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G2 지도자 희비쌍곡선 가른 유가

사우디와 러시아 유가전쟁에 트럼프는 울상, 시진핑은 미소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20-03-2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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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탐사선이 북극해 해저유전에서 원유를 탐사하고 있다. [Analolu agency]

    러시아 탐사선이 북극해 해저유전에서 원유를 탐사하고 있다. [Analolu agency]

    매는 중동지역에서 국왕의 권위와 부를 상징하는 조류다. 중동지역 국왕과 왕족은 물론, 부자들의 취미는 대부분 매사냥이다. 매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조(國鳥)이기도 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사우디를 국빈 방문했을 때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에게 우의(友誼)의 징표로 캄차카 반도에 서식하는 희귀한 흰매를 선물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백송골로도 불리는 흰매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한 맹금류다. 당시 살만 국왕은 이 매를 보고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음 지었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과 살만 국왕은 2017년부터 미국 셰일오일에 맞서 적정 수준의 감산을 통해 석유 공급량을 조절하면서 국제유가 하락을 막는 데 적극 협력해왔다. 양국의 공조로 국제유가는 배럴당 50~60달러 선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 때문에 양국의 협력관계가 깨지면서 국제유가가 폭락하고 있다. 

    코로나19로 각국의 석유 수요가 대폭 줄어들자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14개 회원국과 러시아가 이끄는 비(非)OPEC 10개국이 3월 4~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OPEC+(플러스) 회의를 갖고 산유량 감산 문제에 대해 논의했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세계 산유량 2위인 사우디와 3위인 러시아가 대립했기 때문이다. 압둘라지즈 빈 살만 사우디 에너지부 장관과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에너지부 장관이 별도로 만나 6시간 넘는 마라톤협상을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압둘라지즈 장관은 노박 장관에게 산유량을 대폭 줄이자고 제의했지만, 노박 장관은 이를 거부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 아람코가 보유한 세계 최대 규모의 가와르 유전. [SAPRAC.ORG]

    사우디아라비아 국영석유회사 아람코가 보유한 세계 최대 규모의 가와르 유전. [SAPRAC.ORG]

    사우디가 산유량을 대폭 감산하려는 이유는 무엇보다 국제유가 하락을 막으려는 의도 때문이다. 사우디로서는 코로나19로 석유 수요가 줄어든 만큼 산유량을 감축해 국제유가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자는 입장이었다. 특히 사우디의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자신이 추진해온 탈석유 신성장 계획인 ‘비전 2030’에 따른 재정 수요를 맞추려면 세계 최대 국영회사이자 석유기업인 아람코의 주가가 하락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강력하게 감산을 주장해왔다. 

    반면 러시아는 아예 증산하자는 입장이다. 러시아가 사우디의 감산 의견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셰일오일업체들의 반사이익을 막기 위해서다. 러시아는 그동안 감산이 미국 셰일오일업체들의 배를 불리고 시장점유율까지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해왔다. 셰일오일은 시추가 까다로워 생산 단가가 높다. 러시아가 산유량을 늘려 유가를 낮은 수준으로 계속 유지하면 원가 경쟁력에서 밀리는 미국 셰일오일업체들은 파산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미국 셰일오일업계의 손익분기점이 되는 국제유가는 배럴당 40달러 선이다. 러시아로선 감산 대신 증산할 경우 국제유가가 더 하락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미국 셰일오일업계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으리라 보고 있다. 게다가 푸틴 대통령은 자국과 유럽을 잇는 가스관인 ‘노르트 스트림 2’를 건설해 러시아산 가스를 유럽에 판매하겠다는 계획을 반대해온 트럼프 대통령에게 상당한 불만을 드러내왔다. 러시아는 4월 1일부터 하루 산유량을 최대 50만 배럴까지 더 증산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산유량은 현재 하루 1130만 배럴 수준이다. 



