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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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케인스주의’로 서방 제재 버틴 러시아

전쟁 관련 산업 35% 성장… 석유․천연가스 수출해 버텨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24-02-2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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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케인스주의’는 군사 지출을 늘려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정책을 말한다.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주창한 ‘공공 지출을 통한 경기 부양 정책’을 차용한 개념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경제 자원을 무기 생산에 집중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전쟁 특수로 대공황에서 탈출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정책이 대표 사례다.

    회복세 보이는 러시아 경제

    러시아 유조선이 북극해의 북동항로에서 얼음을 깨면서 중국으로 원유를 수송하고 있다. [ABB 제공]

    러시아 유조선이 북극해의 북동항로에서 얼음을 깨면서 중국으로 원유를 수송하고 있다. [ABB 제공]

    2월 24일로 ‘우크라이나 침공 만 2년’을 맞은 러시아가 주요 7개국(G7) 등 서방의 강력한 제재에도 경제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은 ‘군사 케인스주의’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1월 세계경제전망보고서에서 러시아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3.0%를 기록했다고 밝혔고, 올해 전망치도 2.6%로 내놨다. 서방의 제재가 러시아 경제를 치명적인 수준으로 위축시킬 것이라고 봤던 서방 경제학자들의 예측이 빗나간 것이다.

    러시아의 올해 국방예산은 전체 예산의 3분의 1인 10조4000억 루블(약 148조8200억 원)에 달한다. 침공 전 마지막 해인 2021년 대비 세배 증가한 수치다. 러시아가 2022~2023년 전쟁 관련 부양책에 투입된 재정 규모는 GDP의 10%에 달한다. 핀란드 신흥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러시아의 전쟁 관련 산업은 같은 기간 35% 증가한 반면 민간 생산량은 현상 유지만 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G7 등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시키고, 러시아산 원유의 가격상한제를 실시하는 등 고강도 경제제재를 내린 바 있다. 서방은 3000억 달러(약 400조 원)에 달하는 러시아 중앙은행 자산도 동결했다.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는 등 초기에는 서방의 제재가 어느 정도 효과를 보였지만 러시아 경제는 지난해 후반기부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가 군사 케인스주의를 성공적으로 펼친 덕분이다. 국제 원자재 가격이 고공 행진을 하는 가운데 중국·인도 등과 에너지를 비롯한 각종 교역으로 엄청난 자금을 벌어왔다. 러시아는 전체 예산의 45%를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서방은 러시아산 원유와 석유제품 수입을 금지했지만, 중국·인도·브라질 등은 러시아로부터 기록적인 양의 석유를 들여오고 있다. 중국·인도·싱가포르·튀르키예·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2022년 원유 수입 규모는 2021년보다 500억 달러(약 66조5400억 원)나 더 많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난해 12월 하루 780만 배럴의 석유를 수출했는데, 이는 9개월 만의 최고치이자 전쟁 전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다.



    실제로 핀란드 에너지·청정대기연구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인도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 규모는 370억 달러(약 49조2400억 원)로 전쟁 이전보다 13배나 늘어났다. 러시아산 가스를 가장 많이 수입했던 EU 회원국들은 구매량을 대폭 줄였지만 러시아는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파키스탄 등 비(非)서방 국가들에 에너지를 할인된 가격으로 공급하며 제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에너지 수출 등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을 민간 기업들과 방산 업체들에 투입해 각종 무기와 장비 등 군수품을 생산하는 전시경제 체제를 운영해왔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서방의 사상 최대 규모의 제재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러시아의 ‘전쟁 기계’를 멈추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도 “미국 등 서방은 러시아에 경제 제재 조치를 퍼부었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거두지 못했다”면서 “2년이 지난 지금 러시아는 기대만큼 고립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금융․방위 산업 추가 제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2월 22일 교도소에서 의문사한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부인과 딸을 만나고 있다. [백악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2월 22일 교도소에서 의문사한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부인과 딸을 만나고 있다. [백악관]

    서방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지속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고강도 추가 제재에 나서고 있다. 미국 정부는 550여 개의 기업과 개인을 제재 대상 명단에 추가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최대 규모다. 주목할 점은 제재 대상에 러시아의 금융, 방위산업, 에너지 부문 등이 속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국영 카드 결제 시스템 미르를 비롯해 SPB은행 등 은행과 투자회사, 벤처 캐피털 펀드, 핀테크 회사 등 금융 기관 및 기업 10여 곳이 제재 대상에 포함됐다. 러시아 국영 해운사 소브콤플로트와 유조선 14척, LNG 수송선을 건조한 조선업체 즈베즈도 제재 대상이다.

