의 힘일까. 북한 관영언론에 ‘비판 기사’가 등장한 것 역시 북한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포인트다. 4월 조선중앙TV에서 방송된 한 프로그램에서 그간 진행된 산림복구 사업과 관련해 황해북도 지방 간부들을 거칠게 질책하는 내레이션이 전파를 탄 것이 대표적이다. 이전 시기 북한 언론에서 당국자를 꾸짖는 내용은 대부분 최고지도자의 발언을 그대로 옮기는 형식이었지만, 특이하게도 이 프로그램에서는 “말이 양묘장이지 나무모를 찾아볼 수 없고 씨 뿌릴 시기인데도 부식토를 한 줌도 내지 않았다”는 높은 수위의 비판이 아나운서 입을 통해 전달된다. 한편으로는 ‘최고존엄’ 이미지를 대중친화적으로 만들어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 언론이 현지 간부들에 대한 비판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는, 고도로 정밀하게 설계된 홍보 콘셉트다.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앞줄 오른쪽)의 4·26 만화영화촬영소 현지지도에 동행한 여동생 김여정(가운데 뒤)이 수첩을 든 채 웃고 있는 모습을 담은 ‘노동신문’ 2014년 11월 27일자 사진.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김여정의 직급을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으로 표기했다.
서두에서 살펴본 8·25합의 직후 북한 언론의 ‘친절한 설명’은, 언뜻 어수룩해 보이는 젊은 남매가 실제로는 권력체제를 공고히 구축하기 위해 얼마나 깊이 고민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사례다. 주민들을 단순한 선전·선동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구 정부가 유권자를 상대하듯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방증. 어쩌면 김정은 체제의 내구성이 생각보다 강할지 모른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고, 이제부터 상대해야 하는 평양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예전의 그 평양이 아닐지 모른다는 염려가 시작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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