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8

2010.01.05

고수들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4인4색 예능의 힘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09-12-29 12: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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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수들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최양락 개그맨

    “말하는 사람이 웃는 것 금물 소재는 주변에 널렸시유”

    인사를 하며 명함을 내미는 기자에게 개그맨 최양락(47) 씨는 “나는 명함이 없으니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신분’을 확인하라는 뜻이었는데, 예기치 않게 시작된 ‘유머 선제공격’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MBC) 녹음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내내 최씨는 특유의 빠른 말투로 열정적으로 얘기했다. 재미있고도 진지한 말솜씨 덕분에 순식간에 그의 얘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백남봉·서영춘 선생님을 흉내내니 선생님과 친구들이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그때 개그를 통한 ‘쾌감’이란 걸 처음 맛봤죠. 낚시꾼들은 붕어를 잡을 때 ‘손맛’을 느낀다는데 개그맨들은 남들이 웃어줄 때 비슷한 쾌감을 느끼거든요.”



    대학 1학년 때 개그맨 공채시험을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그러나 전국에서 소문난 ‘오락부장’들이 모인 방송국 무대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1981년에 데뷔했는데 처음 3, 4년은 별일 없이 집과 방송국을 오가며 유머 소재만 궁리했어요. 연극을 봐도 드라마를 봐도 저걸 개그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영화 ‘쿠오바디스’를 보고 ‘네로 25시’란 개그 코너를 만들고, ‘참새와 허수아비’란 영화를 보면서 팽현숙 씨(최씨의 부인)와 ‘남과 여’를 만들었죠. 그때 ‘나는 봉이야~’란 유행어가 탄생했어요. 또 드라마 ‘전원일기’를 보면서 농촌 코미디를 고민하다 ‘괜찮아유’란 유행어를 만들었지요.”

    그가 말하는 ‘남을 웃기는 비결’ 첫 번째는 자기 유머에 자기가 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중간에 웃음을 터뜨리면 듣는 사람의 기대치가 올라가 웬만한 개그에도 웃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 웃음의 소재를 멀리서가 아니라 내 주변에서 찾는 센스가 필요하다.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때밀이 아저씨가 너무 세게 몸을 문질러 젖꼭지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는 경험을 얘기했는데 다들 웃겨 쓰러지더군요. 이때도 표정 없이, 무심한 듯 말한 게 주효했어요. 남들 듣기엔 정말 웃긴데, 나는 나름 ‘아픈 경험’이었다고 말한 데서 더 큰 웃음을 이끌어낸 것이죠.”

    그는 또 솔직함이 ‘예능력’을 키우는 첫 단추라고 조언했다.

    “부장한테 찍혔다고 생각한다면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 말해보세요. ‘매주 4일씩 지각해서 김 부장님에게 찍힌 ○○○입니다. 그럼에도 김 부장님은 저를 내심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감사합니다!’ 다들 어이없어하며 웃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있다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죄송한 마음까지 전하는 센스가 돋보이겠죠.”

    ‘예능력’을 발휘하고 싶어도 썰렁한 반응이 나올까 봐 주저한다면, 어떤 말을 해도 ‘용서’해주는 가족을 상대로 ‘리허설’을 해보는 것도 좋다.

    “사람들이 웃음 터뜨리는 지점을 잘 관찰해보세요. 거기에 맞게 화법이나 말의 강약을 바꾸면 성공률이 높아지죠.”

    최씨는 자신의 약점을 활용하는 것을 효과적인 ‘예능력 업그레이드’ 방법으로 소개했다.

    “영구, 맹구, 오서방 등 우리나라 코미디 계보의 바보 캐릭터들은 모두 성공했어요. 한국인의 정서가 나보다 못난 사람을 더 아껴주거든요. 자신의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개그 소재로 삼는 것도 좋죠.”

    그는 우리 사회가 사람들의 ‘예능력’에 집중하는 현상을 반기며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통’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 예능력은 사람들 사이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하리라 기대했다.

    “저는 정치도 웃으면서 하면 좋겠어요. 만날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대변인들이 가끔 농담도 하고, 실없는 말도 던지면 좋겠어요. 이렇게 하면 소통이 더 잘되지 않을까요. 웃음은 병든 사람도 벌떡 일어나게 한다잖아요. 서로를 즐겁게 하기 위한 ‘예능력’ 증강에 국민 모두가 힘썼으면 좋겠어요.”

    고수들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김정운 명지대 여가경영학과 교수·문화심리학자

    “유머 던지기는 나와의 상호작용에 초대하는 것”

    딱 봐도 만화 캐릭터 같은 느낌이다. 코도 얼굴도 이마도 머리카락도 동글동글하다. 미남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남’인 건 분명하다. 시종일관 다양하고 풍부한 표정으로 기자의 말을 경청하고 성심성의껏 답하는 그에게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유머러스한 입담 덕에 강연 요청이 끊이지 않고 얼마 전까지 ‘일요일 밤으로’(KBS2)에 패널로 출연해 높은 식견을 자랑한 김정운 교수는 글뿐 아니라 말도 재미있기로 유명하다.

