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97

2007.08.07

“아프간에 또 들어갈 겁니다”

프리랜서 사진기자 김주선 “억압받는 여성들 앵글로 고발, 희망 담아올 것”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7-08-01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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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간에 또 들어갈 겁니다”

    5월 아프가니스탄 바닥샨주에서 지방경찰 사령관과 함께한 김주선 씨(왼쪽 페이지 오른쪽에서 두 번째). 그의 신변 보호를 위해 얼굴을 컴퓨터로 흐리게 처리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가리고 눈 부위만 망사로 되어 있는 ‘부르카’를 입고 지난 1년간 아프가니스탄을 누빈 여성 사진기자 김주선(36) 씨. 김씨는 위험 지역으로 취재 갈 때는 꼭 부르카를 입는다. 부르카는 그에게 일종의 보호막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선 나돌아다니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특히 외국인 납치 전술로 효과를 본 탈레반이 외국인을 주로 노리면서 취재 여건이 더욱 나빠졌다. 하루하루가 모험의 연속이다.

    그래도 그는 세계적인 사진기자가 되기 위해 용기를 낸다. 3월29, 30일에는 ‘보스턴 글로브’지 여기자와 함께 부르카를 뒤집어쓰고 탈레반이 암약하는 남부 파크티야주까지 갔다 왔다. 최근 한국인 23명이 납치된 가즈니주 카라바크 지역에도 지난해 9월 미군들과 함께 장갑차 ‘험비(Humvee)’를 타고 취재를 갔다.

    “탈레반이 미군 장갑차를 보고 자살폭탄을 감행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들이 공격해오지 않아서 ‘불행하게도’ 좋은 사진을 찍지 못했어요. 다행히 이렇게 살아 있기는 하지만요.”

    그는 당찬 여성이다. 그에게는 위험도 힘이 된다. 그의 앞에서 ‘남자도 하기 힘든 일인데…’라고 말했다간 곧바로 면박 받기 십상이다.



    “여성이 뭐 어때서요? 현실에 안주하면 한순간 사라져버립니다. 대충 살다가 잊히고 마는 사진가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세계 사진계에 족적을 남기는 훌륭한 사진가가 되고 싶어요. 평생을 종군기자로 살아오며 경이로울 정도로 감동적인 사진을 찍은 제임스 낙트웨이 같은 사진기자가 되고 싶어요.”

    절망의 땅에서 목숨 걸고 취재

    훌륭한 사진가가 되는 문 하나는 이미 그에게 열렸다. 그는 최근 유명 보도사진전인 프랑스 ‘페르피냥(Perpignan) 포토 페스티벌’에서 6개 주요 상 가운데 하나인 ‘케어 인터내셔널 휴머니티 르포르타주’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그는 또 전 세계 40개 신문사 기자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비자도르 데일리 프레스(Visa D’or Daily Press)’상 부문에도 선정돼 페스티벌 기간에 사진 5점을 전시한다. 9월6일 페르피냥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그는 그랑프리 상금 8000유로(약 1000만원)를 받게 된다.

    그가 그랑프리를 받은 사진 10장은 산모 사망률 세계 2위인 아프가니스탄의 실상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카마르라는 26세 산모가 병원에서 제왕절개로 남자아이를 낳은 뒤 합병증으로 사망하기까지 2주간의 사투 과정을 담았다.

    유엔 조사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에선 1년에 2만5000명, 즉 27분마다 한 명씩 산모가 사망한다. 그는 이 문제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 5월 초 타지키스탄 접경 지역인 바닥샨주를 방문했다. 2001년 통계에 따르면 그곳의 라그 지역은 15~49세 가임여성 사망률이 64%였다. 그가 맨 처음 방문한 곳은 파이자바드 주립병원 산부인과 병동 분만실. 그곳에서 카마르를 만났지만 처음엔 건강이 좋지 않은 산모였을 뿐, ‘산모 사망률’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하기에는 미흡했다.

