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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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님 화사한 유혹, 난 몰라

봄꽃 여행 1

  • 채지형 여행작가 www.traveldesigner.co.kr

    입력2009-03-20 16: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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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님 화사한 유혹, 난 몰라
    봄은 꽃이다.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매화를 시작으로 남도를 빨갛게 물들이는 동백, 노란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산수유, 보드라운 보라색 카펫을 연상시키는 자운영과 마음을 흔들어놓는 벚꽃까지 봄의 일생은 꽃으로 촘촘히 이어진다.

    봄·여름·가을·겨울 각 계절마다 나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지만, 봄만 되면 사람들이 들뜨는 이유도 역시 꽃에 있다.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몽우리를 터뜨리는 봄꽃들의 놀라움이라니. 꽃의 화려함도 감동스럽지만, 겨울을 지내고 새 생명을 품어내는 꽃들이 대견하다.

    해외에서 만난 외국 친구들이 한국을 여행하기 가장 좋은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봄이라고 답한다. 봄이 되면 우리 강산이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 기회가 된다면 한국의 봄에 한 번쯤 빠져봐야 진정한 여행자라고 자랑한다.

    매년 봄이 되면 이름 모를 병이라도 난 것처럼 그리운 곳이 있다. 바로 사시사철 푸른 섬 청산도다. 서울에서 6시간 차를 타고 남도로 내달려서 도착한 완도. 그곳에서도 45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할 만큼 쉽지 않은 길이지만, 봄이면 청산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청산의 봄이 그토록 중독성이 강한 이유는 유채 때문이다. 유채꽃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전국에 유채꽃밭이 늘어나 청산도까지 가지 않아도 유채를 마음껏 볼 수 있지만, 굳이 청산도까지 가는 이유가 있다.



    꽃님 화사한 유혹, 난 몰라

    봄이 오는 소리를 가장 먼저 전하는 봄꽃들. 동백(위)과 매화가 활짝 피었다.

    서정미 넘치는 청산도 노란 유채꽃

    청산도의 유채는 다른 곳에 없는 특별함이 있기 때문이다. 구슬프다고나 할까, 애절하다고나 할까. 발랄한 노란색을 띠고 있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서정미가 넘친다. 그래서 꽃을 보며 인생을 생각하게 만든다.

    청산도에서도 영화 ‘서편제’의 배경이 됐던 당리 언덕에는 유채꽃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어 더없이 편안하고 아늑하다.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노라니 아낙네가 자신의 몸보다도 큰 짐을 지게에 지고 간다. 아직은 살림이 퍽퍽한 청산도 사람들. 어쩌면 청산도 유채의 애절함이 그들의 삶에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 좁고 꼬불꼬불한 황톳길에서, 그 아낙의 뒤를 이어 서편제의 송화가 진도아리랑을 부르면서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유채꽃밭 주위를 두르고 있는 야트막한 돌담은 서정적인 정취를 더해준다. 청산도가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한가롭다는 것. 봄꽃이 피는 전국은 그 아름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살을 앓아야 하지만, 청산도는 아직 그다지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 아니어서 호젓하게 봄을 만끽할 수 있다. 그저 당리 언덕에서 도락포 포구마을의 전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인이나 철학자가 될 수 있을 듯한 곳이 청산도다.

    1년에 딱 한 번 오는 섬진강의 매화

    매화는 봄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달려나오는 꽃이다. 연분홍빛 향기 속에 화려하게 핀 매화. 특히 섬진강의 매화는 섬진강의 흰 모래, 은빛 물줄기와 어우러져 아득한 봄 풍경을 선물한다.

