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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시네마천국|조 라이트 감독의 ‘어톤먼트’

슬퍼서 더 아름다운 단 한 번 사랑과 속죄

슬퍼서 더 아름다운 단 한 번 사랑과 속죄

슬퍼서 더 아름다운 단 한 번 사랑과 속죄
떨리는 남자의 어깨를 진정시키며 여자는 그의 귓가에 속삭인다. “내게로 돌아와요. 내게로.” 담배연기와 함께 피어오르며, 터지는 폭약의 굉음 속에서도 여자의 속삭임은 멈추지 않고 날갯짓한다. “내게로 돌아와요. 내게로.” 전쟁에 징집당한 남자는 걸으며 자며 먹으며, 수없이 마음속으로 여자에게 답장을 쓴다. “사랑하는 세실리아, 최고로 사랑하는 세실리아. 난 돌아갈 거야. 당신을 찾아내고,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과 결혼해서 수치심 없이 살 거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톤먼트’는 단지 전쟁의 참화에서 피어난 한 떨기 가녀린 로망 멜로가 아니다. 전쟁영화이며 멜로영화이자 역사영화인 이 영국 영화는 심지어 소설과 영화의 관계에 대한 매체적 성찰을 탐구하고 코스튬 드라마의 품격과 우아함까지 지녔다. 들끓어 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 오해가 빚어내는 참화, 그리움과 기다림. 이언 매큐언이 써 내려간 1930년대 영국의 풍광과 주인공들의 농밀한 감정은 고스란히 밀봉돼 컷과 컷 사이의 맥박을 뛰게 만든다.

이언 매큐언 소설 각색 … 1930년 영국 풍광 일품

영화는 자신의 탄생지가 발군의 문학가 이언 매큐언의 문장이었음을 한시도 잊지 않는 듯하다. 타이프 치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첫 장면부터 소녀 브로니의 소설가로서의 자의식은 만개한다. 소설가 지망생이자 활자가 찍히듯 가차없는 걸음걸이를 지닌 열세 살 소녀가 본 것은 이해할 수도, 범접할 수도 없는 에로스의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언니는 분수대에서 옷을 벗은 채 풍덩 빠져버리고, 평소 사모하던 청년은 노골적인 말들이 밀봉된 위험한 편지를 언니에게 배달시킨다.

특히 ‘어톤먼트’에서 반복의 의미는 클리셰 이상의 ‘어떤’ 것이다. 조 라이트의 면도날 같은 편집 덕에 초반부의 도돌이표 같은 장면들은 브로니와 세실리아, 두 세계의 부정교합된 단층을 절묘하게 드러낸다. 브로니에게 싸움인 것이 세실리아에게는 사랑이며, 브로니에게 음란한 것이 세실리아에게는 고백이 된다. 아이인 브로니의 시선에서 포착하는 1인칭적인 장면과 세실리아와 그의 연인 로비의 3인칭 관찰자적 시점의 간극은 그대로 이해와 오해, 현실과 허구, 귀족과 평민, 소설과 영화의 충돌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세계의 충돌은 조 라이트의 손끝에서 세심하게 영화적으로 번안돼 클로즈업과 롱샷의 충돌로 이어지고, 갑작스런 피아노 줄의 튕김이나 여름날 꿀벌의 윙윙거림, 시계의 똑딱거림 같은 일상의 음향 한 조각조차 관객의 감각을 팽팽하게 조여나간다(‘어톤먼트’의 음향 설계는 최근 본 영화 중에 최고라 할 수 있다).

브로니의 어린 사촌이 누군가에게 강간당하자, 그날 밤 브로니는 허구와 사실을 제멋대로 엮어 앞날이 촉망되는 의대 지망생 로비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다. 로비는 감옥에서 전쟁터로 보내지고, 가족과 의절한 채 간호사가 된 세실리아는 고작 몇 분간의 만남으로 그를 향한 그리움의 허기를 달랜다.

영화의 중반부를 이루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감독의 묘사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돌아가고자 하는 한 군인의 절절한 내면에 대한 헌사나 다름없다. 그것은 전쟁의 풍광을 캔버스 삼아 그려낸, 상처받은 영혼의 초상화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 특히 로비가 해안가에서 본국으로의 철수를 기다리며 흩어져 있는 군인들을 따라가는 롱 테이크 장면은 단연 영화의 백미다. 총을 쏘고, 운동을 하고, 널브러지고, 중얼거리다 싸우고, 벌거벗고, 노래하고, 목마를 타고, 술을 마시며 이리저리 바람처럼 휩쓸리는 군인들. 이 기나긴 스테디캠 장면은 흥청망청한 광기와 혀끝을 죄어오는 두려움으로 범벅 된 전장의 이미지를 압축해낸다.

그래서 영화 전반부에 잠시 제인 오스틴 풍을 기대했다가 중반부로 갈수록 원작자나 감독 모두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펜을 빌려온 것 같은 의식의 흐름 수법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전쟁의 와중에서 기억의 강을 유영하는 로비는 한 무더기 소녀들의 시체에서 브로니를 연상하고, 장 가방이 나오는 극장의 영사막 위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 세실리아와의 입맞춤을 떠올린다. 이윽고 죽어간 병사를 뒤로하고 드뷔시의 ‘월광’과 2차 대전의 다큐멘터리가 겹치는 순간, 테렌스 맬릭의 ‘신 레드 라인’이 그러하듯 전장의 서정성이 몸을 드러낸다.

슬퍼서 더 아름다운 단 한 번 사랑과 속죄

‘어톤먼트’의 장면들. 한순간의 오해로 인해 로비는 전쟁터로 보내지고, 세실리아는 간호사가 되어 가족과 의절한다.

뛰어난 영상 팽팽한 음향 원작 못지않은 감동

그러나 놀랍게도 ‘어톤먼트’는 모든 것 그 이상이다. 영화의 마지막, 마치 3부를 연상케 하는 엔딩 시퀀스는 놀라움과 반전의 연속으로 점철된다. 6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소설가가 돼 혈관성 치매를 앓고 있는 브로니는 자신의 소설 제목을 ‘어톤먼트(속죄)’라 짓는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연기하는 얼굴, 늙어버린 노파의 클로즈업은 비로소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속죄’인지를 답해주는 장대한 얼굴 스펙터클이다. 동시에 그것은 이언 매큐언이 ‘속죄’를 쓸 때부터 천착했던 질문, 소설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조 라이트의 주석이라 할 수 있다.

한때 철없는 소녀가 썼던 판타지는 조악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윽고 그 소녀가 오직 사실만을 쓴 것. 운율도 꾸밈도 형용사도 없이 쓴 그녀의 ‘속죄’는 어느덧 소설로 격상된다. 판타지의 업을 쓰고 태어난 소설은 끊임없이 현실과 대결하며, 현실을 수혈하며, 영겁의 죄와 속죄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이다.

‘어톤먼트’는 걸작의 문학을 수작의 영화로 재탄생시킨 행복한 판례다. 영화 속 대사처럼 ‘어톤먼트’가 체화하는 기다림, 사랑, 운명의 서정시는 진정 나약함이나 회피가 아니라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이다. 예술이라 불리는 ‘친절한 영화 씨’가 선사하는 최고의 행복. 그녀의 친절을, 아마도 올해 아카데미가 선택해주지 않더라도 영화의 역사가 선택해주리라.



주간동아 2008.02.26 624호 (p7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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