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4

2011.11.28

8년 우여곡절 육탄戰 최루탄 가스 맡으며 탕탕탕

한미 FTA 협상 추진에서 비준까지 대한민국 정치 자화상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1-11-28 10: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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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이 11월 22일 국회를 통과했다. 비준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국회에 ‘해머’와 ‘전기톱’이 등장했고, 급기야 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이 터지는 초유의 사건까지 벌어졌다. 협상 개시에서부터 국회 비준까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던 한미 FTA가 걸어온 험로를 되짚어본다.

    노 대통령, ‘FTA 추진 로드맵’ 마련

    한미 FTA의 시작은 노무현 대통령 취임 초였던 2003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는 중·장기 과제로 미국 등 거대 경제권과 FTA를 추진하려고 ‘FTA 추진 로드맵’을 마련했다.

    “한미 FTA 본질은 경제협정이다. 한국과 미국이 서로의 수입관세를 철폐하고 투자 제한을 완화하며 서비스 시장을 선택적으로 개방하는 양국 간 약속이다.”(‘기로에 선 한미 FTA 해법’/ 최병일/ 중앙북스/ 2009)

    한미 양국은 2005년에 세 차례 사전 실무점검 회의와 몇 번의 통상장관 회담을 열었다. 이어 2006년 1월 18일 노 대통령이 신년연설에서 한미 FTA 협상 의지를 표명했고, 보름 뒤인 2월 3일 한미 FTA 추진을 공식발표했다.



    공식협상은 6월 5일부터 9일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처음 있었다. 협상 과정은 ‘굴욕, 대미 종속 협상’이라는 거센 반발에 부닥쳐 처음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모두 여덟 차례 공식협상을 벌였고, 고위급 협상과 통상장관 회담을 거쳐 2007년 4월 2일 한미 FTA 협상을 타결했다.

    협상 타결 직후 노 대통령은 대국민 특별담화문에서 “지난날 개방 때마다 많은 반대와 우려가 있었지만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며 “힘과 지혜를 모아 다시 한번 성공의 역사를 만들어내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협상 타결 직후 미국은 추가협상을 요구했다. 미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의 요구를 수용해 미 정부가 노동과 환경 등 일부 분야의 수정을 요구해온 것. 결국 ‘이익의 균형을 맞춘다’는 원칙 아래 서울과 워싱턴에서 각각 한 차례씩 추가협상을 했고, 2007년 6월 30일 협정문에 서명했다.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은 서명 이후 두 달이 조금 지난 그해 9월 7일 17대 국회에 제출됐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이하 대선)를 앞둔 미묘한 시점에 제출된 비준안은 해당 상임위원회(이하 상임위)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비준안이 17대 국회에서 잠자는 사이 대선이 치러졌고, 이명박 후보가 당선했다.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진 이후 한미 FTA 비준 동의안에 대한 여야 입장은 정반대로 바뀌었고, 이후 ‘경제협정’ 한미 FTA는 정쟁 도구로 전락했다.

    2008년 5월 13일 국회에서는 한미 FTA 청문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날 회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아침 회의를 시작하기 무섭게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외교통상부 장관 증인 채택 여부로 논란을 거듭했다. 증인 선서를 시작으로 한미 FTA 협상 결과에 대한 평가와 효과를 조목조목 따지는 날카로운 질문과 전문가적인 답변을 기대한 나로서는 맥 빠지는 일이었다.”(‘기로에 선 한미 FTA 해법’ 중에서)

    한미 FTA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17대 국회는 특별위원회까지 가동해 협상 의제와 준비, 결과에 대해 상세히 보고받았다. 이뿐 아니라 문제점에 대한 질의와 대책도 꾸준히 요구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뒤 17대 국회는 미국산 쇠고기 파동 뒤에 숨어 비준안 처리를 늦췄고, 정부는 18대 국회 출범 이후인 2008년 10월 8일 다시 비준안을 국회에 제출해야 했다. 이후 국회는 비준안 처리를 둘러싸고 ‘막장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폭력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해머, 전기톱 부른 상임위 상정

    8년 우여곡절 육탄戰 최루탄 가스 맡으며 탕탕탕
    2008년 12월 18일,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이하 외통위)에 비준안을 상정하는 과정에서 해머와 전기톱이 등장했다. 한나라당 소속 외통위원들만 회의장에 입장해 단독 상정하는 과정에서 회의장 진입을 시도한 야당 외통위원이 해머와 전기톱을 이용해 닫힌 출입문을 열려 했던 것.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은 한나라당 외통위원들만 출석한 채 상임위에 상정됐다. 한바탕 홍역을 치르며 외통위에 상정된 비준 동의안은 넉 달이 지난 2009년 4월 22일 상임위를 통과했다.

    그러나 2008년 11월 미 대선에서 당선한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한미 FTA는 새 고비를 맞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미 FTA 재협상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 2010년 11월 30일부터 12월 3일까지 미 메릴랜드 주 컬럼비아에서 한미 FTA 통상장관 회담이 열렸고, 12월 3일 추가협상이 타결됐다.

    이에 따라 올해 5월 4일 외통위를 통과한 기존 비준 동의안은 철회되고 말았다. 오바마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대한민국 국회의원은 엉뚱한 곳에 힘쓴 꼴이 됐다. 그 대신 6월 3일 추가협상을 통해 작성한 새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올 들어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빨리 처리됐다. 10월 3일 미 의회에 제출된 한미 FTA 이행법안은 이틀 뒤인 10월 5일 하원 상임위, 그리고 엿새 뒤인 11일에는 상원 상임위까지 통과했다. 그리고 10월 12일 미 상하원 본회의를 통과했다.

    미국의 빠른 처리에 화답이라도 하려는 듯 우리 국회도 한미 FTA 비준 동의안 처리에 가속도를 냈다. 9월 16일 외통위를 통과했고, 두 달이 조금 지난 11월 22일에는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했다.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은 추가협상을 타결한 지 355일 만에, 미국 본회의를 통과한 지 41일 만에 모든 비준 절차를 마쳤다.

    그러나 비준안 처리 과정에 기존 정치권이 실망스러운 행태를 보임으로써 정치 불신을 심화시켰다. 대화와 타협이 살아 숨 쉬어야 할 민의의 전당 국회가 진흙탕 개 싸움 장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어느 쪽도 승리자라 보기 힘든 이유다. 때마침 한미 FTA가 한국 경제에 몰고 올 변화 바람 못지않은 거대한 태풍이 몰려오는 중이어서 정치권은 긴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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