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4

2001.07.26

버림, 그 아름다운 시작

가진 물건 많을수록 사람 에너지는 축소 … 재활용 등 소비문화 개선 시급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5-01-10 1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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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림, 그 아름다운 시작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의 돌떡이 아직도 냉동실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로 장롱 안은 질식상태다. 화장대 위를 꽉 채운 것들 중에는 빈 병이 더 많다. 언젠가 스크랩하겠다고 쌓아놓은 신문·잡지가 사람 키 높이에 이른다. 자동차 글로브 박스와 트렁크는 용도가 불분명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책상 위에는 분류하지 않은 서류들로 일할 공간이 없다. 벽면은 커다란 사진과 그림들 때문에 빈 틈이 없을 정도다.

    “한국인은 쓸데없이 너무 많은 것을 지니고 산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미니멀리즘 계열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해온 장응복씨(40, 모노콜렉션 대표)는 차고 넘치는 우리의 주거문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요즘 주부들 사이에서는 냉장고 3개가 기본이죠. 빌트인(붙박이) 냉장고와 김치 냉장고, 보조 냉장고까지…. 그래도 넣을 공간이 부족하다고 불평합니다. 너무 많이 사들이고 너무 많이 채웠다가 결국 버리는데 말이에요.”

    장씨는 아파트마다 우리 생활에 어울리지도 않는 와이너리(winery: 와인병 보관대)를 만들고, 너무 많은 빌트인 가구에 벽은 벽대로 빈 공간이 전혀 없어 처음부터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만큼 꽉 차 있다고 아쉬워한다. 2년 전부터 국내에 선(禪) 스타일, 미니멀리즘 인테리어가 유행하자 너나없이 중후하고 장식적인 가구들을 버린 것도 사실이다. 대신 차가운 느낌을 주는 하이테크 테이블, 흰 소파, 흰 벽이 들어섰다. 우리는 이것을 미니멀리즘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미술에서 미니멀리즘이란 가장 본질적인 부분만 남기고 다른 요소들을 모두 없애는 작업이다. 심지어 프랑스의 유명한 미니멀리즘 계열 화가 이브 클랭은 전시장 벽을 하얗게 칠한 뒤 아무런 그림을 걸지 않은 채 전시회를 열었다. 그러고는 수집상에게 있지도 않은 가상의 작품을 팔았다고 한다. 화가와 수집상은 흰 벽과 공간이 만드는 이미지를 예술로 인정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미니멀리즘 스타일이란 가구가 아닌 생활 그 자체여야 한다.



    기(氣) 인테리어라는 개념을 제시한 이성준씨(46, 세원포럼 대표)도 돈 들여 집 꾸미고 자꾸 넓은 집으로 이사하기 전에 버리기부터 하라고 말한다.

    “이사할 때 보면 사람보다 가구가 우선이에요. 가구 놓을 자리부터 마련하고 사람 자리를 정하는데 순서가 틀렸습니다. 사람은 하루의 3분 1을 잡니다. 잠자리를 정하고 가구를 놓아야죠.” 이씨는 집에 입지 않는 옷과 빈 그릇이 많으면 좋지 않은 이유도 설명했다. “일단 옷에는 체취가 배어 있고 사람은 옷과 기를 교환합니다. 자주 입는 옷은 그만큼 좋은 기를 교환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4계절이 바뀌도록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을 어쩌다 입고 나면 몸이 무겁고 불편합니다. 옷과 몸이 맞지 않아 생기는 스트레스죠. 그런 옷을 장롱 안에 몇 년씩 걸어둔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또 안 쓰는 그릇이 많다는 것은 가족의 결속력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안 입는 옷은 빨아 남 주고 쓰지 않는 그릇은 닦아 남 주세요.”

