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2

2009.11.24

한드(한국 드라마)는 다양성을 먹고 큰다

미·일 콘텐츠 장점 흡수, 독특한 경쟁력으로 진화

  • 김지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magictrain03@naver.com

    입력2009-11-18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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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은 국내에서 미국 드라마(‘미드’)와 일본 드라마(‘일드’)의 인기가 급상승한 해였다. 케이블TV의 활성화, 다양한 DVD 출시 등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변화에 힘입어 ‘미드’ ‘일드’를 접하게 된 국내 시청자의 수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의 관심이, 독점적 지위로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던 한국 드라마에서 외국 드라마로 확장된 결과 미드와 일드 마니아층까지 형성됐다. 몇몇 작품은 마니아에 그치지 않고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미드와 일드의 폭발적 인기와 더불어 한국 드라마에 대한 비난과 실망의 목소리도 커졌다.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것이 비난의 핵심이다. 나름 전문적 ‘식견’을 갖춘 미드, 일드 마니아들은 인터넷 공간에서 ‘한국 드라마는 가족을 중시하고, 미국 드라마는 전문성을 요하는 소재를 미스터리 구조로 풀어내고, 일본 드라마는 특이한 조직 안에서 독특한 개성을 지닌 주인공이 성장하는 스토리를 주로 그린다’는 등 각국 드라마의 전형적 법칙을 분석, 공유했다.

    그 후 2년. 이제 한국 드라마는 좀더 다양한 지평을 갖게 됐다. 더 이상 한국 드라마를 불치병, 결혼을 둘러싼 가족 간 갈등, 출생의 비밀이라는 테두리에만 가둬둘 수 없게 된 것. 한국 드라마도 지상파 방송3사 간의 시청률 경쟁에서 벗어나 미드, 일드와 경쟁하며 그들의 장점을 흡수해 다양한 변주곡을 울리려 애쓴다. 미드, 일드의 어떤 면이 한국 드라마의 ‘진화’에 영향을 미친 것일까.

    [미드] 전문적 지식 바탕, 미스터리 구조, 호흡 긴 서사구조

    요즘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드라마는 ‘아이리스’일 것이다. ‘한국형 첩보액션물’을 표방하는 이 드라마는 스스로 할리우드 액션영화와 한국에서 성공을 거둔 미드의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한다.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지점도 이와 일치한다. 이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은 이병헌은 영화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이슨 본 시리즈나 ‘24’를 따라했다는 말들이 있는데, 맞아요. 따라한 거예요. 다만 한국적인 정서와 상황에 맞춘 거죠. 제대로 따라할 수만 있어도 성공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주인공 김현준(이병헌 분)이 조직의 음모와 배신으로 혼자 갖가지 역경을 극복해야 하는 영웅형 캐릭터라는 점은 ‘본 아이덴티티’ 같은 제이슨 본 시리즈에서 가져온 설정인 듯하고,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프로파일러(테러범의 행동을 예측해 테러를 사전에 방지하는 전문가) 등 전문성을 갖춘 특수조직의 일원이라는 점은 ‘24’나 ‘CSI’ 같은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한 미스터리형 미드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첩보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와 장비를 최대한 활용해 극의 리얼리티를 높이고 일본 헝가리 등지에서 해외 촬영을 시도해 첩보세계의 긴장감과 현실감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려 했다는 기획 의도도, 이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미드를 볼 때와 같은 쾌감을 주려 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미드는 주인공이 살인사건 또는 거대한 조직의 음모에 휘말려 시련을 겪는 이야기를 즐겨 다룬다.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스터리 구조를 적극 활용한다.

    또 역경의 원인을 과학적 지식을 활용해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미드 붐의 실마리가 된 ‘CSI’를 필두로 ‘24’ ‘로스트’ ‘프리즌 브레이크’ 등 인기 시리즈물은 모두 이런 특징을 지녔다. 따라서 의학물이나 범죄물 등 특수한 세계를 다룬 이야기가 많으며, 최근에는 전문성이 더욱 세분화돼 혈흔분석 전문가, 뼈 분석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FBI, 성범죄수사 전담반 등 특이한 직업들을 소재로 삼는다. 보통 에피소드별로 기승전결이 존재하는 완결된 구조를 취하던 미드는 ‘24’ ‘로스트’ 이후로는 시즌 전체, 혹은 전체 시리즈를 하나의 이야기로 놓고 복잡한 구조로 이야기를 엮어가는 방식을 사용했다.

