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9

2010.10.25

막 사먹는 고춧가루, 누구냐 너?

고추

  • 황교익 blog.naver.com/foodi2

    입력2010-10-25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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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사먹는 고춧가루, 누구냐 너?

    한 농가에서 심은 두 품종의 고추다. 왼쪽은 ‘무한질주’로 안 매운 품종이고, 오른쪽은 ‘금강석’으로 매운 품종이다. 농민은 이 둘을 섞은 고춧가루가 맛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추는 ‘캐시컴 아늄(Capsicum annuum)’이라 부르는 식물로 중남미가 원산지다.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의 손에 의해 전 세계에 번졌다. 환경 적응력이 뛰어난 고추는 이식지에 따라 다양한 모양과 맛을 내는 식물로 변형됐다. 그 열매가 손톱만 한 것과 호박만 한 것, 매워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과 매운맛이 전혀 없는 것도 있다. 고추 품종은 실로 다양해 헤아릴 수가 없다. 자연발생적인 품종의 분화도 있었겠지만 각 지역의 원예 연구자들이 그 지역민의 입맛에 맞는 품종을 개발해 보급한 결과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고추는 크게 풋고추용 고추, 고춧가루(홍고추)용 고추, 단고추(파프리카와 피망), 꽈리고추로 나뉜다. 고추 맛을 결정하는 데는 재배지의 환경 외에 품종이 크게 작용한다. 고추 품종마다 매운맛과 단맛에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품종이 워낙 다양해 각각의 특징을 일일이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국내에서 재배하는 품종은 1000종이 넘는다. 종묘회사들은 매년 새로운 품종을 시장에 내놓는다. 산지에 가보면 한 마을에서도 집집이 다 다른 품종을 심는다. 심지어 같은 밭에서 여러 품종을 재배하기도 한다. 품종이 많다 보니 나이가 든 농민은 자신이 심은 고추가 어떤 품종인지도 모른다. 또 고춧가루 가공공장에서도 품종 구별 없이 수매하므로 소비자는 어떤 품종을 먹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고추 품종이 이처럼 난립하게 된 이유는 1990년대 들어 국내 종묘회사 대부분이 외국계 회사에 병합되면서 퇴사한 육종 전문가가 너도나도 육종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고추의 육종이 다양하게 시도되는 것이 나쁘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재배되는 품종이 이렇게 많아서는 농가나 소비자나 혼란스럽다. 지금의 사정으로는 내 입에 맞는 고추를 하나 찾았다 하더라도 그 고추를 시장에서 다시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

    이 다양한 고추의 품종 중 딱 하나, 농가도 알고 소비자도 아는 품종이 있다. 바로 청양고추다. 청양고추는 풋고추로 온갖 음식에 들어가며 고춧가루로도 많이 쓰인다. 강렬한 매운맛에 이어 나는 약간의 단맛이 입맛을 돋우어 매운맛을 즐기는 한국인에게 더없이 훌륭한 식재료로 각광받고 있다.



    그런데 이 청양고추가 청양군에서 유래한 품종이며 청양군에서 유독 많이 재배하는 고추인 것으로 일반에게 알려지면서, 한편에서는 청양이라는 명칭이 또 다른 지명인 ‘청송’과 ‘영양’에서 한 자씩 따와 만들어진 조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해 혼란이 있다.

    청양군이나 청양고추 재배 농민들로선 청양고추가 청양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면 마케팅에 큰 도움이 될 법도 하다. 하지만 청양의 일부 고추 재배 농민은 “청양고추의 유명성이 여타 품종의 청양 고추에 전이돼 청양의 모든 고추가 맵다는 잘못된 인식을 퍼뜨릴 수 있어 그다지 반길 일은 아니다”라 말한다.

    청양고추는 고추 육종가 유일웅 씨가 제주산 고추와 태국산 고추를 잡종교배해 얻은 품종으로 알려져 있다. 또 청양고추 최대 생산지는 경남 밀양이다.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주장하는 바가 서로 달라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정도로 알면 될 것이다. 하여간 정작 청양에 청양고추가 그렇게 많이 재배되는 것은 아니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시장에 고춧가루용 건고추가 깔리고 있다. 소비자들은 산지와 품종을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니 그 맛이 어떤지 온갖 감각을 동원해 판별한다. 복불복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맛의 근원이라는 고추가 이래서 될 일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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