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공장과 구멍가게, 부동산 공인중개사 등 옛 상권 사이에 공방과 전시공간, 현대적 카페 등이 속속 문을 열고 있는 서울 성수동 서울숲 근처 거리.
황 이사장은 지난해 봄 이곳에 터를 잡고 ‘디자인 협동조합’을 만들어 화제를 모은 청년 디자이너다. 보수상회는 그 조합 이름이다. 청바지 워싱 공장으로 쓰였던 장소를 임대해 디자인 작업실 겸 전시장 겸 상점으로 개조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 동료 디자이너들과 함께 신발, 화분, 쿠션, 지갑 등 다양한 소품을 만들어 직접 팔았다. 유통업체가 이윤의 상당 부분을 가져가는 불합리한 유통체계를 개선하고, 독립 디자이너들의 권익을 지키겠다는 포부였다.
마침 서울의 대표적 공장 밀집지역이던 성수동의 옛 공장들에 예술가들이 하나 둘 둥지를 틀던 상황.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와 편리한 교통, 그리고 공장지역 특유의 ‘에너지 넘치는 환경’이 매력 요소로 여겨졌다. 강남의 높은 임대료에 시달리던 예술가들이 강을 건너오기 시작하면서 성수동이 ‘서울의 브루클린’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참이다. 황 이사장의 ‘실험’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새로 꾸민 공간에서 수시로 공연을 여는 등 문화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한 이유가 됐다. 황 이사장은 “당시 각종 언론사의 취재 요청이 빗발치고, 구청과 동주민센터 등에서도 사람이 찾아와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묻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그가 꼭 1년 만에 모든 영화를 빈터에 남겨둔 채 짐을 빼게 된 것이다. 황 이사장은 건물 벽에 찍어놓은 ‘보부상회’ 도장을 보여주며 “내일이 되면 우리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흔적은 이 정도만 남을 것 같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핫’하고 ‘힙’한 성수동
서울 성수동에 정착한 지 1년 만에 공들여 가꾼 공간을 떠나게 된 황병준 보부상회 이사장이 이삿짐을 나르던 중 잠시 숨을 돌리고 있다.
건물주 생각만 변한 게 아니다. 그사이 성수동도 딴 세상이 됐다. 황 이사장 같은 젊은 예술가들이 낡은 주택가와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으면서 상권이 살아난 덕이다. ‘핫’하고 ‘힙’한 동네에 가난한 디자이너들이 머물 장소는 없었다. 황 이사장은 “이번 1년은 어떻게든 버티겠는데, 장기 계약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계속 이곳에 머무는 게 불가능하겠더라”며 입맛을 다셨다. 보부상회가 떠난 자리에는 카페가 들어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 이사장과 그의 동료들만이 아니다. 최근 몇 년 새 성수동에 입주해 ‘서울의 브루클린’ 문화를 일구는 데 앞장섰던 일군의 예술가가 동네를 떠나고 있다. 급등하는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워서다. 서울 마포구 합정역 등지로 이전하는 이가 많지만, 일부는 종로구 창신동 등 외곽지역에서 새 터전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낙후됐던 구도심이 활력을 찾으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그 결과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단어로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22쪽 참조). 특히 서울에선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공장 밀집지역 등에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이들의 활동으로 마을 분위기가 바뀌어 상권이 형성되면,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예술가들이 가장 먼저 마을을 떠나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용어로 많이 쓰인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저서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서울처럼 급격하게 팽창하며 발전한 도시의 공간을 기획하고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권리와 이익을 빼앗아 부를 쌓는다. 직접적으로 남의 재산을 탈취하는 것은 소유권이 확립된 시장경제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도시 전체가 집단적으로 누려야 할 이익이 특정인들에게 귀속된다면, 사회적 생산력의 성과를 개인이 자신의 것으로 누린다는 점에서 결국 그것은 착취가 된다’고 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폭력적 성격을 보여주는 설명이다.
비슷비슷 서울 상권
이미 서울 인사동, 삼청동, 북촌, 서촌, 가로수길, 경리단길 등 이름만 들어도 ‘핫한 상권’을 떠올리게 되는 많은 지역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졌고 근래엔 홍대 앞을 거쳐 성수동, 연희동, 해방촌 등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예술가 사이에선 “화가가 동네 골목에 벽화를 그리면, 바로 그 그림 때문에 골목에서 쫓겨나게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돈다. 신현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는 “1990년대 인사동 지역에서 시작된 젠트리피케이션이 완료되는 데는 10년이 걸렸다. 그런데 2000년대 삼청동에서는 5년, 2010년대 서촌에서는 2~3년 만에 변화가 끝날 정도”라며 “상업화 속도가 나날이 빨라지고 있다”고 밝혔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생소한 용어가 일반인에까지 널리 알려진 이유다.
전문가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이 부정적 측면만 가진 건 아니라고 말한다. 조명래 단국대 도시지역계획학과 교수는 “정부 지원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활동으로 도심을 되살리는 것은 젠트리피케이션의 긍정적 효과”라고 소개했다. 또 “도심의 빈곤 거주자를 교외지역으로 이전하고, 도심과 외곽 간 이동성을 높이며, 세수기반을 확대하는 것 등 젠트리피케이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과실도 많다”고 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해당 지역이 제 나름의 개성을 잃고 천편일률적인 상업지구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성수동에 있던 공장을 개조해 카페를 연 한 사장은 “우리 카페에 놓인 의자와 탁자는 모두 원래 공장에 남아 있던 철판을 변형해 만들었다. 그 공정은 성수동에서 일하던 기술자들이 맡아줬다”며 “이런 모습이 성수동의 매력이었는데, 상업지역으로 변하면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질 것 같아 안타깝다”고 밝혔다.
