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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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美 7공군 사령관들 “케이시, 송탄 마피아 그립다”

오산AB ‘살아 있는 역사’ 이경추 씨 … 미군과 민간인 가교 ‘명예 주임원사’

  • 주성민 군사전문 자유기고가 bluejays@kebi.com

    입력2010-07-26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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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美 7공군 사령관들 “케이시, 송탄 마피아 그립다”

    이경추 씨는 미군 장교들 사이에서 ‘케이시’라 불리며 40년간 오랜 우정을 쌓았다. 친분이 두터웠던 역대 미7공군 사령관들의 사진을 가리키는 이경추 씨.

    오산 에어베이스(Air Base·이하 AB)를 빠져나온 미국인이 길 건너 양복점에 들어서며 소리쳤다.

    “케이시, 존슨탕 먹으러 가자.”

    그는 미 공군의 51전투비행단을 지휘하는 배리 하워드 대령이다.

    “부대찌개를 또 먹으러 가?”

    케이시라고 불린 한국 남자가 웃으며 대꾸했다. 대령은 1970년대 후반 오산AB에 4개월을 주둔하면서 그와 친해졌다. 케이시와 가까워진 대령은 그를 통해 또 하나의 세계를 체험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 ‘부대찌개’를 맛본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총격으로 사망하자 미 공군지휘부는 하워드에게 한국 파견근무를 명령했고, 그는 2대의 공중경보관제기로 구성된 에이웍스(AWACS) 대대를 이끌고 한국에 왔다.

    존슨탕과 소주 놓고 날마다 파티

    당시는 국가적인 비상사태였다. 따라서 공중경보관제기는 전략적으로 꼭 필요한 무기체계였다. 에이웍스가 공중에 떠 있으면 한반도 북쪽 끝까지 모든 항공기의 이착륙을 레이더로 추적할 수 있을뿐더러 적기가 군사분계선에 접근하면 즉시 아군기를 유도해 먼저 해치워야 할 적부터 요격시킬 수 있었다.

    4개월 후 미국으로 돌아간 하워드는 일본의 미 5공군 비행단장으로 부임했다. 부대찌개 곁으로 가까이 온 셈이다. 일본에서 그는 한국으로 전출을 시도했으나 비행단이 작전준비검열에 불합격돼 희망이 좌절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공군의 연줄을 모조리 동원했다. 그 결과 집념을 불태우며 51전투비행단의 단장이 됐고, 그의 표현대로 ‘꿈에도 그리던’ 오산AB로 귀환했다.

    하워드는 반은 한국인이라고 자처할 만큼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부대찌개를 가장 즐겼다. 그는 퇴근하면 바로 골프장으로 가 한참 아이언을 휘두른 뒤 저녁시간이 가까워 허기가 지면 일행과 서둘러 ‘최네 집’으로 직행했다. 이 집은 부대찌개 하나로 송탄에서 이름난 식당이다.

    비행단장 하워드 대령은 저녁마다 20여 명의 미군과 한국인을 최네 집으로 집합시켜 부대찌개와 소주로 파티를 열었다. 날마다 최네 집에서 소주파티를 벌이던 이들은 ‘송탄 마피아’로 불렸다. 오산AB 중장비시설대 대대장인 해리 글래이지 대령도 송탄 마피아에 합류하고 싶어 종종 최네 집을 찾아왔다. 미군과 한국인이 뒤섞인 마피아의 우정은 더없이 각별했다.

    하워드 대령은 한국을 좋아했고, 한국인과 매우 친했고, 대중목욕탕을 즐겨 갈 만큼 한국문화를 사랑했다. 한국 근무가 끝난 뒤 필리핀 클라크AB의 3공군 부사령관으로 간 그는 이제 전역했지만 오산AB에서 근무하던 때를 추억하며 옛 친구에게 이따금 e메일을 보낸다.

    “케이시, 송탄 마피아 시절이 너무나 그립다.”

    주한미군의 타격력은 7공군에서 나온다. 오산AB의 51전투비행단과 군산AB의 8전투비행단이 타격력의 핵심이다. 태평양공군(PACAF) 산하 7공군은 타일랜드의 로열 타이AB에 주둔하며 베트남전쟁을 수행하던 부대다.