    특히 푸틴 대통령의 석유 증산 카드는 개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푸틴 대통령으로선 종신집권이라는 자신의 권력욕을 실현하려면 4월 22일 국민투표에서 개헌안이 통과돼야 한다. 이를 위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의 최대 무기인 석유를 수단 삼아 사우디와 미국에 맞서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강한 러시아’를 기대하는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 사태 및 국제유가 하락과 관련해 대책을 밝히고 있다. [백악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 사태 및 국제유가 하락과 관련해 대책을 밝히고 있다. [백악관]

    그러자 사우디도 감산하자는 입장을 바꿔 증산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람코는 리야드 주식시장 공시를 통해 4월 1일부터 하루 생산량을 970만 배럴에서 1300만 배럴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국제 석유 전문가들은 아람코의 지속가능한 산유 능력은 1200만 배럴 수준이라며 사우디가 전략비축유까지 시장에 쏟아붓겠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아람코는 또 아시아에 대한 4월 아랍경질유 선적분의 공식판매가격(OSP)을 3월보다 배럴당 6달러, 미국에 대해서는 8달러, 유럽에 대해서는 8달러씩 내리겠다고 밝혔다. OPEC의 3위 산유국이자 사우디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아랍에미리트(UAE)도 4월 1일부터 하루 산유량을 기존 300만 배럴에서 400만 배럴까지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사우디의 전략은 시장점유율을 높임으로써 경쟁국인 러시아를 유가전쟁에서 패배시키겠다는 것이다. 물론 사우디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미국 셰일오일업체들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고 있다. 사우디는 그동안 미국 셰일오일업체들을 못마땅하게 여겨왔지만 적대국인 이란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미국과 군사협력을 강화해왔다. 

    국제유가는 사우디와 러시아의 치킨게임으로 배럴당 20달러대까지 폭락할 수도 있다. 사우디는 석유 생산 원가가 2.8달러에 불과하기 때문에 유가 폭락에도 버틸 수 있다는 입장이다. 러시아도 최근 몇 년간 원유 매출액 증가로 1700억 달러(약 218조6710억 원) 규모의 국부펀드를 조성해놓아 국제유가가 내려가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미국 석유업체 아파치사가 텍사스주 퍼미언 분지에서 셰일오일을 굴착하고 있다. [ppache]

    미국 석유업체 아파치사가 텍사스주 퍼미언 분지에서 셰일오일을 굴착하고 있다. [ppache]

    그런데 양국 유가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세계 최대 산유국인 미국 셰일오일업체들이 될 것이 분명하다. 국제 석유 전문가들은 국제유가가 폭락할 경우 미국에서 전통 석유사업을 기반으로 셰일오일업계에 진출한 엑슨모빌 등 5개 회사만 생존하고 100여 개의 셰일오일업체가 줄줄이 도산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셰일오일업체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지지 기반인 텍사스주에 몰려 있다. 셰일오일업체들이 몰락하면 텍사스주 지역경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테고, 미국 경제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셰일오일이 미국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지난 10여 년간 10%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미국 셰일오일업체들은 벌써부터 주요 지역 시추를 중단했고, 대규모 해고 등 구조조정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셰일오일업체들이 도산하면 이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주요 금융사까지 타격을 입는 ‘뱅크런’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3월 13일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전략비축유 매입을 지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에너지부 장관에게 매우 좋은 가격에 미국의 전략비축유를 대량으로 매입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국제유가가 폭락한 만큼 적극적인 석유 매입을 통해 국제유가를 다시 끌어올려 셰일오일업체의 도산을 막겠다는 포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비축유 매입 카드는 푸틴 대통령에 대한 반격이자 자신의 재선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6억4000만 배럴의 전략비축유를 보유하고 있는데, 비축시설이 충분한 만큼 상당량의 석유를 매입할 수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경제회복에 적극 나설 것을 강조하고 있다. [차이나데일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경제회복에 적극 나설 것을 강조하고 있다. [차이나데일리]

    세계 최대 산유국인 미국과 사우디, 러시아의 치킨게임을 가장 느긋하게 바라보는 국가는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인 중국이다. 국제유가 폭락으로 전략비축유를 싼값에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전략비축유는 1억9900만 배럴 수준으로 미국의 90일분에 훨씬 못 미친다. 중국은 그동안 시진핑 국가주석의 지시에 따라 전략비축유 시설을 대폭 확충해온 만큼 이번 기회에 석유를 대량 수입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지난해 하루 평균 1012만 배럴의 석유를 들여온 중국은 코로나19가 진정세를 보이면서 다시 석유 수입을 크게 늘릴 것이 분명하다. 경제회복에 나선 중국으로선 국제유가 폭락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유가전쟁을 놓고 희비쌍곡선이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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