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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 이형석의 영화 읽기

뉴욕의 영웅도 악당도 더 독해졌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다크 나이트 라이즈’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뉴욕의 영웅도 악당도 더 독해졌어

뉴욕의 영웅도 악당도 더 독해졌어
영웅이 필요한 시대일까. 당신 안에 있는 악마에게 물어보라. 영웅이 존재하는 근거는 선이 아니라 악이다. 배트맨 시리즈 ‘다크 나이트’에서 절대악의 화신인 조커(히스 레저 분)는 고담 시의 수호자 배트맨(크리스천 베일 분)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보기엔 너도 괴물이야! 나처럼. 난 널 죽이지 않아. 넌 날 완성하거든.”

미국 대중문화 속 ‘슈퍼히어로’의 역사는 그에 대적하는 ‘슈퍼빌런(super-villain·악당)’의 계보와 함께했다. 렉스 루더와 브레이니악, 둠스데이, 다크사이드로 이어지는 인류 공적의 족보는 슈퍼맨의 역사와 함께하며, 벌처와 닥터 옥토퍼스, 샌드맨, 리저드, 일렉트로, 그린 고블린, 베놈 등의 괴물 악한은 스파이더맨의 탄생과 성장을 주시했다.

배트맨의 적들은 배트맨만큼이나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조커가 말했듯 배트맨과 그 적들은 서로에게 ‘거울상’이자 대립쌍이다. 빛과 어둠, 선과 악으로 편이 갈렸을 뿐 서로에 대한 파괴 의지와 폭력 본성은 근원적으로 같다. 조커와 펭귄, 투페이스, 리들러, 미스터 프리즈, 포이즌 아이비, 라스 알굴 등은 고담 시를 악의 힘으로 집어삼키려 했고, 배트맨은 그것을 막았다.

뉴욕의 영웅도 악당도 더 독해졌어
“고통 속에 살게 할 것이다”



박쥐인간 배트맨이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The Dark Knight Rises)’로 돌아왔다. 미국 영화계에서 천재 감독으로 꼽히는 크리스토퍼 놀런이 메가폰을 잡은 세 번째 배트맨 시리즈다.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에 이은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이번에도 역시 악이 먼저고 선이 나중이며, 악당이 앞서고 영웅이 뒤따른다. 전편 ‘다크 나이트’가 조커를 통해 마치 자웅동체 같은 빛과 어둠, 선과 악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이른바 ‘희망 고문’에 대한 묵시록을 제시한다. 이번에도 악당은 자기 손아귀에 든 배트맨의 숨통을 한번에 끊지 않는다. “왜 날 죽이지 않는 거지?” 배트맨의 물음에 상대가 답한다.

“넌 죽음을 바라고 있어. 죽음을 반기지. 난 너를 죽이지 않고 고통 속에 있게 할 거야. 내가 지옥 같은 감옥에 있을 때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아? 위로 보이는 바깥세상,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지. 너는 이제 고담 시민들이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서로를 살육하게 되는 걸 지켜보게 될 거야.”

배트맨과 고담 시는 희망을 본다. 동시에 악마를 보게 된다.

요절한 배우 히스 레저의 명연기와 함께 당대 최고의 걸작으로 호평받은 ‘다크 나이트’에 이어 이번 작품도 뛰어난 영상미와 탁월한 스토리텔링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3000억 원에 이르는 제작비 규모도 놀랍지만, 그 위용에 필적하는 방대한 이야기의 빈틈없는 구성과 긴장감 넘치는 전개 또한 최근 블록버스터 중에서도 보기 드문 성취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 탄산음료 같고 ‘어벤져스’가 달콤한 카페라테 같다면,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묵직한 에스프레소나 식도를 화끈하게 하는 보드카다.

고담 시의 수호자였던 하비 덴트 검사가 죽은 지 8년 후. 이제 조커도 없고 배트맨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동안 고담 시장은 ‘덴트 특별법’을 선포해 1000명 이상의 범죄자를 감옥에 잡아들였고, 도시를 범죄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얼굴에 마스크를 쓴 잔인한 악당 베인(톰 하디 분)이 나타나면서 도시는 또다시 혼돈과 공포에 휩싸인다. 베인은 핵물리학 박사인 파벨을 납치하고 증권거래소를 습격한다.

비극적 개인사를 가진 인물들

뉴욕의 영웅도 악당도 더 독해졌어
한편 브루스 웨인(크리스천 베일 분)은 더는 배트슈트(배트맨 의상)를 입고 악을 처단하기 위해 출동하지 않는다. 화학회사 최고경영자(CEO)이자 억만장자가 되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얼굴에 흉터가 생겼다는 둥 갖은 소문에도 두문분출한 지 8년. 그는 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몸이 망가진 상태다. 하지만 새로운 악당이 출현하자 다시 배트슈트를 집어든다.

러닝타임 2시간 44분 동안 영화는 ‘차이니즈 박스’처럼 끝없이 이야기의 비밀상자들을 열어간다. 최후의 판도라 상자에서 관객은 허를 찔린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 거기에 들어 있다.

베인은 마치 ‘양들의 침묵’에서 가면을 쓴 앤서니 홉킨스의 소름 끼치도록 잔혹하고 냉정한 얼굴에 거대한 근육질의 몸매를 붙여놓은 것 같은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와 함께 새로운 얼굴도 대거 등장한다. 웨인의 핵에너지 개발 사업을 후원하는 여성 거부 미란다 테이트(마리옹 코티야르 분), 천재 도둑 ‘캣우먼’ 샐리나 카일(앤 해서웨이 분), 불행한 어린 시절을 딛고 경찰이 된 블레이크(조지프 고든 레빗 분). 이들은 모두 비극적인 개인사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가졌으며 배트맨과 베인의 대결에 엉켜들면서 반전의 주인공이 된다.

비행기로 비행기를 납치해 떨어뜨리는 첫 장면은 놀런 감독의 전작 ‘인셉션’을 능가하는 볼거리다. 원더브라(브래지어 브랜드)의 유명한 카피를 인용하자면 ‘뉴턴은 틀렸다’는 문구가 떠오를 정도로 ‘중력에 반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베인과 배트맨의 육탄 격투전이나 대규모 총격전은 박진감이 넘친다. 슈퍼히어로 시리즈답게 배트슈트, 배트모빌(특수차), 배트포드(오토바이) 등 신무기들도 눈길을 끈다. 아이맥스로 제작한 2D영화지만, 3D는 장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정도의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다크 나이트’는 황폐한 그라운드 제로, ‘포스트 9·11의 뉴욕’ 이미지를 투영하며 절대악의 묵시록을 썼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어둠과 폐허 위에 다시 일어선 영웅을 통해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미국의 현대적 ‘신화’를 재건했다.



주간동아 847호 (p66~67)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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