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1

..

길 떠나면 쏟아지는 비 나흘 동안 400km 죽을 맛

원폭 떨어진 히로시마 둘러보고 힘겹게 달려 기타큐슈 도착

  • 장원재 동아일보 기자 peacechaos@donga.com

    입력2014-08-18 17:2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길 떠나면 쏟아지는 비 나흘 동안 400km 죽을 맛

    원자폭탄의 상흔을 간직한 히로시마 원폭 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런 곳에서 사랑에 빠질 줄이야.”

    고전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 속 여주인공 대사다. ‘이런 곳’이란 원자폭탄의 상흔을 간직한 히로시마를 가리킨다.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히로시마에서 자신의 아픈 과거를 회상하고 이를 처음 만난 남자에게 털어놓는다.

    1945년 8월 6일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된 후 히로시마는 세계인에게 전쟁의 비참함을 상징하는 장소가 됐다. 당시 35만 명이던 인구 중 14만 명이 그해 말까지 사망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 공원에는 뼈대만 남은 원폭 돔 건물이 남아 있으며 공원 내 기념관에는 구부러진 철근, 일그러진 유리병 등이 전시돼 있다.

    이때 희생자의 10%가량은 한반도에서 자발적 또는 강제적으로 이주한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이들에게 원자폭탄은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공원에 세워진 한국인 원폭피해자 위령비는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이자 제국주의 전쟁을 끝내려고 동원한 무기에 희생된 사람들의 기막힌 사연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전쟁의 비참함을 상징하는 장소



    최근 이들을 더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이 생겼다. 2011년 8월 한국과 일본 대학생들이 한일 우호를 염원하면서 위령비 주변에 심은 나무가 5월 사라진 것이다.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나무가 밤사이 사라진 것을 두고 누가 의도적으로 뽑은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필자가 안내소를 찾아 나무 행방을 묻자 “없어졌다는 사실은 아는데 그 후 상황은 잘 모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현장에는 나무가 있던 흔적과 표지판만 남아 있었다. 일본에 한일 우호관계를 방해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실감했다. 여행에서 만난 일본인 대다수가 한일관계 개선을 바라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길 떠나면 쏟아지는 비 나흘 동안 400km 죽을 맛

    한국인 원폭피해자 위령비. 이 앞에 한일 양국 대학생들이 심었던 나무가 사라져 지금은 표지판만 남아 있다.

    기념관에는 히로시마 시장이 매년 핵무기를 보유했거나 핵실험을 한 국가에 항의 서한을 보낸 기록도 남아 있다. 지난해엔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에게 편지를 보냈다. 시장은 서한에서 “국제 사회의 비핵화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며 비난했다. 미국 등 다른 핵보유국에 대한 편지는 해당국 대사관으로 발송하는데 이 편지는 어떻게 전했을지 궁금하다. 일본과 북한은 수교를 맺지 않아 북한대사관이 일본에는 없다.

    히로시마에서는 비즈니스호텔에 묵었는데 할아버지 경비원이 일본을 종단한다는 말을 듣더니 “대단하다”며 경탄했다. 괜찮다는데도 굳이 아침식사를 챙겨줬고 신문을 가져와 일기예보를 보여주며 “비가 올지 모르니 끝까지 조심히 가라”고 격려했다.

    8월 3일에서 6일까지는 빗속에서 자전거를 탔다. 당초 ‘비 오는 날은 라이딩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매일 아침 날씨가 맑았고 강수 확률은 절반 정도였다. 갈 길이 많이 남았는데 맑은 하늘을 보며 라이딩을 포기하기란 어려웠다.

