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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90년대 ‘낭만 학번’의 추억

험하고 쓰러져도 내 갈 길 간다

그들 고전적 틀에서 벗어나 지구촌 품으로 … 세계 속의 한국 업그레이드 주역 자리매김

험하고 쓰러져도 내 갈 길 간다

험하고 쓰러져도 내 갈 길 간다

바스피아 서대교 이혜영 대표

옛것이 붕괴한 뒤 새 물결을 주도한 이들은 다름 아닌 90년대 초반 학번들이었다. 이들이 지닌 결정적 무기는 어릴 적부터 보고 자라온 말랑말랑한 TV 프로그램과 영화, PC와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신기술, 그리고 세계화시대 첫 수혜자로서 해외여행 경험 등으로 압축된다.

그럼에도 이들은 외환위기로 전통적 직업군인 공무원, 대기업 직원 등에서 배제된 불행한 세대다. 하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보면, 이 같은 고전적 틀거리는 90년대 학번들이 누리기에는 지나치게 비좁았다. 마침내 이 세대는 ‘즐거운 변화’라는 낙관적 세계관을 가슴에 품고 문화판이나 정보기술(IT) 분야 또는 해외로 나가 한국사회의 질적인 업그레이드를 이뤄냈다.

이념은 사절, 진취적 접근은 OK

북한을 포함한 제3세계를 후원하는 인권단체 ‘바스피아’의 이혜영(95학번) 서대교(96학번) 대표는 시민단체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무엇보다 북한에 대한 견해를 명확히 하라는 선배들의 무언의 압력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인권(좌파)’과 ‘개발(우파)’의 조화를 화두로 내걸고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정체성에 대해 더는 시비 걸지 말라는 나름의 선언인 셈이다.

어린 시절 홍콩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이 대표는 “대학 졸업 직후 북한인권단체에서 일을 시작했다가 선배들의 편가르기식 정치관에 질식할 뻔했다”며 “3년 전 우리 세대의 역량을 모아 직접 시민단체를 만들어보기로 했다”고 단체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미국에 불편한 감정이 없고 영어에도 능통한 그는 전 세계를 상대로 아시아 인권문제를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인터넷 여행사이트 윙버스(www.wingbus.com)의 창업자인 김창욱(95학번) 대표는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곧장 사업체를 차렸다. “좋아하는 일이라면 인생을 걸 수도 있다”는 신념에서였다. 공동 창업자인 김종화(96학번) 대표와는 게임 선발업체인 네오위즈에서 만나 함께 이룰 사업 아이템을 고민하다 결국 여행을 화두로 웹2.0 기업인 윙버스 창업에 성공했다. 김 대표는 “공부나 연구보다는 일을 해서 사회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싶었다”며 “과학자나 법관보다는 스티브 잡스 같은 IT업계 최고경영자(CEO)들이 나의 역할모델이었다”고 말한다.

험하고 쓰러져도 내 갈 길 간다

‘낭만IT’ 칼럼니스트 김국현

두 사람 모두 초등학교 시절 PC를 접했고, 중학교 시절엔 PC통신에 입문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경영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도 독립적인 사업체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사업 초기엔 수억원의 투자비용 때문에 고민이 컸지만 “여행과 인터넷 산업의 미래를 확신하기에” 이젠 창업의 고통을 즐길 정도가 됐다.

IT분야는 유달리 90년대 학번들이 커다란 세력을 이룬다. 포털 1세대는 예상치 못한 성공으로 수백억원대 자산가가 된 뒤 현장을 떠난 경우가 적지 않지만, 후배 세대에게선 “평생 일을 즐기겠다”는 열망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에 대해 미국에서 온라인 뮤직사이트 마이스페이스와 경쟁하고 있는 큐박스(www.Qbox.com)의 권도혁(94학번) 대표는 “기술이 변화시키는 미래세계에 대한 낙관 때문”이라고 정리한다. 물론 그 놀이터는 온라인이다.