    1975년 4월 29일, 겨울도 아닌데 사이공 라디오 방송에서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흘러나왔다. 미국 정부의 비상탈출명령 옵션4가 발동됐다는 암호였다. 미군은 무기를 쌓아둔 채 철수했고 미 대사관이 폐쇄됐으며 미 중앙정보국(CIA)은 본부로 최후전문을 타전했다.

    “철수는 03시 45분까지 완료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접수했다. 이 무전기의 폭파를 위해 03시 20분, 비밀통신을 마친다. 이것은 사이공지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전문이다. 사이공, 송신 끝.”

    4월 30일, 미 대사관 옥상에서 마지막 미군 헬리콥터가 날아오르며 베트남전쟁은 끝났고, 할 일이 없어진 7공군은 6월 30일 해체됐다.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는 독자적인 미 공군사령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미 5공군 소속 314비행사단(314th Air Division)이 파견부대로 한국에 주둔해 있었다. 1986년 9월, 한국 방어를 주요 임무로 하는 7공군사령부가 오산AB에서 창설됐다. 해체됐던 7공군의 부활이었다.

    뉴 커머 오리엔테이션 교관

    7공군이 한국에서 제2기를 시작하는 날, 사령부 연병장에서 사진을 찍으며 지켜본 민간인이 있었다. 그와 7공군의 인연이 다시 시작됐다. 지난 24년간 그는 오산AB에서 살다시피 하며 민간과 부대의 모든 분쟁을 해결했고, 역대 12명의 7공군 사령관과 각별한 친분관계를 이어왔다. 그는 7공군의 ‘살아 있는 역사(Living History)’로 통한다. 이 때문에 7공군은 그를 ‘명예 주임원사(Chief Master Sergeant)’로 위촉해 칭호와 증명서를 전달했다. 미군에게 주임원사는 대단히 명예로운 계급이며 부대에서도 그에 따른 예우를 해준다.

    그의 이름은 이경추이지만 미군들은 케이시(Kasey)로 부른다. 그는 미국인보다 미국말을 더 잘한다. 그런 까닭에 미국에서 7공군으로 배치받아온 신참들은 그가 가르치는 ‘New Comer Orientation’을 받아야 했다.

    “이곳은 오산AB다. 하지만 오산이 아니라 송탄이다. 놀러 갔다가 택시 타고 오산 가자고 하면 안 된다. 그럼 택시를 또 타야 한다. 택시 타면 ‘송탄, 오산 에어베이스’라고 말해라.”

    사복 차림의 남녀 신참이 진지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다운타운의 상거래 관행도 교육했다.

    “여긴 ‘스몰 비즈니스’라 반품제도가 잘 시행 안 된다. 30달러 주고 가방을 샀는데 옆집 가니까 같은 걸 25달러에 판다고 다시 와 물러달라고 하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두 집 싸움시키는 일밖에 없다. 사기 전에 여러 집을 비교해보고 결정해라. 그래야 나중에 분쟁이 안 생긴다. 여긴 미국이 아니다. 다들 명심해라.”

    이렇게 그가 미군에게 뉴 커머 교육을 시킨 후부터 상거래분쟁이 전에 비해 10%로 줄었다.

    오산AB 기지사령관이던 밥 스몰렌 대령은 케이시와 형제처럼 지냈다. 기지사령관은 지역 주민과 친해져야 하는 직책이어서 케이시와 자주 만나며 속을 터놓는 사이가 됐다. 그때부터 대령은 케이시와 미군 헌병대 통역관이던 K씨와 어울려 밥 먹고 술 마시고 여행을 다녔다.

    대령은 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한번은 케이시의 가게에 왔다가 그가 바삐 움직이자 구석에 앉아 있다 책상을 뒤져 뭔가를 가위로 잘랐다. 담배 한 갑을 모두 두 동강을 낸 그가 말했다.

    역대 美 7공군 사령관들 “케이시, 송탄 마피아 그립다”

    1 자신의 사진에 ‘우리가 남이냐’라는 글씨를 그려 보낸 밥 스몰렌 대령. 2 7공군 4대 사령관을 지낸 로널드 포글먼 중장. 사진은 공군참모총장 시절의 모습. 3 부대찌개를 좋아했던 배리 하워드 대령.



