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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우리풍수ㅣ 강원 도청과 소슬묘

춘천이 자랑하는 ‘두 명당’

  • 김두규/ 우석대 교수 dgkim@core.woosuk.ac.kr

춘천이 자랑하는 ‘두 명당’

춘천이 자랑하는 ‘두 명당’

전국 도청 가운데 가장 좋은 터로 알려진 강원도청 청사.

강원 춘천시에서의 풍수 기행은 대부분 춘천시 서면에 있는 신숭겸 장군 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고려 태조 왕건이 양보한 명당이라는 전설이 내려와 신 장군 후손들뿐 아니라 풍수 호사가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하지만 춘천이 자랑하는 명당은 바로 강원도청 터다. 춘천 시내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봉의산(301m)은 마치 삼태기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으로, 강원도청은 바로 그 삼태기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부드러움과 맑은 기운이 섞인 봉의산과 그 품안에 안긴 도청이 조화를 이룬다. 그러한 지기(地氣)의 감응 탓에 다른 지역에서 ‘도지사나 광역시장의 비리 사건’이 불거져도 이곳 강원도만큼은 그런 일이 없다며 한 택시 기사가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는 단순히 춘천 시민들의 괜한 자부심이 아니라 강원도청 터가 전국 도청(광역시청 포함) 가운데 최고의 명당임을 자부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가 있다.

원래 이곳은 ‘궁궐 터’였다. 1887년 조선시대 고종 임금 당시 난리 등으로 조정이 위험해질 때를 대비해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피할 궁궐을 지었는데 그 터가 바로 지금의 강원도청 자리다(그 후 궁궐은 화재로 불타 없어짐). 그만큼 당시 최고의 지관들이 동원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19세기 말 풍수에 의한 터 잡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봉의산에 자리한 도청 터 말고 또 하나 관심을 끄는 곳은 우두산(牛頭山)이다. 현재는 선산김씨 종산(宗山)이지만 조선시대 누각 조양루(朝陽樓)와 6·25전쟁(1950) 이후 지은 충혼탑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봐 산 자체가 명산임을 말해준다. 이곳 조양루 바로 옆에 이름 모를 무덤이 하나 있는데 ‘소슬묘’라고 한다. 사연은 이곳에 소를 놓아먹이던 시절, 소들이 봉분을 뿔로 들이받아 파헤쳐도 이튿날이 되면 절로 솟아나 ‘솟을뫼(소슬묘)’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름 없는 이 무덤이 ‘국제적인 전설’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춘천이 자랑하는 ‘두 명당’

소슬묘에 꽂혀 있는 일본제 향.

하나는 중국과 관계된 얘기고, 다른 하나는 일본과의 관련 설이다.



우선 중국과 관계된 얘기는 이 무덤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할아버지 무덤이라는 것. ‘주원장의 조부와 아버지가 유랑 끝에 조선 땅까지 흘러 들어왔으나 주원장의 할아버지는 곧바로 죽었고, 아버지는 이곳 우두산 아래에서 머슴을 살았다. 주인집에 찾아온 지관을 통해 이 자리가 명당임을 엿들은 주원장 아버지는 아버지 유골을 암장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훗날 머슴의 아들이 황제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명 태조 주원장이라는 것. 물론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중국 정사(正史)를 보면 주원장의 조부 주초일(朱初一)과 아버지 주세진(朱世珍) 모두 유랑민에 가까운 신세는 맞으나 중국을 떠난 적이 없다. 일제시대 이전에는 청나라 황제의 조부 묘로 알려졌다.

일본 관련설은 가나자와 쇼사부로라는 역사학자가 일본어로 쓴 ‘春川風土記’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문제가 되면서다.

춘천이 자랑하는 ‘두 명당’

춘천 우두산에 있는 조양루와 그 앞에 있는 소슬묘.

‘이 무덤의 주인이 일본 왕자 숙슬(肅瑟)의 무덤, 청나라 황제의 조부 무덤, 말갈족의 무덤 등 소문이 무성한데, 그런 말들은 모두 거짓이며 여러 고문헌에 의하면 일본을 세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동생 ‘스사노 오노미코도(素盞鳴尊)’가 한반도의 ‘소시모리’에 건너갔다가 다시 출운국(出雲國)으로 귀환하였는데, 한반도의 ‘소시모리’는 다름 아닌 이곳 우두산 소슬묘다.’

그로 인해 실제 일본 총독 고이소와 많은 일본인들이 이곳 우두산 소슬묘를 신성시하고 이곳에 신궁을 건립할 생각까지 했다.

어쨌든 소슬묘에 얽힌 속설에는 병든 이가 이곳에서 기도를 하면 병이 낫고, 아들이 없는 이가 기도를 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소문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향을 피우고 소원을 빈다.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도(2004년 11월) 봉분 이곳저곳에 타다 남은 향과 부적의 흔적이 보였다. 흥미로운 것은 타다 남은 향 가운데 일본제 향(향나무를 가늘게 깎아서 붉게 채색한 것)이 봉분 곳곳에 꽂혀 있었다는 점이다. 아직도 자기 조상의 유적지라고 생각하고 참배하는 일본인이 있는지 궁금하다.



주간동아 2005.01.11 468호 (p84~84)

김두규/ 우석대 교수 dgkim@core.woos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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