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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늑대화’가 인류 진화의 원동력

‘늑대의 인간화’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기원

‘인간의 늑대화’가 인류 진화의 원동력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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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표현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 제목(약자 ‘개늑시’)으로 쓰이면서 국내에도 많이 알려졌는데, 프랑스어 관용구(Entre chien et loup)에서 나온 표현이다. 저 언덕 너머에서 내게로 다가오는 네 발 짐승이 내가 반가워 달려오는 개인지, 아니면 나를 해치려고 달려드는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해질녘의 어슴푸레한 시간대를 뜻한다. 

여기에는 개는 길들여진 동물이라 안전하고 온순하며 우호적인 반면, 늑대는 야생동물이라 위험하고 음흉하며 호전적이라는 암묵적 전제가 작동하고 있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라는 표현에도 녹아 있다. 

영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주창한 사회계약이 체결되기 전 자연 상태의 인간들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며 쓴 라틴어 표현이다. 라틴어를 탄생시킨 고대 로마인들의 시조가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라는 점을 상기하면 어쩐지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 표현이기도 하다.


개와 늑대는 단일종

늑대를 닮은 개들. 알래스칸 허스키, 웨스트 시베리안 라이카, 저먼 셰퍼드와 알래스칸 맬러뮤트 교잡종(위부터). [늑대를 닮은 개들. 알래스칸 허스키, 웨스트 시베리안 라이카, 저먼 셰퍼드와 알래스칸 맬러뮤트 교잡종(위부터).]

늑대를 닮은 개들. 알래스칸 허스키, 웨스트 시베리안 라이카, 저먼 셰퍼드와 알래스칸 맬러뮤트 교잡종(위부터). [늑대를 닮은 개들. 알래스칸 허스키, 웨스트 시베리안 라이카, 저먼 셰퍼드와 알래스칸 맬러뮤트 교잡종(위부터).]

최근 번역 출간된 ‘최초의 가축, 그러나 개는 늑대다’는 개와 늑대에 대한 이런 통념이 철저히 서구적 편견(Euro-bias)의 산물임을 폭로한다. 미국 캔자스대 진화생물학과 교수 레이먼드 피에로티와 같은 대학에서 원주민 부족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브랜디 R 포그가 공동 집필한 이 책은 개와 늑대의 구별이 가능하다는 통념부터 무너뜨린다. 

사람들은 개와 늑대가 종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생물을 분류할 때 속명과 종명을 붙여 부르는 이명법을 창안한 18세기 스웨덴 박물학자 칼 폰 린네 때부터 그랬다. 생명이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됐다는 창조론자였던 린네는 가축화한 개를 ‘카니스 파밀리아리스(canis familiaris)’종으로, 야생에 사는 회색늑대를 ‘카니스 루푸스(canis lupus)’종으로 구별했다. 



종이 다르면 짝짓기가 힘들고, 짝짓기가 이뤄진다 해도 다음 세대에 새끼를 낳지 못한다. 하지만 개와 늑대는 짝짓기와 후속 세대 생산이 가능하다. 개와 늑대의 교배로 태어난 늑대개를 떠올리겠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견종으로 알려진 저먼 셰퍼드 역시 늑대와 교배로 태어난 새끼들끼리 다시 교배해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견종이다. 게다가 시베리아와 러시아, 중앙아시아 견종인 라이카, 시베리언 허스키, 알래스칸 맬러뮤트, 사모예드 같은 대형 견종은 외형만 놓고 봤을 때 전문가도 늑대와 구별이 쉽지 않다. 

하나의 종으로 규정되려면 조상이 하나여야 한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DNA 연구 결과 개는 세계 곳곳에서 여러 차례에 걸친 교배의 결과물로 탄생했다. 그래서 진화 경로를 나무의 줄기와 가지로 형상화하는 계통수를 그릴 수 없다. 그보다는 다채로운 색실로 영롱하게 짠 태피스트리에 가깝다. 

이런 이유로 미국포유동물학자협회는 개와 늑대를 모두 카니스 루푸스라는 단일종으로 묶었다. 그에 따라 과거 개의 종명이던 카니스 파밀리아리스는 카니스 루푸스의 아종으로 격하됐다. 그 역시 학술적인 정식 계통 분류가 아니다. 일반인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기능형 분류에 불과하다.


최초의 가축

그럼에도 애견가들은 그 기능형 아종명인 카니스 파밀리아리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가족(familiaris)의 뜻이 들어간 유일한 종명이라는 점에서 인간에게 가족 같은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표현은 노예화된 늑대라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카니스 루푸스의 기원을 추적할 때는 길들여진 개가 아니라 야생 늑대의 특별한 위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등장한다. ‘그럼 개는 언제 가축화됐을까’ 하는 질문과 ‘왜 가축화됐을까’ 하는 질문이다. 20세기 후반까지 아주 강력한 가설이 존재했다. 인간이 농경생활을 시작한 1만 년 전후로 인간 정착지의 쓰레기 더미에서 음식을 뒤져 먹던 늑대가 가축으로 길들여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벨기에 고예동굴에서 3만5000년 전후 구석기시대 개의 머리뼈가 발굴되면서 농경시대 전부터 늑대의 가축화가 이뤄졌을 개연성이 대두됐다. 또 다른 가설은 인간이 늑대 굴에서 새끼늑대를 훔쳤다는 것이다. 