    “전 어려서부터 수줍음을 많이 타서 별명이 ‘색시’였어요. 책 많이 읽고 혼자 있는 거 좋아하는 문학소년….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서 성격이 확 바뀌었죠. 주변에 여자들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정서적으로 ‘업(up)’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는데 반응이 괜찮았어요. ‘나, 너희들이랑 있으니 기분이 좋다’ ‘오늘 누구는 예쁜데 누구는 그렇지 않구나’ 하는 시답잖은 내용이었는데, 이런 얘기를 친구들이 재미있어 하니 말하는 데 자신감이 붙더군요.”

    그는 남 앞에서 얘기할 때,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하며 일부 내용을 ‘필터링’하는 것은 ‘소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감정을 한 바퀴 꼬아 들어가면 교감이 차단돼버려요. 솔직하게, 느끼는 대로 말하는 것이 더 진솔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는 ‘재미있게 잘 노는 사람이 경쟁력 있다’고 믿는다. 한국 최초로 ‘여가경영학과’를 개설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 교수가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또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주는 것은 대화 도중 부사를 아낌없이 활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그냥 “좋네요”라고 말하는 대신 “무지하게 좋네요”라고 하며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듣는 사람을 신나게 만드는 재주로 작용하는 듯했다.

    그는 재미있는 말을 잘하기 위한 조건으로 ‘다양한 경험’을 꼽았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상대방이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게 ‘예능력’의 첫 단계라는 설명이다. 김 교수도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고 13년간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또 아이를 직접 키우면서 ‘내면의 섬세한 촉수’를 계발했다고 한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30대 중반 아줌마들과 죽이 잘 맞아요. ‘신비로운 육아 체험’이라는 공통 화제 때문에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지요.”

    그는 한국인이 의사소통에 익숙지 않은 것이 ‘턴 테이킹(Turn taking)’, 즉 순서에 맞게 말을 주고받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변엔 일방적으로 자기 얘기를 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일방적으로 말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반응할 시간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이 끝날 때마다 약간의 추임새를 넣으면서 상대방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줘야지요. 유머가 중요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상대에게 웃을 기회를 주는 거잖아요. 유머를 던진다는 건 다른 사람을 나와의 ‘상호작용’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고수들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전현무 KBS 아나운서

    휴머니즘 ‘밉상 캐릭터’ “망가지길 두려워 마라!”

    청소년기에 ‘마님은 왜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는가’라는 제목의 에로 비디오를 보다 어머니에게 들켰다고 털어놓고, 영화 ‘괴물’의 괴물 목소리를 개인기로 선보이며, 얼굴이 늙어 보여 보톡스를 맞고 제모까지 했다는 그를 보며 시청자들은 기존의 아나운서 이미지와 다른 ‘예능인’의 면모를 발견한다.

    최근 연예·오락 프로그램에서 MC와 게스트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KBS 전현무(32) 아나운서. 그는 KBS 시청자광장에서 ‘주간동아’ 인터뷰용 사진촬영을 할 때도 몰려든 사람들의 시선에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카메라를 향해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해 보였다. ‘스타 골든벨’(KBS2)의 ‘밉상 질문’ 코너로 뚜렷한 캐릭터를 갖게 된 그에게 ‘예능력’의 비결을 물었다.

    “제가 원래 좀 ‘밉상’스러운 데가 있어요. ‘스타 골든벨’을 진행할 때 그런 모습을 극대화했죠. 사람들이 묻고 싶은 질문을 제가 대신 속 시원히 물어보는 방법이죠. 가령 화장이 진한 여성에게 ‘문신했느냐’고 물어보는 식인데, 이런 건 너무 밉상인가요?”

    나름의 ‘밉상 철학’도 있다. 출연자 중 상대적으로 소외된 연예인에게 밉상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들에게 시청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도록 하고, 그들도 ‘발언권’을 얻게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의 밉상 질문에 “휴머니즘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래서다.

    간혹 수위 조절에 실패해 곤욕을 치르는 일도 있다. 한번은 오랜만에 복귀한 가수를 두고, 방청객은 다 알지만 나는 모른다는 설정으로 웃음을 자아내려다 방청객들 역시 모른다는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난감했던 적이 있다. 결국 그 장면은 비극적인 최후(통편집)를 맞았다.

    전 아나운서는 ‘밉상 코드’가 인기를 끄는 것은 그 안에 웃음을 유발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웃음에는 솔직함이 있어야 해요. 반전도 있어야 하고요. 좀 이상한 옷을 입고 온 사람에게 ‘그 옷은 웃기려고 입은 거죠?’라고 물으면 다들 웃잖아요. 모두가 공감하는 상황을 직접 말로 끄집어내니까 웃음이 터지는 겁니다.”

