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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시골의사’의 책장

된장남녀의 새침 털털한 연애담

일디코 폰 퀴르티의 ‘여자, 전화’

된장남녀의 새침 털털한 연애담

된장남녀의 새침 털털한 연애담
날씨가 더워지면서 반바지 차림으로 수박 몇 조각을 앞에 놓고 집어드는 책은 여지없이 가벼운 외국산 소설이다. 소설이란 읽는 사람의 상태가 좋고 행복하고 열려 있어야 감정이입이 잘된다. 생각이 복잡하고, 시계 톱니바퀴처럼 머릿속에서 ‘째깍째깍’ 소리가 날 때는 소설은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오감이 열리고 세상이 꽃밭일 때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돼버린다.

이번에 고른 일디코 폰 퀴르티의 ‘여자, 전화’(북하우스 펴냄)는 아주 오래전에 사두었지만 읽지 못했던 아담한 책이다. 다들 경험이 있겠지만, 음반을 산 다음 순위가 밀려 대기번호표를 받아들고 기다리던 녀석의 셀로판 껍질을 까는 재미만큼이나 책장 맨 왼쪽 세 번째 칸에서 대기하는 안 읽힌 책들을 부활시키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치 밀린 방학 숙제를 하룻저녁에 다 해버리는 기분이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처음에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가벼운 소설인 만큼 오락으로서의 독서를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책장을 넘기면서 처음엔 시큰둥했다. 하지만 좀 지나서 책상에 올렸던 다리를 내리고 책상 쪽으로 당겨 앉았으며, 다음엔 스탠드의 불을 켜고, 마지막으론 책장을 덮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긴 한숨을 한 번 쉰 다음 혼자 피식 웃었다.

왜 그랬을까? 답은 이 책에 있다. ‘여자, 전화’는 우리 시대의 개념으로 볼 때 된장녀와 된장남 이야기다. 그녀(또는 그)는 나름대로 살 만한 사람들이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그가 훨씬 낫지만, 하는 짓은 둘이 별반 차이가 없다. 주인공인 그녀는 색 바랜 꽃무늬 속옷 위에 친구에게 빌린 꽉 끼는 원피스를 입는다. 가끔 우아한 파티에 참석하기도 하지만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친다. 게다가 혼자 지내는 밤이면 내내 다리를 비비다 찬물을 뒤집어쓰고, 그러다 가끔 섹스 파트너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섹스 역시 시원치가 않다. 어쩌다 실수로 남자 위에서 허리를 숙이면 빈 선키스트 주스병을 매달아놓은 것처럼 축 늘어진 가슴이 덜렁거리고, 섹스 후 침대에서 일어설 때는 반드시 이불이나 타월로 엉덩이를 가려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르누아르의 그림 ‘욕녀(浴女)’에 나오는 모델의 엉덩이와 자웅을 겨뤄야 한다. 한마디로 자기 관리를 포기한 한 커리어 우먼의 이야기다.



그녀가 우연히 만난 그라고 다를 것도 없다. 겉으로는 BMW에 멋진 레스토랑의 VIP 대접을 받는 잘나가는 직업을 가졌지만, 속으로는 TV 연속극과 튀김과자를 좋아하고 만화책이나 들추는 사람이다. 그리고 ‘교양’ 따위의 책에서 그럴듯한 주제를 뽑아 커닝페이퍼를 만들어 여자 앞에서 지적인 척하지만, 이야기가 조금만 길어지면 얕은 지식이 모두 백일하에 드러난다.

하지만 이 둘이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책에서 둘은 진정한 고추장과 된장이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지상 최고의 위선을 떨며 우아한 척하면서 서로에게 공작춤을 춘다. 그리고 정말 우연히 같이 잠자리에 든다. 이 책은 두 사람이 첫 섹스를 나눈 후 일어난 불과 6시간 동안의 일에 대한 기록과 회상이다. 그녀는 남자가 마음에 들었지만 애프터 신청을 하지 못한다. 남자가 자신과 첫 섹스를 하고 전화를 걸지 않을까봐 초조해하며 혼자서 감정을 쏟아놓지만, 그렇다고 먼저 전화를 걸 엄두는 내지 못한다. 속으로는 간절히 원하면서 겉으로는 ‘쿨’한 척하며 전화를 할까, 문자를 보낼까 고민하다 기껏 보낸다는 것이 “혹시 좋은 식당 아는 데 없어요? 손님이 와서” 따위다.

이 책을 보면 두 가지가 생각나는데, ‘알랭 드 보통’과 ‘김삼순’이다. 섬세하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그 절묘한 감정선에 대한 묘사는 ‘알랭 드 보통’의 그것이고, 그녀의 된장짓은 그야말로 ‘내 이름은 김삼순’이다(그러고 보니 그 드라마가 ‘여자, 전화’에서 탄생한 것은 아닌지 턱없는 의심이 들기까지 한다). 모처럼 흥미롭게, 고개를 끄떡이고 연신 낄낄거리며 속곳 바람으로 2시간 만에 다 읽은 책이다. 깔끔하고 유쾌한 유머가 돋보인다. 올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수박화채를 들이켜듯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이다.



주간동아 2010.06.21 742호 (p89~89)

  • 박경철 blog.naver.com/donodon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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