신현준 교수도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는 젠트리피케이션 양태는 특정한 문화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특정 장소를 잘 가꿔놓으면 이내 ‘부동산 게임’이 시작되고, 결국 동네 가치를 올려놓은 사람들이 아무 보상 없이 밀려나는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문화적 다양성이 퇴색한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서울의 대표적 철공소 밀집지에서 예술촌으로 바뀐 서울 문래동 거리에 ‘문래창작촌’을 알리는 명패가 걸려 있다.
화가이면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는 ‘예술과 도시사회 연구소’ 연구원인 김강 씨는 ‘문래동 젠트리피케이션 위의 춤’이라는 글에서 ‘사라진, 사라지고 있는 존재들은 다름 아닌 가난한 원거주자이거나 세입자들이다. 공간, 토지에 대한 몫은 철저히 소유자들의 것이다. 세입자들은 그 공간을 사용하고, 그 공간에서 사회적 재화를 생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젠트리피케이션의 상황에서 몫 없는 자들, 아무런 권리를 지니지 못한 자들로 분류된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문래동은 서울의 손꼽히는 철공소 밀집지대. 2000년대 초반부터 다닥다닥 붙은 낡은 철공소 사이로 예술가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성수동처럼 마을 풍경이 바뀐 곳이다. 문래동에 예술가가 몰린 가장 큰 요인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다. 과거 예술가들이 선호하던 홍대 앞 예술거리가 상업화되면서 건물 임대료가 치솟자, 가난한 예술가들이 지하철로 10분 거리인 문래동에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젠트리피케이션의 고리는 계속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희철 한국영상대 이벤트연출과 교수에 따르면 홍대 앞 상권을 번성하게 만든 건 신촌의 젠트리피케이션이다. 그는 “1990년대에는 신촌이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문화가 번성하고 유동인구가 증가하면서 상권이 발전하자 예술인들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홍대로 빠져나갔다”며 “신촌의 ‘언더’문화가 홍대로 넘어가 ‘인디’문화를 낳았다”고 설명했다. 홍대 앞이 새로운 문화예술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건 신촌과 가까우면서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반복되는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에서 예술가들은 계속 다른 지역으로 내몰리는 유랑민 신세가 되고, 개성과 매력을 갖고 있던 지역은 급속히 상업화한다. 한때 패션디자이너와 사진작가 등이 모여 서울에서 가장 예술적인 거리 중 하나로 꼽혔던 가로수길이 대표적 사례다.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지역, 마을, 골목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건 그곳만의 스토리”라며 “서울 곳곳의 비슷비슷한 상업지구들은 큰 인기가 없는 반면 성수동이나 문래동, 상수동, 연남동처럼 개성이 살아 있는 동네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특수성을 잃은 거리는 다시 쇠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제는 지역 정체성을 보존할 대책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최근 젠트리피케이션 확대를 막으려는 다양한 모색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가 예술, 사람, 도시를 키워드로 삼아 진행하는 ‘서울시창작공간’ 조성 사업도 그 일환이다. 서울시는 서울 금천구 인쇄공장 자리에 ‘금천예술공장’, 중구 전통시장 지하상가 터에 ‘신당창작아케이드’를 세우는 등 다양한 창작 공예 공방을 만들고, 예술가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장기간 임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문래동에도 2010년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는 ‘문래예술공장’이 설립됐다. 문래예술공장 관계자는 “현재 문래동 일대에서 활동하는 예술가가 250명에 이른다”며 “이들을 위해 전시공간, 공동작업실 등을 제공하고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역 예술가들이 임대료 부담 없이 장기적으로 마을 공동체를 꾸리며 도시 재생사업을 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해방촌 아티스트 오픈 스튜디오’에 참여하는 어니 작가(왼쪽 앉은 사람)가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열린 덤보 페스티벌에 참여한 모습.
쫓겨날 걱정 없는 개발은 가능한가
예술가들의 자체적인 노력도 진행 중이다. 5월 해방촌에서 열리는 ‘해방촌 아티스트 오픈 스튜디오’도 그중 하나다. 해방촌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12명의 작업실을 개방하는 이 행사를 기획한 박서영 프리랜서 큐레이터는 “미국 뉴욕의 맨해튼 다리와 브루클린 다리 사이에 있는 덤보 지역은 대표적 공업지역이었지만 예술가들이 모여 작업실을 만들고, 낡은 공장과 창고를 갤러리로 개조하기 시작하면서 세계적인 예술촌이 됐다. 그곳에서는 수시로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실을 공개하는 오픈 스튜디오 행사가 열리는데, 이것이 덤보의 개성을 유지하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며 “우리도 예술가들이 힘을 합쳐 지역의 예술적 힘을 강화하고, 주민들과 소통해나가면 급속한 상업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도시 노후화가 지속되고, 아파트 건설 같은 도시 재개발이 한계에 봉착한 상황에서 서울이 매력 있는 도시로 거듭나려면 문화적 힘이 필수라고 입을 모은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순기능을 강화하면 서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할 수도 있다. 정책적 노력과 예술가들의 돌파력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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