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1

2013.08.19

가짜에 빛 바랜 ‘표암 강세황’ 예술혼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낙관·작품 위조 많아…70세 자화상은 김홍도가 그려

  • 이동천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

    입력2013-08-19 11: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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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에 빛 바랜 ‘표암 강세황’ 예술혼

    1 강세황의 가짜 ‘송도기행첩’ 중 ‘박연’. 2 강세황의 ‘남산과 삼각산’.

    세상 어디를 가도 미술품 감정은 배우기 어려운 학문이다. 감정의 지식은 대부분 실전에서 어렵게 얻어진 값진 것이다. 누구도 자신만의 노하우를 쉽사리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감정은 공부하기도 쉽지 않지만 무엇보다 좋은 선생을 만나기가 어렵다.

    1994년 필자는 중국 최고 감정가(人民鑑賞家) 양런카이(楊仁愷·1915~2008) 선생을 업사(業師)로 모셨다. 80세 고령의 선생이 어린 제자에게 하신 첫 말씀은 “우연이 필연이 된다”였다. 감정가로서 선생의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한마디로 우연이었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필연이라 느끼는 일도 거꾸로 되짚어보면 정말 우연찮게 시작됐다.

    ‘송도기행첩’은 위작

    “중국으로 돌아가라” “중국 서화만 감정해라” “우리 소장품은 말하지 마라” 등은 필자가 명지대 대학원에 예술품감정학과를 개설한 후 미술사가들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돌이켜보면 이 말이 필자의 오늘을 만들었다. 수백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어떠한 제약 없이 제작됐고 유통됐던 가짜 서화작품에 처음으로 브레이크를 걸고 여과장치를 단 것이다.

    최근 필자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의 표암 강세황(1713~1791) 탄신 300주년 기념 특별전 ‘시대를 앞서간 예술혼 표암 강세황’전에 다녀왔다. 보는 내내 가짜가 많아 아쉬웠다. 특히 필자가 이미 글로 분명하게 밝힌 가짜도 전시됐다. 이것이 가짜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눈으로 확인하는 좋은 기회였다.



    ‘주간동아’ 866호에서 필자가 가짜라고 밝혔던 강세황의 ‘방동현재산수도·계산심수도’부터 이야기해보자. 역시 한눈에 띄는 것은 ‘빨간색 물감을 물에 타서 붓으로 그린 도장’이었다. 그려진 ‘첨재( 齋)’ ‘광지(光之)’ 도장에 붓의 흔적 및 붓이 멈춘 부분에 물감 뭉침이 분명했다. 이는 우리나라의 가짜나 원작을 베낀 부본(副本)에서 나타나는 경우로 원작이 아니다.

    강세황은 시서화인(詩書畵印)에 능했고 창작 법도를 잘 알았다. 그는 전각 칼 쓰는 법을 잘 알았을 뿐 아니라, 중국 한나라와 위나라의 법식으로 도장을 새겼다. 화려하게 도장이 많은 것보다 고상하면서도 속되지 않게 새겨진 2~3개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의 아들 강빈(1745~1808)은 강세황의 ‘낙관이 없는 작품’이 중국 사람에게 고가에 팔렸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서화작품에 낙관을 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는 말이다. 이렇듯 낙관이 없는 그의 작품은 있을지언정 도장을 그려 넣은 것은 있을 리 만무하다.

    강세황의 ‘송도기행첩’도 2003년 서울 예술의전당 ‘표암 강세황의 시서화평’전에 이어 이번 전시에서 보게 됐다. 필자는 2008년 ‘진상 : 미술품 진위 감정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강세황의 ‘송도기행첩’ 가운데 ‘박연’(그림1)이 백색 안료로 신중국산 연분을 쓴 가짜임을 밝혔다. ‘주간동아’ 874호에서는 색깔이 변치 않는 백색인 ‘고려 연분’과 시간이 지나면 검게 변하는 백색인 ‘1850~1940년대 유행했던 신중국산 연분’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위조자는 ‘박연’ 그림에서 햇빛에 반사된 폭포의 시작 부분과 폭포물이 떨어져 하얗게 거품이 이는 부분에 신중국산 연분을 썼다. 무엇보다 새하얀 색감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릴 때 몇 종류의 백색 안료를 함께 쓰면서 특별히 새하얀 색감을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 연분을 썼다.

