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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기자의 일본 종단 다이어리<마지막 회>

미래 보며 ‘하이브리드’ 빚는 조선 도공 후손의 길

가고시마현 미야마 마을서 ‘15대 심수관’ 만나…3천km 열도 종단 가장 뜨거운 여름

미래 보며 ‘하이브리드’ 빚는 조선 도공 후손의 길

미래 보며 ‘하이브리드’ 빚는 조선 도공 후손의 길

태풍 할롱 때문에 자전거들이 쓰러진 모습. 가고시마현 사쓰마센다이시에서 태풍을 피해 하루 반 동안 라이딩을 쉬었다(왼쪽). 심수관요의 명맥을 잇는 15대 심수관.

규슈에서 구마모토, 가고시마로 이어지는 서쪽 루트를 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정유재란 당시 납치된 조선 도공들이 정착한 땅, 바로 가고시마현 미야마(美山) 마을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이 마을에는 15대에 걸쳐 조선 도공의 명맥을 잇는 곳이 있다. 1597년 끌려온 조선 도공 가운데 심당길의 후손이 만든 ‘심수관요’인데, 12대부터 대를 이어 심수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지금은 14대와 15대 심수관이 생존해 있다.

가업에 대한 이들의 집념은 상상을 초월한다. 후손은 교토대, 와세다대 등 내로라하는 일본 명문대를 나오고도 때가 되면 돌아와 가업을 잇는다. 13대는 14대에게 “아들을 도공으로 만들어라. 네가 할 일은 그것뿐”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15대의 아들도 지금 교토에서 도자기를 공부하고 있다.

심수관요에서 만든 사쓰마야키(사쓰마 도자기)는 일본에서 명품으로 꼽힌다. 과거에는 이곳 번주가 사용했으며 지금은 호텔 등에서 전시용이나 귀빈 접대용으로 쓴다. 일본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는 ‘어찌 고향이 잊히리오’라는 소설에서 조선 도공들의 일본 정착기를 다뤘다. 번주가 가고시마성에 들어와 살라고 하자 도공들은 두 가지 이유로 거절했다. ‘전쟁 당시 왜군의 앞잡이 구실을 한 조선인이 성에 살고 있는데 반역자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것이 첫째였고 ‘바다 너머 조선 산하가 보이는 곳에서 지내고 싶다’는 것이 둘째였다.

“한국은 아버지, 일본은 어머니 나라”

미래 보며 ‘하이브리드’ 빚는 조선 도공 후손의 길

조선의 흙과 유약을 사용해 만든 히바카리. 1대 심당길이 만들었다고 한다.

번주는 이들에게 무사와 같은 직위를 하사해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했다. 그래서 도공들은 조선 의복과 이름을 유지하면서 수백 년 동안 지낼 수 있었다. 도공들은 일본에 끌려오면서도 조선의 흙과 유약을 가져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선의 흙과 유약을 사용해 만든 도자기가 심수관요 전시관에 ‘히바카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불만 일본 것을 썼다는 의미다.



자전거 여행이라 안 그래도 일정이 불확실한데 태풍 할롱까지 겹쳐 다음 날 라이딩을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날이 이어졌다. 그나마 이틀 만에 태풍이 지나가 라이딩을 재개했지만 미리 연락을 못 하고 미야마 마을을 방문했다.

‘대한민국명예총영사관’이라는 문패가 달린 문을 지나 들어갔더니 전시관이 나왔다. 전시관을 둘러본 뒤 “15대 심수관을 만나고 싶다”고 청했다. 다행히 집에 있다고 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니 건장한 체격에 약간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그는 명함을 받더니 필자 이름을 한글로 정확히 읽었다. 한국어를 공부 중이라고 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일본, 이탈리아, 한국 등에서 도자기를 공부했으며 1999년 서른 살에 심수관 이름을 이어받았다. “어떤 마음으로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질문에 그는 98년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연 ‘400년 만의 귀환’ 전시회 얘기를 꺼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렇게 멋진 도자기를 만든 사람이 한국인이고 이것이 한민족의 힘이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그런 시각이 아쉬운 점도 있었다. 식물도 재배하는 땅이 달라지면 열매가 달라진다. 조선 기술이 일본이라는 풍토를 만나 새로운 작품이 나왔고 이것이 세계로 뻗어나간 것이다. 일종의 하이브리드인 셈인데 이런 점을 흥미롭게 봐줬으면 좋겠다.”