    “병원보다는 가정 분만을 찍는 게 더 생생할 것 같아서 파이자바드를 벗어나 시골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사흘을 노력했지만 가정 분만은 촬영할 수 없었어요. 이슬람 전통상 여성의 신체 부위를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을 꺼리는 탓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가정에서 아내와 딸이 죽어가도 병원에 보내지 않는다고 해요.”

    결국 그는 파이자바드 주립병원으로 돌아가 다시 카마르를 찾았다. 그런데 그가 지방을 떠돌고 있는 사이 카마르는 병이 깊어져 산소마스크를 쓰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카마르의 마지막 순간을 카메라에 담으며 김씨는 눈물을 훔쳤다.

    그에게 또 다른 자부심을 안겨준 포토 페스티벌의 ‘비자도르 데일리 프레스’상은 그가 ‘보스턴 글로브’지 4월13일자에 게재한 내용이다. 주제는 ‘미국에 비해 이란이 아프가니스탄 동부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동부 헤랏 여성들은 부르카가 아니라 얼굴을 드러내는 차도르를 입고 다니며, 이란에 가기 위해 여권발급소 앞에 길게 줄을 선다. 김씨는 그런 장면들을 생생하게 포착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낸 1년은 한국에서 보낸 몇 년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아프가니스탄은 저에게 많은 도움을 준 나라입니다. 사진가로서, 저널리스트로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고 또 빚을 졌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잘해주고 싶습니다.”

    “아프간에 또 들어갈 겁니다”

    ‘페르피냥 포토 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사진 가운데 하나인, 제왕절개로 아들을 낳고 합병증으로 죽어간 카마르(왼쪽). 아프간 전통의상 부르카를 입고 있는 김주선 씨.

    시에라리온·소말리아가 다음 예정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성들이 학교를 다닌다는 이유로 돌을 맞기도 한다. 탈레반은 여성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도록 여교사를 암살하고, 여학교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런 나라에 사는 여성들도 있는데, 우리나라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교육 기회가 주어짐에도 결혼과 육아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는 이가 많습니다. 자아실현을 못하고 교육비를 낭비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고 생각해요.”

    그가 그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찍은 사진들은 ‘미스터카불 보디빌딩 경연대회’나 결혼 풍습과 여성교육 등 재미있는 소재도 있지만, 대부분은 취재하기가 어려운 주제들이다. 아프가니스탄 국내 난민문제, 양귀비 재배현장과 마약 중독자 문제, 미군 동행 취재, 자살폭탄 차량 취재, 탈레반 퇴각과 추출 5주년의 아프가니스탄 변화상, 미군과 나토(NATO)군 공습과 과잉진압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

    이처럼 무거운 주제도 그의 앵글에 들어오면 ‘작품’이 된다. 그것은 그가 한때 미술학도였던 것과도 무관치 않다. 그는 서울대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그러다 우연히 사진에 빠진 뒤 급기야 방향을 전환해 뉴욕대 사진학과로 유학을 떠났다. 졸업 뒤 미주한국일보 뉴욕지사 등에서 일했고, 미주리대 언론대학원에서 포토 저널리즘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생활을 통해 제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조용한 성격, 겸양이나 겸손이 미덕이었지만 미국에서는 감점 요인이었어요. 열심히 공부했는데도 어느 과목에서 C학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표현을 잘 하지 않는 등 수업 참여도가 낮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 평점이 깎여 힘들던 때가 있었습니다. 정말 충격이었어요. 그때 이후 의도적으로 적극적인 성격으로 바꿨습니다.”

    프리랜서로 일하던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뉴욕 타임스’ 1면 톱으로 게재된 태국 쓰나미 참상 사진이었다. 이후 그는 촉망받는 사진기자로 국내외 언론을 무대삼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7월26일 현재 그는 탈레반의 한국인 납치사건 직전에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모처에서 머물고 있었다.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갈 예정인 그는 취재 활동이 일단락되면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으로 떠날 예정이다. 전 세계 산모 사망률 1위의 나라, 소년 병사들과 소녀 매춘부들을 취재하고 싶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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