    강세황의 가짜 ‘송도기행첩’은 그동안 한국미술사에서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은 실경산수화로 주목받았다. 실제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은 강세황의 실경산수화로는 ‘남산과 삼각산’(그림2)이 있다. 이는 중국화가 황빈홍(1865~1955)의 말년 산수화와 비슷한 스타일로 180년쯤 앞섰다.

    전시장 입구에는 강세황의 70세 ‘자화상’(그림3)과 이명기(1756~?)의 ‘강세황 초상’(그림4)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림3’ ‘그림4’는 1782년과 1783년에 그린 것으로, 조선시대 최고 수준의 초상화다. 얼굴 부위 고저에 따른 입체감, 피부 질감을 살린 살결 묘사, 몸 자세에 따른 의복의 입체적 표현 등이 혈기왕성한 직업화가의 작품임을 웅변한다.

    필자는 ‘주간동아’ 886호에서 ‘그림3’을 김홍도(1745~?)가 강세황의 뜻에 따라 대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림3’은 당시 화단의 최고 화가로 손꼽혔던 38세 김홍도, ‘그림4’는 당시 독보적 초상화가로 이름을 떨쳤던 28세 이명기의 그림이다. ‘그림3’을 자세히 보면, 노랗게 쇠한 수염 끝부분까지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묘사했다. 금니(금물)로 장식한 다홍색 허리띠는 이 작품과 함께 전시된 ‘정경순 초상’의 허리띠보다 훨씬 정교하고 입체적이다. 늙고 병든 70세 문인화가가 높은 관직에 앉아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가짜에 빛 바랜 ‘표암 강세황’ 예술혼

    3 김홍도가 그린 ‘강세황 70세 자화상’. 4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 71세 초상’. 5 한종유의 가짜 ‘강세황 69세 초상’. 6 강세황이 신축(辛丑)년에 쓴 ‘간찰’. 7 ‘그림5’와 ‘그림6’의 강세황 글씨 비교.

    부채에 쓰인 가짜 글씨

    부채에 그려진 ‘강세황 69세 초상’(그림5)도 전시에 나왔다. 부채에 쓴 강세황의 글에 의하면, 이 그림은 1781년 음력 9월 11일(양력 10월 27일) 강세황의 부탁으로 정조 임금 초상화의 주관화사 한종유(1737~?)가 부채에 그린 것이다. 하지만 강세황의 글씨는 가짜다. 같은 신축(辛丑)년 음력 11월 26일 강세황이 쓴 ‘간찰’(그림6)과 비교하면 연월일의 글자부터 다르다(그림7).

    강세황의 글은 이 그림이 자신과 “상당히 비슷하다”며 손자 강이대(1761~1834)에게 준다고 썼다. 하지만 초상화 수준이 하나하나 엄밀하게 따지는 강세황의 성격에서 크게 어긋난다. 특히 귀밑머리나 수염 처리에서 필선 두께나 먹의 농담 등을 조절하지 못한 것을 보면 후대 아마추어의 솜씨다.

    ‘그림5’를 그린 음력 9월 11일(양력 10월 27일)은 24절기 가운데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霜降)과 겨울이 시작되는 입동(立冬) 사이다. 이때 감독관인 강세황이 임금 초상화를 그리는 일로 바빴던 주관화사가 짬을 내어 부채에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손자에게 줬다. 이 글이 사실이라면, 1782년 겨울 그가 손자 장희(長喜)에게 그려준 ‘약즙산수’처럼 “훗날 당시 정황을 생각하게 할” 뭔가를 부채에 더 기록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감정가는 ‘말이 많으면 손해’라고 배운다. 감정가는 남의 말을 다 듣고 마지막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결론만 내면 된다. 나서서 떠들면 자칫 실수하고 자신만의 값진 노하우로 오히려 미움만 산다. 감정가도 사람인지라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첫째는 자신이 잘못 감정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고, 둘째는 올바른 감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 고의로 이를 부정할 때다. 첫째는 논문이나 책에서 이를 밝히고 고치면 되지만, 둘째는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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