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377

2023.02.17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열광하는 이유

[조진혁의 영화 이야기] 1990년대 농구 열풍 추억하며 경쟁 사회 좌절감 치유… ‘굿즈 오픈런’ 이어져

  • 조진혁 자유기고가

    입력2023-02-17 10: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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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관람하는 것이 새로운 놀이문화로 확산되고 있다. [주)NEW 제공]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관람하는 것이 새로운 놀이문화로 확산되고 있다. [주)NEW 제공]

    시간은 나만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남들에게는 뚱뚱한 아저씨로만 보일 테지만 나는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공을 튕기며 떠들던 젊은 내 모습이 더 익숙하다. 애쓰지 않고 웃던 날들이다. 학창 시절은 즐거웠지만 1990년대를 복기하면 덜 얻어맞으려고 공부했던 것 같다. 2000년대에는 취업난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부했고, 2010년대에는 근로자 평균 연봉을 넘으려고 해도 되는 짓은 다 해봤다. 2020년대가 되니 40대로 분류됐다. 아직 내 나이가 낯설지만, 차차 익숙해질 즈음에는 50대로 분류될 것 같다. 나는 그때가 돼도 ‘슬램덩크’의 농구 천재 강백호처럼 내게도 찾지 못한 재능이 있다고 믿으며 성장을 꿈꿀 거다. 마음은 그렇지만 눈뜨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당분간은 그런 꿈을 꿀 틈이 없다. 바쁜 시간을 쪼개 업계 동료들과 함께 최근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러 갔다.

    3040세대에게 향수 불러일으켜

    1990년대 농구 열풍을 추억하는 장년층을 중심으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틀린 소리가 아니다. 우리만 해도 영화관으로 향하는 동안 차 안이 노스탤지어로 후끈 달아올랐다. 팀장들이 이토록 열정을 토해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극장에는 무리 지어 온 우리 또래 남성이 많이 보였다. 혹 민방위? 묘한 기시감이 잠깐 일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개봉 초기라 그런지 ‘슬램덩크’를 보고 자란 팬이 많았다.

    30년 전 슬램덩크 인기를 설명하는 건 마음 아픈 일이다. 이제는 인기가 없다는 뜻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세대가 바뀌었으니 당연한 현상이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마이클 조던 시대였고, 수많은 NBA(미국프로농구) 슈퍼스타를 지금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처럼 외우던 시대였다. 국내에서는 농구대잔치가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다. 슬램덩크는 NBA 중계처럼 경기를 생생히 묘사했다. 풋내기 강백호의 수준에 맞춰 농구 규칙과 기술을 설명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농구를 슬램덩크로 배운 아이들도 있었다. 이쯤에서 구체적으로 3040세대에게 슬램덩크가 어떤 의미인지 짚고 넘어가야겠다.

    [(주)NEW 제공]

    [(주)NEW 제공]

    1990년 연재를 시작한 슬램덩크는 초기만 해도 당시 인기였던 학원폭력물의 흥행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리젠트 헤어, 싸움, 청순한 여학생, 로맨스, 유머는 당시 학원폭력물의 주된 요소였다. 하지만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학원폭력물 요소를 점진적으로 줄이고 스포츠 비중을 늘리면서 슬램덩크는 농구로 성장하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됐다.

    스포츠 만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자신의 한계에 맞서 싸우는 정통 스포츠 만화 ‘내일의 죠’와 ‘캡틴 츠바사’뿐 아니라, 운동부의 사랑을 다룬 아다치 미츠루의 스포츠 로맨스도 인기였다. 명작으로 평가되는 스포츠 만화들이지만 슬램덩크는 더 내밀하게 청춘의 불안과 허무를 위로했다.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는 첫사랑에게 잘 보이려고 농구팀에 든 힘세고 자신감 넘치는 초보자고, 그가 속한 북산고는 열패감에 익숙한 농구팀이다. 이후 개성 있는 주인공이 하나 둘 모이면서 북산고는 언더도그로 나아간다. 북산고는 매 경기 최선을 다하고, 가까스로 승리하지만 때로는 패배한다. 주인공이 힘든 수련 끝에 강해지고 승리를 거머쥐는 소년만화 스토리텔링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지역 강자 해남고와의 지역 결승전 패배는 충격이었다.

    공부든 뭐든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들었는데, 정작 실패를 받아들이는 법은 듣지 못했던 우리에게 슬램덩크는 자라나는 데 필요한 것들을 보여줬다. 책에서 해남고와 경기 종료 후 장면은 다음과 같다. 막무가내에 자유분방한 강백호는 좌절감에 오열하고, 강백호를 혼내던 주장 채치수는 “울지 마라”고 한마디 한다. 채치수에게선 패배를 받아들이는 고고함을, 심기일전해 농구에 열의를 보이는 강백호에게선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자세를 봤다. 이후 라이벌인 능남고와 경기에서 승리한 후에는 반대로 채치수가 오열하고 강백호가 그런 채치수를 위로한다.

