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30

2008.04.08

투명한 ‘X’ 현실 해부, 그래서 위험하다

90년대 학번 감독과 작가들 … 정치에서 문화로 시선 옮겨 일상 속 권력 입체화

  • 강유정 영화평론가

    입력2008-04-02 1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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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한 ‘X’ 현실 해부, 그래서 위험하다

    한재림 ‘연애의 목적’, 최동훈 ‘타짜’(오른쪽).

    아깝지만 몇 명의 이름은 이 순간부터 지우자. 먼저 1970년생인 소설가 김연수, 그와 동갑내기인 장준환 감독. 그리고 70년대생인 줄 알았는데 1969년생인 김태용 봉준호 감독도 말이다. 그들은 모두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달라진 분위기를 대변하는 ‘새로운 70년대생’으로 황급히 소환됐다. 하지만 그들은 386세대의 정서에 더 가깝다. 1980년대 대학 분위기에서 잉태된 ‘80년대의 아이들’인 셈이다.

    그렇다면 진짜 70년대생들은 누구일까? 70년대 태어난 90년대 학번 아이들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누군가에게서 ‘X세대’로 호명됐다. X세대라는 명칭은 특별한 정치적 지향성도, 그렇다고 변혁에 대한 열망도 없는 이기주의자들이라는 비난을 내포하고 있다. 자아 정체성도 반성도 없이 싸구려 대중문화를 환대하는 무뇌아(無腦兒)라는 비아냥이 X세대라는 말에 포함돼 있는 것이다.

    ‘X세대’ 지칭엔 대중문화 환대 무뇌아 비아냥 포함

    투명한 ‘X’ 현실 해부, 그래서 위험하다

    나홍진 ‘추격자’

    흥미로운 것은 당사자인 90년대 학번들이 이 비아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바야흐로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70년대생들은 타자(他者)의 눈에 비친 자신의 정체성에서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증을 벗어던진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열렬히 대중문화에 매료됐고, 취향을 이데올로기와 대체했다. 90년대 학번에겐 마르크스와 엥겔스만큼이나 레오 카락스나 타르코프스키가 중요했고, 학생회관에 모여서 본 ‘감각의 제국’이 주사파 사건만큼 문제적이었다. 그들에겐 취향이 곧 이데올로기였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범죄의 재구성’으로 장르영화의 문법을 재창조한 최동훈 감독은 70년대생 90년대 학번에게 ‘취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386세대라고 할 수 있을 박찬욱 홍상수 김기덕 감독이 작가주의라고 불릴 만한 고유한 예술세계를 개척했다면, 최 감독은 장르영화에 대한 애착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흡수한 경우다. 그의 애착은 2006년도 작품 ‘타짜’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허영만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하위문화라고 할 수 있을 장르영화와 만화에 대한 편중된 관심의 결과물이다.



    정치에서 문화로 무게중심을 옮긴 70년대생 90년대 학번의 특징은 결국 일상에 침투한 미시정치에 대한 감각, 즉 투명한 정치성으로 수렴된다. 75년생 감독 한재림의 ‘연애의 목적’은 이 투명한 정치성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연애의 목적’은 그동안 정치 담론과 별개로 여겨지던 ‘연애’ ‘학교’를 신랄하게 해부한다. 한 감독에게 연애는 어떤 정치보다 복잡한 전략이며 협잡과 오해가 난무하는 전장이다. 권력이 연애를 촉매하기도 하고 연애가 권력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한 감독이 조망하는 ‘학교’에는 사교육이나 공교육 문제, 교사의 차별대우, 입시경쟁 같은 거대 담론 대신 연애와 성폭력 같은 복잡다단한 일상의 정치가 자리잡고 있다.

    투명한 ‘X’ 현실 해부, 그래서 위험하다

    김태용 ‘풀밭 위의 돼지’, 박형서 ‘자정의 픽션’, 정이현 ‘오늘의 거짓말’, 편혜영 ‘사육장 쪽으로’(왼쪽부터).

    90년대 학번의 투명한 정치성은 정치 경제 사회와 같은 거대 담론에 가려진 일상 속 권력의 문제를 입체화해준다. 담론과 선언의 영역으로 치부됐던 문제들이 구체적인 삶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예컨대 이해영 이해준 감독의 ‘천하장사 마돈나’는 트랜스젠더, 동성애 등의 문제를 다정하고 세심한 어법으로 풀어낸다. 73년생 이해영 이해준 감독은 동성애를 일상 속에서 받아들여야 할 구체적 삶의 모습으로 제시한다. 70년대생들의 투명한 정치성이 제도의 개편이 아닌 삶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안착되는 순간인 셈이다.

    70년대생 90년대 학번의 투명한 정치성은 무엇인가를 성취해내기 위한 선언적 도그마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발언한다기보다 선언에 숨어 있는 구조를 분석하고 제시하는 데 집중한다. 올해 상반기 한국영화의 수확으로 언급되는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도 그렇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비견된다. 봉준호와 나홍진의 차별점이라면 69년생 봉준호가 미궁에 빠진 연쇄살인을 ‘1980년대’라는 특정 시대 탓으로 돌리는 데 비해, 나홍진은 그 몫을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던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편안한 삶 불편하게 환기

    386세대는 언제든 비난과 비판의 대상을 역사 속에서 찾아냈다. 그들에겐 싸워 없애야 할 적과 전복해야 할 패악이 눈앞에 존재했다. 90년대 학번에게 현실은 지금 당장 주변을 휩싸고 있는 모순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386세대보다 훨씬 덜 정치적이지만 현실이 감추고 있는 정치적 협잡의 구조를 더 투명하게 조감한다.

    70년대생 90년대 학번 세대의 작가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정이현은 이러한 일상의 정치성을 낯뜨거울 정도로 투명하게 그려낸다. 결혼에 목숨 거는 여대생들, 미국 드라마처럼 사는 것이 곧 세련됨이라고 믿는 30대 직장여성들의 환상이 정이현을 통해 낱낱이 벗겨진다. 시취(屍臭)와 감금의 상상력으로 구획된 편혜영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2000년대에 활동하고 있는 70년대생 90년대 학번 소설가들은 일상이 은닉한 귀기와 잔혹함을 개인 방언의 형태로 제시한다. 이러한 개인 방언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같은 고전을 음란소설로 재해석하는 박형서의 신랄함에서도, 그리고 퀘퀘거리는 돼지 울음으로 이 우스꽝스러운 삶을 축약한 김태용에게서도 발견된다.

    지금 이곳, 2008년을 활보하는 70년대생 90년대 학번 영화감독과 소설가들은 하나의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 주제의식으로 논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만의 취향을 코드로 선택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아니 우리는 우리 세대를 ‘386’ 같은 집단세력으로 권력화하지도, 7080 같은 상업성으로 희석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70년대에 태어난 90년대 학번, 그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편안한 삶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환기해 줄뿐이다. 각각의 취향을 통해 통일된 것처럼 오인되고 있는 세상의 전체성에 흠집을 낸다. 그래서 70년대생 90년대 학번은 어떤 호명에도 융해되지 않는 다양한 상대성의 우주, 여전히 호명 불가능한 ‘X’로 남아 있다. 이해 불가한 ‘X’가 아닌, 호명을 거부하는 투명한 ‘X’. 그래서 그들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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