    금 생산업체 폴류스와 파이프 생산업체 파이프 야금 컴퍼니, 알루미늄 생산업체 사마라 야금 플랜트, 석탄 생산업체 수크, 자원 개발 및 특수철강업체 메첼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기업들과 국영원자력 회사 로사톰의 자회사 알렉산드로프 연구소 등도 제재 대상에 올랐다. 북한의 포탄 및 군수물자 공급에 관여한 항만 인프라 업체 보스토치나야와 컨테이너 사업자 트랜스컨테이너, 이란의 자폭 드론을 러시아에 공급한 이란 국방군수부도 제재 대상이다.

    월리 아데예모 미국 재무부 부장관은 “우리의 목표는 러시아의 재정 수입을 줄여서 경제 부양과 전쟁 수행을 병행하기 어렵게 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사용할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물자를 얻는 능력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도 미국산 공작기계 등을 산업안보국의 허가 없이 구해 러시아의 산업 부문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러시아(63곳), 중국(1곳), 인도(1곳), 키르기스스탄(1곳), 한국(1곳), 터키(16곳), 아랍에미리트(2곳) 등 7개국에 소재한 93개 기업을 수출 통제 명단에 추가했다.

    EU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연루된 개인과 법인 및 기관 등 194개를 제재 대상으로 추가했다. 특히 이번 제재 대상엔 강순남 북한 국방상과 북한 미사일총국도 포함됐다. EU의 러시아 제재에 북한이 포함된 것은 처음이다. EU는 “강 국방상이 북한의 불법적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개발을 지휘하고 북·러 군사협력에 관여해 러시아에 포탄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북한 미사일총국에 대해선 “북한 미사일총국 관리 하에 설계·개발·생산된 탄도미사일이 러시아군에 의해 사용됐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지적했다.

    영국도 50여 개의 러시아 및 제3국의 개인과 기업 등에 대해 추가 제재를 단행했다. 이번 제재 대상에는 러시아 최대 탄약 업체 등 군수업체가 포함됐고, 석유 거래업체와 국영 광산회사 알로사의 신임 대표, 구리·아연 생산업체 관계자 등도 포함됐다.

    G7 정상들은 2월 24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열린 화상 회의를 갖고 발표한 공동 성명에서 “우리는 미래를 위한 싸움에서 우크라이나가 승리할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G7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우크라이나를 지지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G7 정상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끼친 피해를 배상할 때까지 러시아 자산을 동결 상태로 유지할 것”이라면서 “우리는 러시아의 에너지 수익을 제한하고, 에너지 관련 프로젝트 개발을 지연시킬 수 있는 조치를 통해 러시아가 전쟁에 치르는 비용을 높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끈질긴 버티기, 연말까지 지속”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2월 22일 초음속 전력폭격기 투폴레프 160-M의 부조종사석에 앉아 이륙 준비를 하고 있다. [크렘린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2월 22일 초음속 전력폭격기 투폴레프 160-M의 부조종사석에 앉아 이륙 준비를 하고 있다. [크렘린궁]

    이번 추가 제재 조치가 러시아 경제에 주는 타격에 대해 회의적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NYT는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에 뿌리를 둔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 조치에 대해 재정적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BBC도 “러시아 경제의 끈질긴 버티기가 적어도 올해 연말까진 지속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물론 러시아도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다. 물가상승률이 7~7.5%로 치솟고, 중앙은행의 기준 금리도 16%대까지 오르고 있다. 영국 공적통화금융기구포럼의 마크 소벨 의장은 “인플레이션과 고금리는 국민들의 실질 소득을 잠식할 것이 분명하다”면서 “앞으로 더 큰 고립과 경제 악화가 러시아 경제와 국민을 기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월 23일 국경일인 ‘조국 수호자의 날’을 맞아 공개한 화상 연설에서 최전선에 있는 병력을 격려했다. 푸틴 대통령은 “여러분은 진정한 국가 영웅이며 여러분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2월 22일 러시아 타타르스탄공화국 카잔 공항에서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최신예 초음속 장거리 전략폭격기 투폴레프(Tu)-160M을 직접 타고 30분간 비행하면서 핵 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Tu-160M은 최대 속도가 마하 2.0이고, 재급유 없이 1만2000㎞를 한 번에 비행할 수 있으며, 순항미사일 또는 단거리 핵미사일 12기를 탑재할 수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러시아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경고를 서방에 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가 군사 케인스주의 경제 체제로 서방의 제재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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