    버림, 그 아름다운 시작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는 사람이 돋보이고, 가구와 장식소품이 많은 집에서는 물건이 돋보인다. 소유한 물건이 많을수록 그만큼 사람의 에너지는 적어진다. 반대로 무소유는 무한대의 에너지로 보는 게 동양식 사고다. 그래서 공간을 먼저 비워야 마음도 비워진다고 한다.

    이런 동양적 사상을 서양의 실용주의와 결합해 ‘공간정리’ 개념을 들고 나온 사람이 영국의 캐런 킹스턴이다. 그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잡동사니 청소’ 워크숍을 개최하는 청소 전도사다. 최근 그의 저서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은 에너지의 흐름을 방해하는 잡동사니의 위해성과 청소법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킹스턴이 말하는 잡동사니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쓰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 물건, 조잡하거나 정리하지 않은 물건, 좁은 장소에 넘쳐 흐르는 물건, 끝내지 못한 모든 것. 이런 잡동사니를 제한된 공간에 쑤셔넣을수록 에너지가 움직일 공간이 줄어든다.

    이처럼 공간의 크기보다 물건이 너무 많아 잡동사니가 쌓이면 집은 제대로 숨쉴 수 없다. 기의 흐름이 정체한 집에 사는 사람은 쉽게 피로를 느끼고 과거에 집착하며, 심지어 비만이 될 가능성도 있다. 킹스턴은 워크숍에서 만난 사람을 통해 경험적으로 잡동사니가 많은 집의 사람일수록 비만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물건이 제자리에 없으면 늘 허둥대고, 자꾸 미루는 습관이 생기며, 잡동사니를 보관하기 위해 또 다른 물건을 산다. 수납상자·선반·벽장·옷장·서랍장·서류함·트렁크 등등 잡동사니를 유지하는 데 만만찮은 비용이 든다. 유일한 해결책은 넓은 장소로 이사하거나 물건을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버림이란 꼭 쓰레기통행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물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더 유용하게 쓸 사람에게 건네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분수 넘치는 소비에 대한 자성의 계기도 된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 사회에서는 제대로 버리는 일이 쉽지 않다. 서구에서는 야드 세일, 개러지 세일 등으로 자연스럽게 버림과 재활용의 문화를 형성했지만, 우리 생활에는 버림의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주택가에 설치한 재활용 수거함조차 마구 버린 옷가지와 신발들로 투입구가 막힌 경우가 대부분. 그러다 보니 집집마다 창고나 다용도실, 베란다에는 주인 잃은 잡다한 물건이 쌓이고, 심지어 고속도로 주변에 냉장고와 같은 대형 가전제품을 내다버리는 경우가 많다.

    서울시 각 구청별로 마련한 ‘생활자원재활용협회’나 YMCA의 ‘녹색가게’처럼 민간이 운영하는 벼룩시장·알뜰시장·물물교환장터 등이 있으나 여전히 재활용은 캠페인 활동에 머물러 있다. 남이 내 물건을 쓴다는 부담감, 거꾸로 남이 쓰던 물건을 쓴다는 거부감이 합리적인 소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IMF 위기 때처럼 경제적으로 크게 위축하면 재활용 문화가 반짝 주목 받다 경기가 좋아지면 외면당하기를 반복한다. 녹색가게 사무국의 변선희 간사는 물물교환은 단지 검약을 실천하는 게 아니라 소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계기도 된다고 말한다.

    “완전한 쓰레기란 없어요. 아무도 사갈 것 같지 않던 낡은 청바지 한 벌을 어느 화가가 작업복으로 입겠다면서 기꺼이 사가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누군가에는 ‘넘치는’ 물건이 ‘모자라는’ 사람에게 가면 새로운 기쁨이 되죠. 한번 재활용을 경험한 사람은 새 물건을 사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갈 것까지 염두에 두고 사용합니다. 또 그것을 아는 사람은 처음부터 ‘넘치는 소비’를 하지 않도록 노력하죠. 녹색가게의 모토가 ‘다시 쓰는 알뜰함, 나눠 쓰는 따뜻함’이에요.” 버림은 아름다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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