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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문 대통령이 박통보다 잘한다는 근거 못찾겠다” [서민의 野說-4]

  •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서민 “문 대통령이 박통보다 잘한다는 근거 못찾겠다” [서민의 野說-4]

  • *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의 ‘야설(野說)’은 격주 화요일 ‘주간동아’ 온라인 채널에 게재됩니다. 제도 정치권 밖(野)에서 바라 본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서민 교수의 날카로운 입담(說)으로 풀어냅니다. <편집자주>
서민 교수. [동아DB]

서민 교수. [동아DB]

“박근혜 정부가 최악의 정부라고 욕해서 미안합니다. 그때는 이렇게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최근 서울대생 커뮤니티 사이트 스누라이프에 오른 글이 화제가 됐다. 스누라이프는 2016년 12월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부끄러운 동문’ 1위로 꼽으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조국 전 장관 등 현 정권 인사들이 이 내용을 앞 다투어 인용했는데, 그 정도로 공신력 있는 사이트가 문재인 대통령 (이하 문통)이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 했으니, 3년 반에 걸친 ‘문-박 대전’ 논란은 마침표를 찍었다고 할 수 있다.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이 공정해도 결과가 불리하면 절대 승복하지 않는 문빠들은 ‘스누라이프는 일베 사이트’라며 억울해하지만, 3년 반이란 긴 시간 동안 잘한 게 하나도 없다면 그건 운이 아니라 실력이라 봐야 한다. 이 글에서 두 분이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걸어온 길을 조명하는 건 박 전 대통령 (이하 박통)의 승리가 우연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기 위함이다.

엇비슷한 정치입문 과정

먼저 박통을 보자. 박통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난 뒤 독재자로 지탄받고, 그간 쌓았던 업적이 폄하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집에서 화만 내고 있었는데,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다. 1997년 대한민국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돈을 빌려야 하는 소위 ‘외환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는 영웅이 나타나 자신들을 구해주길 바라기 마련,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박정희에 대한 그리움이 우리 사회에 휘몰아쳤다. 이 기회를 틈타 박통은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98년 경북 달성에서 치러진 보궐선거에 당선돼 국회의원이 된다. 유세 과정에서 박통은 시종일관 ‘아버지’를 외쳤으니, 아버지야말로 그의 강력한 자산이었던 셈이다. 

다음으로 문통.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 (이하 노통)의 친구라는 이유로 민정수석과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역임한다. 당시 그가 이 일을 잘 한 것 같지는 않다. 현 영부인에게 백화점을 가지 말라고 당부하는 등 수신제가에만 힘썼을 뿐, 권력 주변의 비리를 전혀 단속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노통이 퇴임 후 640만 달러 수수 의혹으로 검찰조사를 받고,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데는 문통의 책임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노통의 죽음은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뒤 정치와 선을 긋던 문통으로 하여금 정치에 나서는 계기가 되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이가 뉴스공장 진행자 김어준이다. 노통 장례식장에서 의연하게 서 있는 모습에 감동받았다는 게 그가 문통을 진보의 대통령 후보로 낙점한 이유란다. 

박통과 문통, 두 분 모두 우연히 정치에 입문했고, 각각 아버지와 친구의 죽음을 자산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단계까지 둘의 능력차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정치 입문 이후의 행보