    일본 애니 국내 흥행 2위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한 장면. [(주)NEW 제공]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한 장면. [(주)NEW 제공]

    슬램덩크가 보여준 건 코트에서 열정을 불태우는 다양한 청춘이고,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사춘기에 막 들어선 우리도 열정이 있었고, 흘릴 땀이 많았다. 다만 열정을 태울 곳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결국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어른이 됐다. 그때 태우지 못한 열정은 바싹 마른 채 내 안 어딘가에 있는데, 아주 가끔 열정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슬램덩크를 읽고 자란 3040세대에게 슬램덩크는 잃어버린 열정이자 청춘의 나침반이며, 바이블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관람이 새로운 놀이문화로 퍼지고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지난 3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고, 2월 16일 기준 누적 관객수 300만 명을 돌파했다. 참고로 일본 애니메이션 국내 흥행 순위 1위는 2016년 개봉한 ‘너의 이름은.’으로 379만 명인데,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이 기록을 넘어설 가능성이 있다. 근거는 넓어진 관객층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개봉 첫 주에는 3040세대 관객 비중이 70%를 넘었지만, 입소문이 퍼지며 1020세대 관객이 가세하고 있다. 성비는 거의 차이가 없고, 원작 만화를 읽고 온 관객도 많다.

    굿즈 오픈런 현상

    슬램덩크 캐릭터를 코스튬플레이한 관객들도 시선을 끌었다. 2월 11일과 12일 전국 극장에서 진행된 응원상영회는 단시간에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는데 이날 상영회에선 강백호처럼 머리를 붉게 물들이고 북산고 유니폼을 입은 채 상영관을 찾은 관객과 선수 유니폼을 입은 관객, ‘불꽃남자’ 깃발을 들고 온 관객, 강백호와 같은 농구화를 신은 관객도 눈에 띄었다. 극장은 관객들에게 응원용 막대풍선을 나눠줬고,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응원하고 만화에서처럼 구호를 외쳤다. 1월에는 SBS에서 방영한 슬램덩크 애니메이션 주제가 ‘너에게로 가는 길’을 부른 가수 박상민이 극장에서 관객들과 함께 주제곡을 열창했다. 더빙판과 자막판을 모두 관람한 데 이어 각종 이벤트 상영회까지 참석한 n차 관객도 많다. 흥행이 계속되자 CGV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아이맥스 상영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이맥스로 한 번 더 보는 팬들도 생겨날 것이다. 관객들은 슬램덩크가 가진 강력한 IP(지식재산권)를 다양한 방법으로 즐기고 있다.

    슬램덩크 인기는 극장 밖에서도 이어진다. ‘슬친자’(슬램덩크에 미친 자)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로 슬램덩크 굿즈 인기도 상당하다. 서울 여의도 더현대 서울에서 열린 ‘슬램덩크 팝업스토어’에서는 한정판 피겨와 유니폼을 구매하기 위한 오픈런이 밤새 이어졌고, 가로수길 ‘슬램덩크 포토매틱 팝업스토어’는 한 달간 진행됐음에도 매일 밤 긴 줄이 이어져 팝업스토어 기간이 연장됐다. 2월 10일 대구 현대백화점에서 열린 ‘슬램덩크 팝업스토어’에는 오픈런을 하려고 서울에서 연차를 내고 온 직장인도 있었다. 없어서 못 구하는 지경이다 보니 슬램덩크 굿즈는 온라인 중고거래 커뮤니티에서 많게는 4배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

    극장가 열기는 서점가로 이어졌다. 2018년 출시된 ‘신장재편판 슬램덩크’는 영화 개봉 후 한 달 동안 60만 부 넘게 판매됐다. 세븐일레븐은 슬램덩크 만화책 전권 2000세트를 예약 판매하고 있으며, 롯데칠성음료와 함께 ‘슬램덩크 와인’도 선보였다. 2020년 출시된 슬램덩크 모바일 게임도 덩달아 인기다. 영화 개봉 이후 신규 이용자가 647% 증가했다. 게임, 만화, 피겨, 사진 등 슬램덩크 IP가 들어간 물건이라면 뭐든 인기다.

    1020세대가 슬램덩크에 몰입하는 현상에 대해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불가능한 승부를 노력으로 극복한다는 슬램덩크 내용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느낀 좌절감을 위로하고 열악한 상황을 치유하며 나아가는 데 힘이 돼준다”면서 “슬램덩크에서 힘을 얻는다면 그 이야기가 담긴 굿즈는 구매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산왕공고와의 경기 막바지, 강백호는 치명적인 등부상이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다시 코트로 나가겠다고 교체를 요구하며 말한다. “내 영광의 시대는 지금”이라고. 돌이켜보면 슬램덩크를 읽던 시절도, 극장에서 보던 마흔도, 발버둥 치며 생존해온 시간도 모두 영광의 시대였다. 다리를 떨며 최선을 다해 원고를 마감하는 지금도 그렇듯, 언제나 영광의 시대는 지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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