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8

2005.11.01

실력과 전통의 ‘파워 엘리트’

자유로운 학풍·인문학적 교양 ‘오랜 자랑’ … 문화·예술·스포츠 분야서도 두각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5-10-26 15: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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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력과 전통의 ‘파워 엘리트’

    1910년 1회 졸업식 기념 사진.

    9월 말 한 중앙일간지가 ‘한국 사회 파워 엘리트’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용 중엔 ‘고교별 파워 엘리트 배출 순위’를 매긴 것도 있었는데, 그중 한 학교의 이름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휘문(徽文)고등학교였다.

    ‘1950년 이전 출생’ 엘리트 배출 순위는 23위이던 것이, 50년대생 수는 13위, 60년대생은 8위, 70년대생에 이르러서는 3위를 차지한 것. 이렇듯 지속적인 교세 확장을 보여준 학교는 휘문이 유일했다.

    아닌 게 아니라 개교 당시부터 휘문은 명문 사립으로 명성이 드높았다. 휘문의 모태가 된 것은 명성황후 조카인 민영휘 공이 1904년 학생 30명을 받아들여 자택에서 문 연 ‘광성의숙’이다. 1906년 고종 황제로부터 ‘휘문’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아 서울 종로구 원서동 옛 관상감 터(현재 현대그룹 계동 사옥 자리)에 교사(校舍)를 신축했다. 그해 첫 입학시험을 치러 1회 130명을 선발했다. 휘문이 1904년이 아닌 1906년을 교사(校史) 원년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일제강점기, 휘문은 사립임에도 인쇄부·서적실·각종 과학실험 기기 등 각종 ‘첨단교육 시설’을 갖춰 다른 학교들의 부러움을 샀다. ‘귀족학교’ ‘신사학교’로 불리기도 했는데 자유로운 학풍, 인문학적 교양이 넘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일본인이 많다 해서 공립을 마다한 다수의 명문가 자제들이 휘문을 택했다.

    소설가 김훈(58회) 씨는 “6·25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60년대에도 휘문의 학풍은 자유로웠다. 다른 학교 학생들은 머리를 빡빡 깎고 다녀야 했지만, 우리는 머리를 길렀고 교복도 여러 종류 중 골라 입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오늘날도 여전해, 김선규 교장은 “우리 학교는 3년 전에야 다시 교복을 입기 시작했다. 아마 가장 늦게까지 ‘사복’을 고수한 학교 중 하나일 것”이라 말했다.





    실력과 전통의 ‘파워 엘리트’

    서울 강남구 대치동 교사.

    그런 교풍 때문일까, 휘문 졸업생 중에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유독 많다. 1970년대 이전에는 문인과 한글학자, 이후에는 연극·영화계 및 연예계 종사자들이 도드라진다. “휘문인들은 시, 노래, 연극 없이는 ‘논다’ 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 매년 열리는 ‘한티축제’는 재학생 예비 연예인들의 ‘1차 등용문’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휘문은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운 체육 명문이다. ‘응원가’와 ‘야구가’가 따로 있을 정도다. 1907년 야구부, 1914년 축구부, 1918년 정구부, 1925년 농구부, 1928년 역도부, 1930년 아이스하키팀을 창설했다. 옛 사진 속 하얀 유니폼으로 성장한 정구부원들의 모습은 귀공자라 하기에 가히 손색이 없다.

    휘문의 운동부들은 일제강점기부터 전 분야에서 ‘동급 최강’의 실력을 발휘했다. 특히 야구부의 활약은 눈부셨다. 1911년 11월7일 황성기독교청년팀과 첫 경기를 치러 17대 8로 승리했다. 이 뉴스를 다룬 ‘황성신문’ 보도가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경기 기사였다. 1923년에는 일본 원정을 떠나 오사카고교를 완파함으로써 조선인들에게 큰 기쁨을 주기도 했다. 1996년 청룡기 우승과 2001년 황금사자기 우승은 동문들에겐 ‘대사건’이었다. 2001년 황금사자기 우승 때는 교우회보 호외를 발간하기도 했다. 농구 역시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으며, 역도부에선 우리나라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나왔다.

    휘문은 일제강점기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학교로도 이름 높다. 권혁홍 교우회장은 “조선어학회를 조직한 국문학자 이병기·권덕규 선생은 휘문의 교사였고, 최두선 선생은 졸업생이었다. 최초의 비행사인 안창남 선생도 휘문 출신”이라 설명했다. 일본말만 쓸 것을 강요당했던 일제강점 말기에도 교사들은 꿋꿋이 우리말로 강의하고 우리 역사와 문학을 가르쳤다. “일본말 교가만 부르라”는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서울역 광장에서 징병으로 끌려가는 선배들을 환송할 때도 휘문인들은 우리말 교가를 목 터져라 불렀다.



    광복 후 휘문이 겪은 가장 큰 변화는 78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으로의 교사 이전이었다. 강남 개발이 지지부진하자 정부가 명문교 이전이란 유인책을 쓴 것. 허허벌판에 가까운 대치동에 짐을 풀고, 이전과는 사뭇 다른 ‘거친’ 학생들의 입학으로 초기엔 혼란도 겪었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1980년대 말부터는 ‘입시 명문’으로 새로운 명성을 쌓게 됐다. 학교 관계자는 “요즘은 ‘서울대 몇 명’이 아니라 아예 ‘의대 몇 명’ 하는 식으로 집계한다”며 “서울대, 연·고대 입학생만 1년에 150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휘문은 학생들을 옥죄 공부에만 묶어두는 학교는 아니다. 91년 역사의 문예부, 83년 역사의 취주부가 아직 건재하며 30개의 동아리들 또한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휘문 졸업생들 역시 학창시절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등산·마라톤·골프 등을 하는 소모임은 발달해 있으되, 특정 직능·직종끼리 서로 밀고 끌어주기 위해 손을 잡는 패거리주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서정욱 전 과학기술처 장관(44회)은 “휘문인들은 자유와 자율, 교양과 철학적 사유를 중시한다”며 “혹자는 교우회 결속력이 다른 학교에 비해 약하다고 걱정도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 휘문의 특질이자 자랑”이라고 말했다.

    학교와 교우회는 지금 100주년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권혁홍 교우회장은 “기념관 건립, 100년사 편찬, 학술·예술·체육 등 분야별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10월9일에는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8000여명의 동문이 모여 ‘개교 100주년 전진대회’도 열었다.

    작지만 더 재미있는 행사는 10월15일, 역시 2006년 100주년을 맞는 이웃 보성고에서 열렸다. ‘휘문-보성 정기 친선전 협약’에 따라 첫 ‘휘보전’을 개최한 것. 이른바 ‘5대 사립’의 일원으로 이름을 떨쳐온 휘문고와 보성고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같은 해 설립됐을 뿐 아니라 문화·예술계 인사를 유난히 많이 배출했으며, 운동부도 특출나다. 현 보성고 재단 설립자인 전형필 선생이 휘문 출신인 점도 이채롭다.

    휘문의 교훈은 ‘큰 사람이 되자’다. 스스로에겐 엄격하되 남에게는 너그러운 사람, 국가와 사회를 위해 사익을 버리고 앞장설 수 있는 사람. 많은 휘문 출신들은 그 교훈을 몸으로 살려냈다. 우리 사회가 휘문의 인재들에게 ‘공부 잘하는 것 그 이상’을 원하는 것 또한 100년 역사로 체현된 그 저력과 의기를 올곧이 믿기 때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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