먼저 박통을 보자. 15년간 국회의원을 다섯 번 하는 동안 박통이 발의한 법안 건수는 15건에 불과했다. 그 밖의 의정 활동도 신통치 않아, 나무위키에 따르면 박통은 상임위에 나왔을 때 보좌진이 써준 질문지를 읽기만 했을 뿐, 장관들이 엉뚱한 답변을 해도 한 번도 되묻는 법이 없었단다. 하지만 박통의 능력은 국회 밖에서 빛났다. 당 대표로 선거를 지휘했던 모든 선거에서 박통이 소속된 당이 승리를 거뒀으니 말이다. 2004년 총선은 그 하이라이트. 노통 탄핵으로 인해 한나라당의 참패가 예상되던 그때, 박통은 당사를 천막으로 옮기고 한 번만 봐달라고 국민에게 읍소했다. 결과는 121석 획득, 비록 152석을 얻은 열린우리당에게 1당은 빼앗겼지만, 개헌 저지선을 못 넘길 것이라는 예상을 뛰어넘은 선전이었다. 박통에게 ‘선거의 여왕’이란 수식어가 붙은 건 이때부터였다. 2006년 지방선거 때는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를 지원하는 유세에 참여했다가 괴한에게 커터칼로 얼굴을 찔리는 부상을 입었는데,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난 뒤 그녀가 했다는 “대전은요?”라는 말은 열세에 놓였던 대전시장 선거를 뒤집는 등 지방선거 압승을 이끌었고, 열린우리당은 광역단체장 중 전라북도 한 곳만 얻는 전대미문의 참패를 당한다. 그 뒤 박통은 2012년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두는 데 기여함으로써 한나라당의 후신인 새누리당의 유일한 대선 후보로 발돋움한다. 

다음으로 문통을 보자. 노통 사망 후 문통은 책 ‘문재인의 운명’을 내고 전국을 돌며 북콘서트를 연다. 그러던 2011년 말, 문통은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정치판에 뛰어들고, 이듬해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인 손수조와 맞붙는다. 손수조는 당시 27세에 불과했지만, 주례여고 재학시절 총학생회장을 지낸 것을 비롯해 초등학교 때부터 선거에서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데다, 중소기획사에 다닌 경력까지 지닌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선거구였던 부산 사상구는 보수의 텃밭으로 알려져 있었다. 여러모로 문통에게 불리했지만, 문통은 무려 55%의 득표율로 43.8%를 얻은 손수조를 꺾는 기염을 토한다. 이 승리는 문통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고, 그가 그해 말 열린 대선후보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면 문통의 경력에서 그다지 뛰어난 점을 발견하긴 힘들다. 문통이 유일하게 국회의원 생활을 했던 2012년부터 4년간, 문통은 4건의 법안을 발의하는 데 그쳤고, 그나마 통과된 법안은 한 건도 없다. 같이 의원을 했던 이들 중 법안통과가 0건인 의원은 문통을 포함해 8명에 불과했다. 상임위 출석률도 61.7%에 불과했으니, 아무리 봐도 의정활동에는 점수를 주기 힘들다. 국회 밖에서는 어땠을까? 문통은 당 대표로 있던 시절 치른 선거를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2017년 이전까지 민주당이 이긴 유일한 선거는 문통이 당 대표에서 물러난 뒤 치른 2016년 총선이 유일한데, 이는 당대표로 영입된 김종인이 문통 측근들을 모조리 컷오프한 덕분이었다. 이쯤 되면 정치인으로서 박통과 문통을 비교하는 건 박통에게 실례가 아닐까 싶다.

한차례의 맞대결

박통과 문통은 딱 한 차례 정면 대결을 벌였는데, 2012년 대선이 바로 그 장이었다. 무소속의 안철수, 통합진보당의 이정희가 사퇴해 줌으로써 보수와 진보 양자대결이 성사됐건만, 문통은 100만표 이상의 차이로 참패하고 만다. 세월호와 태블릿PC 덕에 대통령이 됐고, 이를 빌미로 박통을 감옥에 가두는 데 성공했지만, 문통이 박통보다 대통령직을 더 잘 수행한다는 근거를 찾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스누라이프가 박통의 손을 들어준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대통령이 된 문통이 걸핏하면 박통 핑계를 대는 건, 자신이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자에 대한 경외와 질투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다음에 일어날 일도 우린 짐작할 수 있다. 1년 남짓한 문통의 남은 임기에서 더 끔찍한 나날이 이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주간동아 1267호 (p6~8)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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