한국인이 그를 만나면 자주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당신은 한국인이냐”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본인이지만 피는 한국 사람”이라고 답한다고 했다.

“한국 혈통을 기쁘게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이 아버지의 나라라면 일본은 어머니의 나라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은 원래 뿌리가 같다. 옛날에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여행 온 사람이 일본인, 배웅했던 사람이 한국인 아니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심수관요 도자기는 그의 말대로 한국과 일본이 함께 만든 작품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일민미술관 전시회에 참석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쓰마 도자기는 한국 핏줄이 만들고 일본인이 키워 세계에 이름을 떨쳤다. 얼마나 멋진 결합인가. 두 나라가 이처럼 힘을 보태 미래로 나아가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영부인과 함께 2004년 이곳을 찾았다.

미래 보며 ‘하이브리드’ 빚는 조선 도공 후손의 길
일본을 종단하는 대학생

미래 보며 ‘하이브리드’ 빚는 조선 도공 후손의 길

조선 도공의 후손이었던 도고 시게노리 전 일본 외무대신의 송덕비.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 옆에 세워져 있다.

한일 우호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심수관요인 만큼 15대는 최근 냉각된 한일관계에 대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필자에게 “최근 한일관계 악화에는 언론 책임도 크다. 우익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찾아보면 역사적으로 양국의 우호관계를 위해 힘썼던 사람이 많았고 지금도 많다. 균형을 맞추는 차원에서 그런 얘기도 소개해달라”고 당부했다.

차를 마시며 한 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눈 뒤 심수관요를 나왔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보였다. 심당길의 후손이 조선식 이름과 도공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며 수백 년을 보냈다면, 함께 끌려온 도공 박평의 후손은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12대 후손 박수승은 도고(東鄕)라는 성을 사 귀화했고 그의 아들 박무덕은 도고 시게노리라는 일본 이름으로 도쿄대를 졸업한 뒤 외교관이 됐다. 그는 두 번에 걸쳐 외무대신을 역임했으며 목숨을 걸고 군부의 강경세력에 맞서 태평양전쟁 종결을 이끌었다.

하지만 전쟁 당시 외무대신을 지냈다는 이유로 전범이 돼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감옥에서 병사했다. 그의 후손도 대대로 외교관을 지내 도고 가문은 일본의 외교 명문가로 꼽힌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은 일본 정착 과정에서 이처럼 서로 다른 길을 택했다. 어느 길이 옳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미야마 마을을 떠나 모래찜질로 유명한 이부스키의 유스호스텔에서 하루 묵은 뒤 네지메항으로 가는 페리를 탔다. 네지메항에서 사타곶까지는 35km가 약간 넘는 거리라 당일치기로 다녀올 생각이었다.

배에서는 방학을 맞아 자전거로 일본을 종단하는 대학생을 만났다. 나고야에서 온 나카모리 유야(20) 씨인데 사타곶을 시작으로 소야곶까지 올라간다고 했다. 필자가 끝이라면 그는 이제 시작이었다. 날도 더운데 캠핑을 하겠다면서 텐트까지 매달고 온 모습을 보니 고생길이 훤해 한숨이 나왔다. 선배 라이더로서 루트에 대해 조언했고 쓰다 남은 파스와 물파스를 건네며 행운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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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본토 최남단인 사타곶.

