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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가을을 걷다 - 강길·들길·옛길 03

선운사길 가본 적이 있나요 보은염 사연 그곳 말이에요

고창 선운사길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선운사길 가본 적이 있나요 보은염 사연 그곳 말이에요

선운사길 가본 적이 있나요 보은염 사연 그곳 말이에요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최영미,‘선운사에서’ 중에서)

야속하다. 가을이 이만큼 왔다고 생각한 순간 벌써 뒷모습이다. 안타까워하는 시간도 아까운 10월 마지막 주, 화려한 꽃무릇이 사그라진 전북 고창 선운사길에서 가을의 뒷모습을 좇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문화생태 탐방로 ‘고인돌·질마재 따라 100리길’의 4코스와 겹치는 선운사길은 보은길 또는 소금길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다.



백제 위덕왕 24년(578)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하던 당시, 검단선사는 선운산 주변에 들끓던 산적과 해적에게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 도적질을 그만두게 했다. 양민이 된 그들은 고마운 마음을 담아 해마다 봄, 가을 두 차례 검단선사에게 보은염(報恩鹽)을 보냈는데 그때 소금을 운반했던 길이 바로 이 길이라는 이야기다. 이 길은 크게 보자면 선운사 골짜기를 가로질러 도솔암, 용문굴, 소리재, 참당암을 지나고 선운산 능선을 넘어 심원면 하전마을 바닷가로 내려선다.

국내 최대 폭죽처럼 터지는 꽃무릇 군락지

길은 고창 아산면 삼인리 선운사 앞 연기교에서 시작한다. 연기교에서 선운사 방향으로 20분가량 걸어가면 선운산관광안내소에 닿는다. 차로 이동하면 이곳에 주차하고 걷기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안내소에서 이정표를 따라 선운사 쪽으로 걷다 보면 개울 건너편 절벽을 뒤덮은 천연기념물 제367호 송악을 발견할 수 있다. 줄기를 부챗살처럼 펴서 절벽을 타고 올라가는 송악은 그 자체로도 웅장하다.

선운사 터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본래는 이곳이 커다란 연못이어서 검단선사가 절을 세우고자 못에 돌을 채우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마을엔 눈병이 돌았다는 것. 그런데 눈병 걸린 사람들이 이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씻은 듯이 나아 이를 신기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와 못에 던지는 바람에 그 큰 못을 메워 마침내 선운사를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선운사 마당 위로 하얀 구름이 실타래처럼 펼쳐졌다. 마당에 곧게 뻗어 선 감나무가 고고했다.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향하는 등산로와 계곡 주변은 국내 최대의 꽃무릇 군락지다. 붉은 줄기가 묶인 모양의 꽃은 화려한 폭죽을 연상케 한다. 꽃무릇은 매년 9월 중순 붉은 꽃을 피운다. 꽃이 진 후에는 진녹색의 잎이 나와 이듬해 5월 사라진다. 잎이 진 뒤 꽃이 피고, 꽃이 진 뒤 잎이 나서 잎과 꽃이 영원히 만나지 못해 서로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상사화(相思花)라 불린다. 이미 꽃은 지고 푸른 잎사귀만 가득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길을 재촉했다.

참새 혀처럼 작은 작설차밭을 가로질러

간단한 다과를 파는 도솔제쉼터에 다다르면 선운산 등반이 시작된다. 쉼터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길을 따라갔다. 경사가 거의 없이 잘 다듬어진 흙길에 중간중간 벤치도 있어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다.

15분 정도 걸으면 갈라진 삼거리를 만난다. 왼쪽으로 가면 도솔암(1.2km), 오른쪽으로 가면 참당암(0.7km)이다. 보물 제1200호 도솔암 마애불을 보기 위해서는 도솔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길목에서는 추정 나이 600세가 넘은 커다란 반송(盤松)과 진흥왕의 수도처였다는 진흥굴을 볼 수 있다.

차향 가득한 도솔암찻집을 지나면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나타난다. 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부처인 도솔산 마애불은 고려 초에 유행한 거불 형식을 보여준다. 빼쭉한 눈매와 편편한 볼, 도톰한 코와 입술이 친근하다. 선명한 두 손과 얼굴 생김에 800년이라는 세월이 새삼스럽다.