    문제는 길만 떠났다 하면 비가 쏟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3일과 6일에는 거의 종일 비가 왔다. 라이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폭우가 내리기도 했다. 그러면 편의점이나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빗줄기가 가늘어지길 기다려야 했다. 변변한 건물도 없는 들판이나 오르막에서 폭우를 만났을 때는 ‘신이 내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길 떠나면 쏟아지는 비 나흘 동안 400km 죽을 맛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그렇게 나흘 동안 400km를 달렸다. 우중 라이딩 요령도 조금씩 생겼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 중에는 구름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레이더 앱이 있다. 이를 활용하면 언제쯤 빗줄기가 굵어질지, 가늘어질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가급적 편의점 등 대피 장소가 있는 곳을 찾아서 라이딩을 했고,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 쓰기 어렵기 때문에 좀 돌아가더라도 복잡하지 않은 루트를 택했다. 배낭과 패니어(자전거용 짐가방)에는 레인커버를 씌우고 안에 있는 물건은 비닐봉지에 넣어 이중으로 젖지 않도록 했다.

    휴식을 취할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일본 기상청에 접속해 날씨를 확인했고 자전거용 우비도 사서 입었다. 다만 우비를 입으면 바람의 저항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없고 페달을 밟기도 불편했다. 그래서 빗방울이 굵지 않을 때는 그냥 맞으면서 라이딩을 했다.

    요령이 생겨도 우중 라이딩은 괴로웠다. 온몸이 젖은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페달을 밟다 보면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 때문에 라이딩 시간이 길어지면서 피로도 급격히 쌓였다. 숙소에 도착하면 가족에게 전화도 못 하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우중 라이딩의 종착지는 기타큐슈였다. 그곳에는 필자 외할머니의 오빠인 둘째 외할아버지가 살고 계셨다. 해방 직후 좌익운동을 하다 일본으로 도피하셨다고 한다. 군사정권 시절엔 제대로 연락도 못 하고 지냈는데 민주화 이후 자유롭게 연락할 수 있게 됐다. 필자는 10년 전 규슈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낼 때 처음 뵈었는데 당시 이러저런 신세를 져서 이후에도 종종 연락을 드리곤 했다.

    길 떠나면 쏟아지는 비 나흘 동안 400km 죽을 맛

    다자이후시에 있는 수성터. 백제 망명자들이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저지하려고 만들었지만 실제로 사용된 적은 없다.

    기타큐슈에서 만난 외할아버지는 내년에 아흔이 되는데도 정정하신 모습이었다. 홋카이도부터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말에 “대단하다”면서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불고기를 사 주셨다. “이제 거의 다 왔으니 마지막까지 힘내라”며 연신 고기를 올려주셨는데 나중에는 배가 불러 못 먹을 정도였다. 숙소도 좋은 호텔을 예약해주셔서 피로를 풀고 완주 각오도 다졌다.

    일본 본토를 구성하는 4개 섬 가운데 규슈는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이라 다양한 교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후쿠오카 남쪽에 있는 다자이후시는 과거 규슈의 중심지였으며 ‘학문의 신’이라 부르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신 텐만구가 있는 곳이다. 한국인에게는 백제가 멸망한 후 이주한 백제 망명자들이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막으려고 쌓은 수성(水城)이 있는 곳이어서 더 의미가 깊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에서 “수성을 통해 고대 한일관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는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합종연횡을 거듭했는데 이 중 백제와 왜는 시종 탄탄한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663년 나당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이 충돌한 백촌강 전투 당시 야마토 정권이 군선 800척과 군사 2만7000명을 지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패한 백제는 멸망했고, 많은 귀족과 백성이 일본으로 망명해 수성 등 여러 문화유산을 남겼다.

    기타큐슈에서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 넘으니 다자이후가 나왔고 거기서 후쿠오카 방면으로 조금 가니 수성터가 보였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다자이후에서 유일하게 평야로 이어진 곳에 물을 이용해 적의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토성과 도랑을 만든 것이 수성이다.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는데 건설 당시 길이가 1.2km에 달했고 폭은 최대 80m나 됐다고 한다.

    다자이후에 남은 백제식 산성

    길 떠나면 쏟아지는 비 나흘 동안 400km 죽을 맛

    다자이후 텐만구 앞에 줄지어 늘어선 기념품 가게들. 우리말로 ‘합격 기원’이라고 써놓은 게 눈에 띈다.