    길게는 수년간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해가야 하기에 제작자와 작가진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다. 할리우드 출신의 영화 제작자들이 대거 입성하면서 미드의 전성시대가 열렸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긴 호흡과 내공을 갖춘 이들이 투입됐기 때문. 이는 16~20회의 미니시리즈를 한 편의 완결된 이야기로 보고, 중간 중간의 스토리 전개에 시청자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한국 드라마와 가장 큰 차이점이기도 하다.

    [일드] ‘원작의 힘’ 활용 시청률 일희일비 않고 뚝심 연출

    올해 상반기 ‘꽃보다 남자’에 쏠린 폭발적인 반응은 제작사조차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완성도 면에서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이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끈 이유는 아무래도 원작 덕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출판된 일본 만화 ‘꽃보다 남자’는 90년대 중후반 여중고생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이미 인기가 검증된 캐릭터에다, 일본에서 건너온 ‘꽃미남’ 신드롬의 절정 무드를 이용해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일본 드라마의 특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의 드라마들은 힘 있는 원작에서 시작되는 사례가 많다.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손예진·고수 주연의 영화 ‘백야행’은 ‘용의자 X의 헌신’ 등으로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바탕으로 이미 일본에서 드라마화했다. 일본의 소설이나 만화가 크게 유행을 따르지 않고 멜로, 코미디, 미스터리 등 각종 장르물에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채 출판되고 있다는 점이 일본 드라마의 큰 힘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힘센’ 원작이 하나 나오면 만화, 소설,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는 시스템도 안정적으로 구축돼 있다. 일본판 원작의 힘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인기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가 한창 한국에서 인기를 얻은 후, 작품에 등장하는 ‘S오케’(뛰어난 재능과 개성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기량이 미숙한 젊은 음악가들로 이뤄진 오케스트라)의 콘셉트를 차용해 젊은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콘서트가 인기를 끌었을 정도다.

    한 가지 원작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기발한 아이디어나 독특한 캐릭터 덕분이기도 하다. 한국 영화가 ‘올드보이’ ‘29세의 크리스마스’ ‘플라이, 대디, 플라이’ 등 일본 원작을 선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의 드라마 제작 환경은 어떨까. 한국처럼 16부작이나 24부작으로 주 2회 방영하는 것이 아니라, 12부작으로 매주 한 차례씩 3개월간 방영되는 것이 기본이다.

    ‘커피프린스 1호점’ 방영 후 이윤정 PD는 인터뷰에서 “12회 정도면 밀도 있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룰 수 있다. 이후의 이야기는 사족이 되기 쉽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사전 제작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일단 편성이 되면 조기 종영이나 연장 방영 없이 계획대로 방송된다. 중간광고 등을 끼고 있어 한국의 드라마처럼 60~80분 가까이까지 방영시간을 늘리거나 줄이는 일도 찾아보기 힘들다. 시청자들의 반응에 따라 내용을 바꾸는 일도 거의 없다.

    시청률을 의식하기보다 제작진의 의도에 따라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려는 의도가 더 큰 것이다. “한국 영화는 안 본다”거나 “한국 소설은 안 읽는다”는 사람은 많아도 “한국 드라마는 안 본다”는 사람은 드물다. 한국 드라마는 그동안 고유의 개성을 가지고 시청자들을 끌어당겼고, 이제 세계의 다양한 콘텐츠를 흡수해 세계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내의 유혹’ 같은 막장 드라마를 하나의 장르로 만들면서, 또 드라마 팬들이 직접 나서 ‘탐나는도다’ 같은 드라마의 조기 종영을 아쉬워하는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면서 한국 드라마 팬과 함께 한국 드라마도 진화하고 있다. 한국, 미국, 일본뿐 아니라 세계의 드라마들과 정면승부를 벌이는 한국 드라마의 진화는 앞으로도 커다란 주목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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