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9

2007.11.06

건청궁 국모 시해 그날 恨과 슬픔, 한 세기 만에 살아났다

  • 사진 = 윤기은 기자 yke0317@donga.com, 글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7-11-05 10: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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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청궁 국모 시해 그날 恨과 슬픔,  한 세기 만에 살아났다

    1_ 왕이 거처하던 장안당. 민가의 사랑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br>2_ 장안당의 누마루인 추수부용루에서 본 바깥 풍경.<br>3_ 장안당에서 왕비의 침소인 곤녕합으로 연결되는 통로인 복도각.<br>4_ 담 너머로 향원정이 보인다.

    궁궐이라기보다는 사대부가(家) 같다. 단아하면서도 정겨운 살림집에 온 듯하다. 강원 영동 지방으로 발품 팔아 구한 소나무의 색이 하도 좋아 옛 자료와 달리 단청칠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조선을 기행했던 서양인들이 찍은 사진자료가 복원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도 한다. 3년간의 복원작업을 거쳐 100년 만에 우리에게 돌아온 건청궁(乾淸宮). 회생을 꾀하는 500년 조선왕조의 마지막 몸부림과 명성황후 시해라는 일제의 극악한 만행이 서린 슬픈 역사 현장이다.

    경복궁 중건사업이 끝난 이듬해인 1873년 고종황제는 경복궁 북쪽에 건청궁을 건립케 한다. 고종황제는 1884년부터 이곳에 기거하며 조선 근대화를 위해 여러 시도를 했다. 1887년 건청궁에는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해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이 가설된다. 그러나 1895년 8월20일(음력)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돼 녹산에서 시신이 불태워지는 만행이 저질러진다. 이후 아관으로 파천한 고종은 다시는 건청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게 건청궁은 실패한 정치 실험의 현장이자 아내를 잃은 뼈 아픈 고통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1909년 건청궁은 일제에 의해 완전히 헐렸고 그 자리에 총독부 미술관이 들어섰다.

    250칸의 건청궁은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 앞 향원정 연못 북쪽에 자리한다. 왕의 거처인 장안당(長安堂)과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坤寧閤), 별채에 해당하는 복수당(福綏堂) 등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하늘 푸르고’(건청궁) ‘땅은 안녕하며’(곤녕합) ‘길이 평안하기’(장안당)를 바라던 고종황제의 염원이 되살아났다.

    건청궁 국모 시해 그날 恨과 슬픔,  한 세기 만에 살아났다

    5_ 민가의 안채에 해당하는 곤녕합. 왕비가 거처하는 공간으로 동·서·북쪽에 베란다 형태의 난간이 설치돼 있다.<br>6_ 명성황후가 집무실로 쓰던 곤녕합의 방.<br>7_ 별채에 해당하는 복수당.

    건청궁 국모 시해 그날 恨과 슬픔,  한 세기 만에 살아났다

    8_ 밖에서 본 장안당의 외벽.

    건청궁 국모 시해 그날 恨과 슬픔,  한 세기 만에 살아났다

    9_ 황제의 침전인 정화당의 방 안으로 가을 햇살이 비친다.<br>10_ 황제의 집무공간.<br>11_ 행랑마당에서 곤녕합으로 들어가는 함광문. 남자는 출입 금지이며 오직 궁녀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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