이 두 가설은 야생 늑대를 악마화한 서구 기독교 문명권 학자들의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 거기엔 늑대는 온대지역 최상위 포식자라는 점에서 인간의 경쟁자이며, 개는 그런 늑대를 길들여 인간화(노예화)한 것이라는 인간 중심적 인식 틀이 작동하고 있다. 

반면 피에로티와 포그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우호적 늑대관에 주목한다. 원주민 설화 속 늑대는 결코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정반대로 동반자, 친구, 스승, 심지어 창조자다. 원주민에게 먹이를 양보하고, 사냥 기술을 가르쳐주며,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재탄생시킨 존재로 그려진다. 그리고 결국 유럽인의 침입으로 멸종 위기에 몰린 늑대와 원주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데 이른다. 

또한 서양인들이 늑대의 가축화가 처음 이뤄졌다고 생각했던 중앙아시아 일대 알타이 민족의 창조 신화에선 늑대가 그들 민족의 조상으로 형상화된다. 여기엔 일본 원주민인 아이누족도 포함된다. 19세기까지 일본은 늑대(오카미) 친화적 나라였다. 당시 일본은 고기 섭취를 위해 소 같은 유제류 가축을 키우지 않아 늑대로 인한 피해보다 늑대가 농작물을 엉망으로 만드는 사슴과 멧돼지를 잡아먹는 이로운 동물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일본인은 사나운 산개(야마이누)보다 늑대를 좋아했으며, 아이누족에겐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서구 문물이 들어오면서 일본 늑대는 멸종됐다. 

인류와 늑대의 초기 교류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례가 있다. 호주에 서식하는 야생 갯과동물 딩고다. 딩고는 외형은 개와 비슷하지만 행태는 늑대에 가깝다. 그래서 멍멍 짖지 않고 울부짖는다. 5500년 전쯤 호주로 유입된 딩고는 인간을 제외하곤 호주 대륙에 존재하는 유일한 대형 태반 포유동물이다. 5만 년 전쯤 호주대륙으로 들어온 원주민은 동남아에서 개로 길들여졌을 개연성이 큰 딩고를 억지로 가축화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같이 사냥해 먹이를 나누거나, 추운 날 껴안고 잠자는 식으로 편리공생 관계를 맺었다. 

따라서 인간이 수렵채집 생활을 할 때부터 늑대와 공존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런 수천 년의 공진화 과정에서 가축화된 늑대로서 개가 출현했을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공진화다.


늑대의 인간화 vs 인간의 늑대화

[사진 제공 · 뿌리와이파리]

[사진 제공 · 뿌리와이파리]

그 가설에 따르면 한 쌍의 암수와 그 새끼들로 이뤄진 늑대 무리는 알파암컷만 임신이 가능하다. 다른 암컷이 새끼를 낳으면 알파암컷이 물어 죽인다. 알파암컷이 아닌 젊은 암컷이 새끼를 뱄다. 무리에 남아 있으면 새끼를 지킬 수 없어 다른 무리를 찾아 떠난 이 암컷은 인간 부락을 발견했다. 멀리서 보니 인간은 늑대를 닮은 사회적인 종이었다. 그래서 그 주변에 머물며 사냥으로 먹고 살았다. 그러나 배가 불러와 사냥이 힘들어졌을 때 인간들이 먹이를 가져다줬다. 

덕분에 새끼를 낳고 기를 수 있게 된 늑대는 새끼늑대들을 데리고 인간의 사냥을 돕기 시작했다. 늑대가 사냥감을 몰아주면 인간이 잡아 나눠 먹게 된 것이다. 그것과 함께 분업화한 늑대의 사냥법을 터득한 인간은 곧 사냥을 가장 잘하는 집단이 됐다. 생존 경쟁력에서 다른 집단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과 늑대는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인간과 친해진 늑대 가운데 일부는 인간 속에 섞여 살며 인간에 의존적인 개가 됐고, 다른 일부는 야생에서 독립적인 삶을 지켜갔다. 

20세기 후반이 되면서 이를 지지하는 일군의 과학자가 등장했다. 대다수 유인원은 수컷이 지배적인 일부다처제로 살아간다. 그래서 대부분 수컷이 암컷보다 월등히 크다. 그런데 인간만큼은 그 차이가 적을 뿐 아니라 일부일처제를 유지한다. 왜 그럴까. 네안데르탈인에겐 없었지만 호모 사피엔스에겐 있었던 것, 바로 늑대와 공진화다. 

공진화는 상호작용이다. 늑대의 가축화로 개가 만들어졌듯이, ‘인간의 늑대화(lupification)’로 사냥 기술 발달과 일부일처제 정착,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서 의리의 중요성이 커졌을 개연성이 있다. 여기서 인간의 늑대화는 ‘유인원의 인간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서구적 늑대관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독일 동물행동학자 볼프강 슐라이트가 1998년 발표한 ‘개에게 인간성이 있는가’라는 도발적 논문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연구 흐름이다. 

슐라이트는 현생 인류의 학명을 ‘호모 호미니 루푸스’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홉스의 늑대관을 통렬하게 뒤집은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늑대화는 공존과 번영, 평화를 낳았다. 반대로 ‘늑대의 인간화’는 그런 늑대의 노예화, 식민화, 멸종위기를 불러왔다. 늑대의 인간화 귀결점은 서구 제국주의이고 식민주의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늑대에게 덧씌워진 저주를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같은 인간을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로 파악한 제국주의적 발상에서 벗어나는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서부영화 속 인디언에 대한 통념을 전복한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제목이 ‘늑대와 춤을’이었다는 사실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간동아 2019.08.30 1204호 (p4~7)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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