    백제 망명자들은 북쪽과 남쪽 산에도 백제식 산성을 쌓았다. 나당연합군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다음 타깃으로 삼았고 이후 신라와 당나라가 분열해 일본까지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수성을 둘러본 뒤 텐만구로 자전거를 돌렸다. ‘학문의 신’을 모신 곳이다 보니 참배하면 입시에 합격한다는 속설이 있어 연간 700만 명이 찾는다고 한다. 외국인 관광객도 많았는데 치열한 입시경쟁을 가진 중국인과 한국인이 특히 많았다. 우리말로 ‘합격기원’이라고 새긴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있을 정도였다.

    텐만구 앞에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즐겨 먹었다는 우메가에모찌를 파는 상점이 줄지어 있다. 찹쌀떡의 일종으로, 다자이후의 명물이다. 하나 먹어봤는데 달지 않아 입에 잘 맞았다. 다자이후에서 야나가와를 들렀다가 유노코 온천으로 향했다. 주말에 태풍이 온다고 해 그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려고 일일 주행거리를 150km 이상까지 늘렸는데, 다행히 몸은 괜찮았다. 유노코 온천에서는 산카이칸(山海館)이라는 60년 된 여관에 묵었다. 저녁식사를 제외한 대신 싸게 해줘 예산 내에서 숙박할 수 있었다.

    동굴 온천으로 유명한 이 여관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남자 사우나·노천온천을 잇는 동굴과 여자 사우나·노천온천을 잇는 동굴이 중간에서 교차하게 만들어놓았다. 여관 직원은 교차점에서 여성과 마주칠 수 있으니 중요 부위를 꼭 가리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투숙객이 적어서인지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길 떠나면 쏟아지는 비 나흘 동안 400km 죽을 맛

    유노코 온천은 바닷가에 조성돼 멋진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 시모노세키와 한반도

    조선통신사 첫 기착지이자 아픈 역사의 현장


    혼슈 끝자락에 위치한 시모노세키(下關)에서 부산까지는 직선거리로 200km가 약간 넘는다. 이처럼 가까운 지리적 위치 때문에 시모노세키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관문 구실을 했다.

    조선시대 한일 교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조선통신사의 일본 내 첫 기착지도 이곳이었다. 통신사는 이후 배로 오사카까지 가서 육로로 교토, 나고야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한양에서 도쿄까지 한번 왕복하는 데 6개월~1년이 걸렸다고 한다.

    약 200년 동안 12차례 이어진 통신사는 규모가 300~500명에 달했는데 경비는 일본 측이 부담했다. 통신사 일행은 지나는 지역마다 국빈 대접을 받았고 문화 교류 등을 통해 일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통신사가 다녀갈 때마다 일본의 유행이 바뀐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일본이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대륙 문화의 전달 루트였던 통신사는 중단됐다.

    시모노세키의 칸몬해협 앞에는 지금도 닻 모양으로 생긴 통신사 상륙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맞은편에는 일곱 살에 죽은 안토쿠 일왕을 기리는 아카마 신궁이 있는데 이곳이 통신사의 첫 숙박 장소였다고 한다.

    시모노세키는 이처럼 평화 시에는 교류의 장소였지만 양국 관계가 틀어졌을 때는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는 조선인 포로가, 일제강점기에는 강제징용자들이 시모노세키를 통해 일본에 도착해 전역으로 퍼졌다.

    필자에게 시모노세키는 처음으로 타이어 펑크를 경험한 장소이기도 하다. 아카마 신궁을 떠나는데 바퀴가 덜컹거려 내려서 살펴보니 타이어 공기가 빠져 있었다. 누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길에도 펑크가 여러 번 났다는데 2400km 만에 첫 펑크가 난 것이니 불평한 처지는 아니었다. 마침비도 그쳐 다행이었다. 배운 대로 타이어 튜브를 교환하고 페달을 밟으니 자전거 바퀴가 다시 힘차게 돌아갔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