    역대 美 7공군 사령관들 “케이시, 송탄 마피아 그립다”

    이경추 씨가 운영하는 송탄 시내 ‘케이씨 양복점’

    “해로우니까 담배 끊어.”

    다음 날 대령이 방문하자 케이시는 반토막짜리 담배를 피워 물고 멋쩍게 웃었다. 대령은 케이시가 바빠진 틈을 타 새 담배를 찾아내 세 토막으로 잘랐다.

    “케이시, 이젠 못 피울 테지.”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오산AB는 정문인 메인게이트가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 통행에 문제가 많았다. 넓은 길이 부대 앞에서 좁아져 차량 흐름이 나빴다.

    “스몰렌, 해결 좀 해봐. 문제가 심각하다.”

    케이시의 말에 대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나도 안다. 하지만 상급기관까지 절차 밟아 해결하려면 2년은 걸린다. 내가 시장에게 전화해볼까?”

    대령이 시장에게 전화하자 바로 협력하자는 OK 사인이 나왔다. 시에서도 해결하려고 골머리를 앓아왔으나 미군 부대와 접촉이 안 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지사령관인 대령은 메인게이트를 뒤로 빼기로 하고, 시장은 그 공사비용을 부담하기로 했다. 메인게이트가 뒤로 물러나 새로 지어지자 도로 폭이 넓어져 병목현상은 사라졌다.

    전역 이후에도 “우리가 남이냐”

    한국인이 정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령은 한국 패거리와 더 가까워져 서로의 가족과도 속 편한 사이가 됐다. 대령의 아내는 한국 아줌마들만큼 정이 많았다. 손님이 집에 가면 먹을 것을 차려 내오고, 조금이라도 더 챙겨 먹이려고 안달했다. 그런 정경에 사람들은 “미국인 중에도 저런 사람이 있구나” 하고 놀랐다. 그들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었다. 그들 부부와 지역 한국인들의 만남은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스몰렌 대령은 장군으로 진급했고, 그 후 별을 두 개나 달고 볼링AFB의 워싱턴 지역사령관으로 근무하다 2007년 전역했다. 스몰렌은 케이시와 얼마나 친하게 지냈는지 지금도 사진이나 편지에 꼭 이렇게 ‘그려서’ 보내온다.

    “우리가 남이냐?”

    참모들과 회의를 하던 미 공군사령관이 친구가 지나가는 걸 보고 불렀다.

    “어이, 케이시!”

    그는 7공군 4대 사령관 로널드 포글먼 중장이다. 곁에 고급장교들이 앉아 있는데도 그는 친구더러 오라며 손짓했다.

    “왜 왔어, 뭘 도와줄까?”

    친구에게 다가간 케이시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말이지,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니 뭐니 해서 말들이 많아.”

    1992년 당시는 미국이 군비를 축소하던 시기였다. 훈련이 취소되고 미국에서 병력도 덜 날아오고 출장도 덜 왔다. 미군들이 덜 오는 만큼 송탄 지역 상권은 큰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80년대의 호황기에 비해 부대 주변 상인들은 장사가 힘들어졌고, 미군에게 돈을 못 쓰게 한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역대 美 7공군 사령관들 “케이시, 송탄 마피아 그립다”

    이경추 씨는 2003년 6월 주한미군 사령부로부터 양국 간의 유대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Good Neighbor’상을 받았다.

    “그래? 내가 가서 해명하지.”

    다음 날 상인 대표들이 모인 상공인 사무실에 정복 차림의 7공군사령관이 부관을 데리고 나타났다.

    “돈을 못 쓰게 한다고 안 쓸 사람들입니까?”

    그는 루머가 사실이 아님을 설명했고, 대화의 통로가 열리자 상인들의 오해는 풀렸다. 공군사령관이 뭐가 아쉬워 직접 나와서 해명을 했을까. 친구인 케이시가 상공인 회장이라 그랬을 수 있지만, 주둔부대는 지역 주민과 유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그 정도 봉사는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포글먼 중장이 케이시를 처음 만난 건 소장 때였다. 국방부인 펜타곤에서 소령으로 근무하던 포글먼은 군수회사 로비스트들과 한국을 방문했다가 가죽 재킷을 맞추러 그의 양복점을 찾았다. 그 후 중장으로 진급한 그가 7공군사령관으로 오면서 인연은 다시 이어졌다.