얼굴인식 자동태깅 기술을 지닌 올라웍스 류중희(92학번) 대표는 카이스트 재학 시절 SBS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주연급 배우로 연기한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은 오늘날 스티브 잡스에 비견되는 화려한 프레젠테이션 실력으로 빛을 발한다. 인터넷에서 ‘낭만 IT’라는 카툰으로 유명한 김국현(92학번) 마이크로소프트 부장은 신경제 이론서인 ‘웹2.0 경제학’이라는 저서로 베스트셀러 저자로 등극했다. 또 어릴 적 즐기던 게임을 산업으로 성장시킨 주인공도 이들 90년대 학번이다.

험하고 쓰러져도 내 갈 길 간다

VIP투자자문 김민국 최준철 대표

돈의 노예 아닌 주인 되겠다

돈에 대한 관념 또한 이전 세대와는 판이하다. 특히 ‘대박신화’보다는 가치를 발견하는 ‘즐거운 투자’를 앞세운다. 이제 천민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돈에 대한 철학이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운용자산이 2000억원을 훌쩍 넘는 VIP투자자문의 최준철(96학번) 김민국(96) 공동대표는 또래 친구들이 초보 펀드매니저로 활동할 때 과감하게 독립을 택해 뚜렷한 성공을 거둔 경우다. ‘한국형 가치투자의 전략’이라는 투자이론서를 낸 뒤 이들의 투자이론을 따르는 대학생들까지 적지 않을 정도다.

이들은 대학교 투자동아리 시절, 워런 버핏이 선보인 단타매매에 빠진 시류에서 벗어나 멀리 보는 가치투자에 감명받아 이를 모방해 사업을 시작했다. 주변의 우려도 적지 않았지만 “워런 버핏이 투자자들과 파트너십을 맺기 시작한 나이가 25세에 지나지 않았다”며 자신감을 보여왔다. 이들의 목표는 돈을 가치 있게 쓰자는 것이다.

“(선배들과) 돈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 것 같습니다. 버핏이 말년에 회사 전체를 사회에 기부한 까닭은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죠. 저희도 버핏 이상의 가치를 찾도록 노력해야죠.”

드라마 작가 중에서도 90년대 학번의 활약이 돋보인다. 사실 프리랜서인 방송작가는 그동안 PD나 기자에 비해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TV를 곁에 끼고 자라난 컬러TV 세대들은 ‘재미있는 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방송국으로 진군했다.

험하고 쓰러져도 내 갈 길 간다

드라마 작가 홍자매

SBS 드라마 ‘온에어’의 김은숙 작가나 얼마 전 종영된 KBS ‘쾌도 홍길동’의 홍자매(홍정은 홍미란)가 대표적이다. ‘온에어’ 이전에도 김 작가는 ‘파리의 연인’ ‘프라하의 연인’ 등 ‘연인’ 시리즈로 이름을 알렸고, 홍자매는 ‘쾌걸 춘향’ ‘마이 걸’ ‘환상의 커플’ 등으로 신세대의 지지를 받았다. 재벌2세와의 사랑이나 삼각관계 등 이들이 다루는 드라마의 소재나 틀거리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주목할 점이 있다면 작품 속 디테일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들 신세대 작가의 특징은 뻔한 소재를 진부하지 않으면서 더불어 경쾌하게 다루는 데 능숙하다는 점이다. 멜로나 시대물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코믹한 분위기까지 작품 전반에 흘릴 줄 아는 여유를 지닌다.

여행전문가 안진헌(93학번) 씨는 일찌감치 해외로 나선 경우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한계를 느끼고 세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직업적인 여행가가 됐고 이젠 아시아지역 전문가로 성장했다. 지금도 한국보다 해외에서 세계인들과 네트워킹하는 게 더 익숙하고 편하다. 그는 현재 ‘트래블게릴라’라는 여행회사의 동호회원들을 모아 여행 및 저술 사업을 함께 하고 있다. 그의 꿈은 ‘론리 플래닛’의 태국편 저자인 조 커밍스 같은 인물이 되는 것.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겠지.”

포스트 386, 곧 90년대 학번들은 386세대와 달리 나와 적을 구분하기보다는 절실하게 친구들을 찾아온 세대다. 그러나 동지애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누가 뭐래도 네 갈 길을 가라” 포스트 386 세대가 대학 초년병 시절 ‘마르크스 선생’으로부터 받아들인 유일한 충고다.



주간동아 2008.04.08 630호 (p50~51)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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