    매화가 만발하는 축제기간이 되면 고민이 앞선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상춘객과 교통체증 때문에, 매화를 보러 갈지 포기할지 잠시 망설여진다. 그러나 결국 카메라를 챙겨들고 일어나는 까닭은 1년에 딱 한 번 그 장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매화로 대표적인 곳은 전남 광양시 섬진강변 매화마을에 있는 홍쌍리 씨가 운영하는 청매실농원이다. 일단 그곳에 발을 디디면서부터 ‘와’ 하는 감탄사가 시작된다. 마치 한겨울 폭설을 맞은 듯 마을 전체가 눈부시기 때문이다. 섬진강 주변을 감싸안은 매화하며 매실 장아찌가 만들어져가는 수천 개의 장독대, 소란스러운 축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의 흐름까지 눈을 두는 곳마다 황홀하기 이를 데 없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청매화, 백매화도 홍매화와 함께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팝콘처럼 톡톡 터져 있는 조막만한 꽃송이들이 고동색 가지 위에 앉아 나름의 기품을 뿜어낸다. 또 초록색 융단 위에 자그마한 터널을 만들고 있는 매화는 ‘아, 봄이구나’를 연발하게 한다. 매화에 빠져 산책을 하다 보면, ‘그저 눈물처럼 지는 꽃이 좋아서’ 매화를 심고 청매실농원을 일군 홍쌍리 여사와 섬진강 매화를 노래한 시인 김용택이 동네 어르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를 좋아하는 이라면 올해는 매화축제(www.gwangyang.go.kr)에 가보는 것이 좋겠다. 3월22일까지 열리는 광양매화 문화축제에서 주제를 ‘매향(梅香)과 시향(詩香)이 섬진강에’로 잡았기 때문. 주차장에서 청매실농원을 향하는 돌계단에 매화 관련 시를 새긴 29개의 시비를 만들어, 매화마을에 문학적인 요소를 불어넣었다. 마지막 날인 22일에는 판소리 경연대회도 열려, 흐드러진 매화 아래에서 구성진 우리 가락을 감상할 수도 있다고 한다.

    산수유 꽃대궐서 황홀한 봄맞이

    ‘노란 산수유 꽃송이 꽃이 피어서/ 산에 갔지요/ 구름 밖에/ 길은 삼십 리/ 그리워서 눈 감으면/ 산수유꽃 섧게 피는 꽃길 칠십 리’.

    광양의 매화와 쌍둥이처럼 붙어다니는 꽃이 곽재구 시인이 노래한 산수유다. 매화의 아릿함과 달리 산수유의 노란 꽃망울은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의 풋풋함을 품고 있다. 3월과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이라고나 할까.

    산수유는 꽃잎이 작아서, 하나하나를 볼 때는 소담스러운 맛이 있지만 수천 그루가 모여 하나의 빛을 내면 엄청난 생기를 뿜어내며 거대한 아우라를 만든다.

    산수유로 가장 유명한 곳은 지리산 산간마을인 구례군 산동면의 산수유 마을. 중국 산둥에서 시집온 처녀가 산수유나무를 가져다 심으면서 ‘산동’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산수유 마을은 봄 풍경으로도 유명하지만 산을 붉게 물들이는 가을 풍경도 널리 알려져 있다. 가을에 산수유의 빨간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산동마을은 전국 생산량의 절반을 넘는 산수유를 생산할 만큼 국내 최대의 산수유 산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산수유의 절정은 봄이다. 지리산 자락의 만복대 계곡을 따라 산수유 꽃대궐을 돌아보는 코스는 봄에 꼭 가봐야 할 산책길 중 하나다. 산책길에 빠뜨리면 안 될 곳이 돌담으로 이어진 작은 시골마을이다. S자형 돌담길을 따라 산수유들이 작은 터널을 만들고 있는데, 그 길을 바라보면 자연과 사람이 어찌 그리 조화로운지 놀랍기 그지없다. 세월을 품은 오래된 돌담, 그 돌담을 몽실몽실 뒤덮고 있는 샛노란 산수유꽃. 어떤 미술관에서 본 그림보다, 어떤 책에서 본 사진보다도 진한 느낌을 가슴속 깊이 심어준다.

    올봄, 그 기분이 궁금한 분들은 산동을 찾아보시길. 3월19일부터 22일까지 산동마을과 지리산 온천지구 일대에서 ‘구례 산수유꽃 축제’(gurye.go.kr)가 열리는데, 이 축제의 주제 또한 솔깃하다.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라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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