    사령관은 가끔 참모들이나 해외의 부대 방문자들을 이끌고 케이시의 가게로 와서 양복을 맞추라며 권했다. 그는 이것저것 샘플을 꺼내 보이며 장사까지 했다. 이건 얼마고, 저건 얼마고.

    그는 별 4개로 진급했고, ‘속달사령부’로 통하는 수송사령부(AMC) 사령관으로 영전해 한국을 떠났다. 중장은 떠나며 당분간 케이시를 못 보는 것과 소주를 마시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어느 날, 미국에서 케이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소주가 마시고 싶은데, 일주일 후 ‘마이하우스’에서 만나자.”

    수송사령관의 전화였다. 마이하우스는 두 사람이 자주 가던 미군클럽이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휘하의 참모들을 태운 수송사령부 소속 747항공기를 사령관 포글먼 공군 대장이 직접 조종해 일리노이 스캇AFB를 이륙한 것. 그는 태평양 상공에서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오산AB로 날아왔고, 저녁 7시 참모를 줄줄이 거느리고 마이하우스에 나타났다.

    수송사령관은 바텐더에게 소주 10병을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사령관은 소주를 한 잔씩 채워 참모들 앞으로 휙 하고 밀어 보냈다. 소주잔은 테이블 위를 슬라이딩했다. 그중 한 참모가 미끄러져 오는 잔을 재빨리 낚아채려다 끼고 있던 공군사관학교 졸업반지에 부딪혀 깨지고 말았다. 순간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리고 박수를 치는 등 난리가 났다.

    “다시 간다, 잘 잡아!”

    사령관은 참모들과 한국 친구들에게까지 일일이 잔을 채워 보낸 후 한국말로 소리를 질렀다.

    “듭시다!”

    별 4개를 단 미군 대장이 마이하우스에 나타난 일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다음 날 그는 다시 747기의 조종석에 앉아 7공군 사령관과 곁에 선 친구 케이시에게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미국으로 돌아간 후 그는 공군참모총장으로 진급했다. 사령관은 진급 파티를 한국에서 미리 열었던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1994년 10월,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케이시 테일러를 방문했다. 군복이든 예복이든 잘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군산AB의 8전투비행단 대대장 레밍턴 중령이었다. 양복과 코트를 맞춤 주문한 중령에게서 케이시는 아주 야무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장군감다운 카리스마가 느껴진 것이다.

    소주 마시러 날아온 미군 수송사령관

    2003년 케이시가 오키나와 가데나AB를 방문했을 때 그곳 비행단장은 레밍턴 준장(Brig. Gen)이었다. 9년 만의 만남이었는데 그는 이미 장군이었다. 5년 후 태평양공군 작전부장인 레밍턴 소장(Maj. Gen)이 7공군사령관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케이시는 e메일을 보냈다.

    “예전의 당신 사이즈는 잘 보관하고 있다.”

    레밍턴 소장에게서 답신이 왔다.

    “그동안 사이즈가 많이 달라졌다. 직접 확인해라.”

    15년 만에 한국 근무로 돌아온 제프리 레밍턴 중장(LT. Gen)은 현재 7공군 12대 사령관이다. 케이시는 미군들과 40년을 보냈고, 24년은 7공군과 함께였다. 그 오랜 세월 케이시는 미국인 친구들의 친절한 배려로 미군과 민간 사이의 다리 노릇을 해왔다.

    미군이 그들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주둔한다면, 우리도 그들의 주둔을 통해 얻는 이익이 존재한다. 동맹의 목적은 공존이며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함께 가야 하는 관계다. 동행에는 유대가 필요한 법이다. 주한미군사령부는 케이시가 양국 간의 유대를 위해 노력했음을 격려하는 뜻으로 ‘Good Neighbor’상을 전달했다.

    그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왔다. 미군 고위 장교들과 이만한 우정의 관계를 이어온 사람이 또 있을까. 지금도 가끔은 마이하우스를 찾는 케이시는 이렇게 말한다.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만났고, 그들과 우정을 다지며 40년을 살아왔다.”

    뉴멕시코의 산타페에서, 배리 하워드는 오산AB 근무시절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이라고 지금도 회상한다.

    “난 반은 한국 사람이다. 저녁마다 송탄 마피아와 함께 보내던 시간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던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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