왔던 길을 되돌아 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참당암으로 향한다. 길을 걷다 보면 소리재(1.0km), 포갠바위(0.7km)를 알려주는 이정표를 만나는데, 참당암으로 가려면 포갠바위 쪽으로 가야 한다. 참당암은 선운사에 속한 암자 가운데 하나로 죄를 뉘우치고 참회한다는 뜻. 스님들이 공부하고 생활하는 곳이라 소란을 떨어서는 안 된다. 이곳엔 다음 이정표가 없으니 주의해야 한다. 대웅전을 등진 채 직진하다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야 한다. 높은 감나무와 차밭이 펼쳐진 곳을 찾으면 쉽다.

고창의 3대 명물은 무엇일까? 장어, 복분자, 나머지 하나는 떠올리기 힘들 것이다. 답은 작설차(雀舌茶), 즉 참새의 혀만큼 작은 찻잎으로 끓이는 차다. 작설차는 ‘동의보감’에서도 “맛이 달고 쓰며 독은 없다. 기를 내리게 하고 소화를 돕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며 효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0월 말은 작설차를 따기에 이미 늦은 계절. 상품성이 없는 키 큰 찻잎 나무만 관리가 안 된 채 널브러져 있다.

선운사길 가본 적이 있나요 보은염 사연 그곳 말이에요

1 연천마을에서 바라본 전경. 산 너머 바다 향기가 느껴진다. 2 선문사 옆 오솔길. 어린 아이도 걷기 좋다.

서해를 왼팔에 끼고 걷는 하산길

강아지풀 가득한 들판을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선운산 등정이 시작된다. 길은 한 곳으로만 뻗어 있기 때문에 헤맬 걱정은 없다. 능선 따라 천천히 선운산을 올랐다. 산길이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다. 적당히 땀을 흘리며 30분가량 걸었을까. 산비탈 따라 기울어 자란 소나무에 부딪힌 바람이 쏴아 시원한 소리를 냈다. 수리봉을 지나 삼거리에서 오른쪽 마이재 방향 길로 틀어 조금만 더 올라가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봉우리가 나타났다. 붉은 태양이 바위 위로 쏟아졌다. 가을 옷으로 갈아입는 이웃 산들, 산 아래 고요한 마을, 저 멀리 푸른 바다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하산길, 눈앞에 펼쳐진 서해와 벗하니 힘든 줄 몰랐다. 마이재에서 심원(2.5km) 표지를 따라 아랫길로 갔다. 시원한 바람 가득 느끼며 30분가량 내려오니 흙길은 끝나고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펼쳐졌다. 속이 꽉 찬 양배추들이 수확만 기다리는 밭, 아담한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골마을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내려온 방향에서 오른쪽 길로 걸어가니 심원면 연천마을에 다다랐다.

다시 길을 따라 한참 걸으면 커다란 소나무와 ‘검단소금전시관’(3.0km)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만난다. 표지판대로 다시 포장도로를 걸으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2차선 찻길이 나오는데, 이 길 왼쪽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1일 10회가량 선운사행 시내버스가 있으므로, 이곳에서 길을 마치고 버스를 타기도 한다. 하지만 바다가 아쉬운 이들은 찻길을 건너 오른쪽으로 걸어야 한다.

왼쪽에 바다를 두고 걸으면 월산리 사등마을에 닿는다. 최초의 판소리 여류 명창 진채선(1842~?)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신재효 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대원군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진채선. 하지만 생가에는 자취도 없이 초라한 팻말 하나만 덜렁 걸려 있다.

바다 쪽으로 더 가면 길의 끝, 검단소금전시관에 닿는다. 마을의 이름인 사등(沙登)도 ‘바닷모래가 쌓여 등성이를 이룬다’는 뜻일 정도로 이곳은 자염(煮鹽)으로 유명하다. 자염이란 남해안이나 서해안의 갯벌 흙에서 바닷물을 걸러 가마솥에 넣고 졸여 만든 우리나라 전통 소금을 가리킨다. 현재 전시관 건물 옆에 소금 굽는 벌막을 복원, 화염 만드는 법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검단소금전시관 전망대에 올랐다. 황금빛 노을이 내려앉는 가을바다를 한참 넋 놓고 바라보며 겨우내 꺼내볼 가을의 조각을 차곡차곡 가슴에 담았다.

선운사길 가본 적이 있나요 보은염 사연 그곳 말이에요
Tip.

4시간 30분, 총 12.7km.

☞ 교통

승용차 |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산IC에서 15km, 고창IC에서 18km, 선운산 도립공원

대중교통 |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고창 고속버스 1일 16회 운행

문의 | 고창문화원 063-564-2340, 010-8869-3701, 010-5650-6145



주간동아 2010.11.01 760호 (p24~26)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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