    반전을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은 관찰력이다. 유재석이 박명수를 ‘아버지’라고, 정형돈을 ‘안 웃기는 개그맨’이라고 콕 집어 말해 웃음 코드로 승화시킨 것도 관찰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저는 이제 막 배워가고 있어요. 그래서 신문, 책, 영화를 챙겨 보면서 캐릭터 파악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얼마 전 우락부락하게 생긴 게스트가 파마머리를 하고 왔기에 ‘우피 골드버그 같다’고 말했는데,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그러나 밉상이 과하면 비호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언제나 ‘솔직’과 ‘겸손’을 중심으로 하고, 자기 자신을 개그 소재로 삼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아나운서인데도 ‘싼 티’나는 단어를 즐겨 쓰고 스스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재미있어하는 것 같아요. 옆집 아저씨, ‘허술한 오빠’ 같은 사람이 밉상 캐릭터를 선보이니 재미있어하지 완벽한 이미지의 근엄한 아나운서가 밉상 노릇을 하면 정말 밉상이 되거든요.”

    그는 ‘예능력’을 사람을 사귈 때 가장 큰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안 그래도 다들 바쁘고 힘들게 사는데, 엄숙한 사람을 만나고 싶겠어요? 일단 ‘예능력’을 발휘해 사람들과 친해진 뒤 진지한 본모습을 보여줘도 늦지 않아요.”

    고수들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

    정치는 곧 엔터테인먼트 직설화법으로 감성 공략

    서울 여의도동 1번지 국회의원회관 707호.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쪽 벽면 모서리에 걸린 홍 의원의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붉은 와이셔츠를 입고 붉은 넥타이를 맨 채 웃고 있는 모습이 어른 옷 입혀놓은 개구쟁이 같다.

    홍 의원은 “붉은색은 러시아에선 정의(justice)와 순수(purity)를 상징할 뿐 아니라, 이 단어들의 앞글자인 ‘JP’는 내 이름의 이니셜이기도 해 ‘정의롭고 순수하게 정치한다’는 뜻으로 빨간 넥타이를 자주 맨다”고 말했다. 같은 의미에서 13년간 속옷도 빨간색으로만 입었다니 ‘비범한’ 면이 있음이 분명했다.

    홍 의원을 ‘예능력’ 뛰어난 명사의 한 사람으로 취재하게 된 것은 베테랑 정치담당 기자들의 ‘증언’ 때문이다. 그가 공석, 사석을 불문하고 특유의 입담과 ‘예능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웃겨왔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여과 없이 말하는 것으로 유명해 ‘홍 반장’이란 별명도 얻었다. 스스로도 “대통령에게 자유롭게 할 말 다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12월1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인 손석희 교수가 그에게 서울시장 출마 의사를 물었다. 그는 역으로 “손 박사는 출마할 생각이냐”고 물어 화제가 됐다. 홍 의원은 손 교수에게서 “(나는) 안 나간다”는 답을 받아낸 뒤에야 “국민 앞에 맹세한 거예요. DJ처럼 번복하고 나가기 없기다”라고 못 박았다.

    그는 원래부터 시원시원한 화법과 태도를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고 했다.

    “고3 때 남자 셋이 함께 자취를 했는데, 이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니 성격이 외향적으로 변해가더군요. 학교 다니는 친구, 장사하는 친구와 함께 먹고 살려면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대학 가서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해야 해서 전보다 더 적극적이고 시원시원하게 변했죠.”

    솔직한 입담이 ‘트레이드마크’가 되자 그를 ‘웃기는 사람’으로 여기는 주변인이 하나둘 늘어갔다. 홍 의원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한 선배 가운데 당시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를 연출하던 MBC 김경태 PD가 있었다. 김 PD는 홍 의원의 ‘예능력’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개그맨 시험을 보러 오면 무조건 붙여주겠다”고 꼬드겼다. 홍 의원은 “돈 많이 번다”는 말에 실제 시험을 보려고도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입학하던 1972년 유신이 선포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서울의 유일한 4선 국회의원인 그는 선거운동도 직설적으로 했다. 검사시절 자신이 수사한 슬롯머신 사건이 드라마 ‘모래시계’의 소재가 되면서 일명 ‘모래시계 검사’로 스타가 되자 유세장에서 이 드라마 OST만 틀어댔다. 2008년 총선 때는 ‘홍도야 울지 마라’ ‘다함께 차차차’ 등 40대 중반 세대가 좋아하는 노래만 불렀다. 공약은 이미 선거유인물로 배포됐기에 노래를 통해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홍 의원은 “정치도 결국 엔터테인먼트”라고 강조했다.

    “대중을 즐겁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 아니겠어요? 정치인들도 이런 대중의 감성을 읽어내고, 그들이 웃음 짓게 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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