드디어 일본 최남단 사타곶 도착

중년의 한국인 자전거 여행자도 한 명 만났다. 최낙신(51) 씨였는데 20일 동안 규슈를 여행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이부스키에서 같은 유스호스텔에 묵었고, 가고시마로 돌아와서는 서로의 여정이 탈 없이 끝난 것을 축하하며 한국 식당에서 술도 한잔했다. 그는 철인3종 경기를 열 번 완주했을 정도로 체력이 좋았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것과 요트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중년 남성이 꿈을 얘기하고 도전과 모험을 즐기는 모습이 신선해 보였다.

사타곶으로 향하는 길은 완연한 아열대 풍경이었다. 산은 숲이라기보다 밀림에 가까웠고, 야자수와 투명한 바다가 눈을 시원하게 했다. ‘원숭이 조심’이라는 표지판이 나와 설마 했는데 코너를 돌자 바로 원숭이 7~8마리가 나타나 놀라기도 했다. 사람을 보고 피하기는커녕 위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몇 분 후엔 멧돼지 다섯 마리가 도로를 가로질러 지나가는 모습까지 봤다. 도로의 주인이 아무래도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타곶 직전에는 위도 31도 기념물이 있었다. 카이로, 뉴델리 등이 비슷한 위도에 있다고 했다. 여행을 시작한 홋카이도 소야곶이 위도 45도였던 것을 생각하니 자전거로 먼 길을 왔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났다.

사타곶에는 ‘본토 최남단’이라고 쓰인 기념물이 있었다. 물론 남쪽으로 더 가면 오키나와 등이 있지만 배를 타지 않고 갈 수 있는 곳으로는 가장 멀리까지 온 것이다. 사진을 찍고 자전거를 세운 뒤 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에는 일본인 서너 명이 있었다. 남은 전단지를 나눠주면서 일본 종단을 방금 끝냈다고 설명했다. 다들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취지를 설명하니 금세 응원 모드로 바뀌었다. 한 중년 남성은 “당신 같은 젊은이가 만들 미래에 기대가 크다”고 말해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소야곶에서 다시 네지메항으로 와 이부스키로 돌아가는 배를 탔다. 배 위에서 멀어지는 사타곶을 보며 생각했다. 올여름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여름이었다고.

가고시마와 유신

근대 문물 일찍 수용…메이지유신 주역들의 고향


일본 종단여행의 종착지인 가고시마는 ‘유신의 고향’으로 불린다. 일본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유신의 주역 상당수가 가고시마(옛 사쓰마번) 출신이기 때문이다.

일본 본토 최남단에 위치한 사쓰마번은 서양과의 무역을 통해 근대 문물을 일찍 받아들였다. 특히 19세기 중반 시마즈 나리아키라 번주는 하루빨리 부국강병을 이루지 않으면 일본이 서양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막으려고 동양 최대 공장 지대인 ‘슈세이칸’를 조성하고 부국강병에 매달렸다. 서양식 군함을 만들었고 방직, 도자기, 유리 산업을 부흥했다. ‘유신 3걸’로 꼽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를 키운 것도 그였다.

그의 손자 시마즈 타다요시는 1865년 유학을 금지한 막부 방침을 어기고 영국에 유학생 19명을 보냈다. 발각되면 모두 목숨을 잃는 위험천만한 여정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일본으로 돌아와 근대화 기틀을 만들었다.

가고시마 곳곳에는 유신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은 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았던 할리우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모델인 사이고 다카모리다. 메이지유신 최대 공신인 그는 사무라이 계급 활성화를 위해 정한론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쓰마로 돌아와 군사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그가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생각한 일본 정부의 강압적인 조치로 충돌이 일어났고 ‘일본 최후 내전’이라 부르는 세이난 전쟁이 발발했다. 사이고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반군지도자가 됐으며 패배가 확실해지자 자결했다.




주간동아 2014.08.25 952호 (p62~64)

  • 장원재 동아일보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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