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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양구의 지식 블랙박스

전염병, 지금까진 운이 좋았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전염병 백신 만들려면 수개월 걸려

전염병, 지금까진 운이 좋았다

의학이 발달해도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처하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shutterstock]

의학이 발달해도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처하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shutterstock]

비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2003년 1월 중국 광둥성에서 괴질로 몇 개월째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중국 당국의 엄격한 통제에도 이 소문은 인터넷을 타고 전 세계로 퍼졌다. 그 무렵 광둥성 광저우의 한 의사가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2월 21일 홍콩을 방문했다. 며칠 전부터 몸이 좋지 않던 의사는 한 호텔 9층에 투숙했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2월 26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한 사업가가 괴질로 쓰러졌다. 곧이어 3월 1일엔 싱가포르에서 한 항공기 승무원이, 또 사흘 뒤에는 캐나다 토론토의 중년 여성이 사망했다. 그 의사와 같은 호텔 9층에 묵었던 투숙객 9명이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었다. 

순식간에 9명의 목숨을 앗아간 괴질은 곧바로 베트남, 캐나다, 홍콩의 병원 직원들 사이에서도 퍼졌다. 싱가포르에서 발병한 항공기 승무원을 치료한 의사와 그 가족도 사망했다. 곧이어 유럽에서도 환자가 발생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 병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즉 사스(SARS)라고 이름 붙였다.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보건당국 관계자들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방역 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보건당국 관계자들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방역 작업을 하고 있다. [뉴스1]

이렇게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사스는 약 8개월 동안 26개국에서 8500여 명을 감염시켰다. 그 가운데 916명이 사망했다. 사스의 원인은 감기 증세와 설사를 일으키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이었다. 2015년 7월에 이어 2018년 9월 7일 약 3년 만에 다시 한국을 공격한 중동호흡기증후군, 즉 메르스(MERS)도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이다. 

쿠웨이트를 다녀온 환자가 메르스 확진(9월 8일)을 받은 지 나흘밖에 안 된 시점(9월 12일)이라 낙관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이번 메르스의 2차 공격은 조기 진압 가능성이 크다. 비행기와 공항을 거쳐 병원으로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환자와 다른 사람의 접촉이 있긴 했다. 하지만 2015년 그렇게 환자가 많았을 때도 병원 아닌 일상생활에서 메르스 감염 사례는 없었다. 

더구나 사스, 메르스 같은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감염병)은 잠복기 감염이 드물다. 숙주(환자) 몸속으로 들어간 바이러스가 며칠간 증식하고 나면 비로소 증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렇게 증상이 나타날 때 바이러스는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몸 밖으로 나온다. 그러니 증상이 없는 잠복기 상태의 메르스 환자와 접촉했다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과학자 상당수가 2003년 사스가 유행할 때 21세기 첫 바이러스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밝혀지자 가슴을 쓸어내린 것도 이 때문이다. 사스나 메르스는 증상이 나타난 환자만 찾아내 격리하면 추가 감염을 막을 수 있다. 2003년 사스가 유행할 때 대한민국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공항에서 증상이 나타난 사스 의심 환자를 무조건 잡아 격리했다. 

만약 21세기 첫 전염병이 사스가 아니라 ‘인플루엔자’였다면 상황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인플루엔자? 맞다. 매년 겨울 우리를 괴롭히는 독감이 바로 인플루엔자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변종을 일으키고 있다. 2009년에는 ‘신종플루’로 불리던 새로운 ‘인플루엔자 변종(H1N1)’이 유행해 전 세계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다르다. 인플루엔자 감염 환자는 증상이 나타나기 하루 이틀 전부터 이곳저곳에 희생자를 만들고 다닌다. 더구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환자가 기침 또는 재채기를 하거나 말을 할 때 공기 중으로 전파된다. 2009년 유행한 신종플루가 얼마나 빨리 전 세계로 퍼졌는지 떠올려보라. 

다행히 신종플루는 감염력에 비해 살상력이 강하지 않았다. 신종플루를 일으킨 H1N1 바이러스는 이제 계절성 인플루엔자가 돼 독감백신으로 예방할 수 있다. 만약 신종플루가 사스나 메르스 정도의 살상력을 가졌다면 2009년에 세상은 어떻게 됐을까. 괜히 겁주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 과학자가 걱정하는 게 바로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판데믹)이다.


더 ‘센 놈’을 두려워하라!

상당수 과학자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변종이 일으키는 조류인플루엔자(Avian Influenza·AI)다. AI 바이러스는 평소에는 조류에 기거하다 돼지 같은 숙주에서 다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유전자를 맞바꾸는 일을 통해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돼지는 조류 바이러스와 인간 바이러스가 모두 기거할 수 있어 거대한 돌연변이 공장으로서 기능한다. 

이렇게 새롭게 발생한 AI 바이러스 가운데 어떤 것은 숙주를 조류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조류와 인간의 종 간 장벽을 뛰어넘어 감염을 일으킨다. 1997년 홍콩에서 6명의 목숨을 앗아가며 세상에 등장한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변종(H5N1)이 그랬다. 치명률 60%에 달하는 H5N1은 다행히 감염력이 세지 않았다. 

만에 하나 신종플루의 감염력과 H5N1의 살상력을 동시에 지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변종이 나타나 세계를 덮친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역사에 그런 일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H1N1)이 그것이다. 스페인 독감은 당시 세계 인구 약 5%의 목숨을 앗아갔다. 

10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의학이 발달했는데 설마 그 정도로 피해를 보겠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100년 전과 비교할 때 백신과 항바이러스 치료약이 등장한 것은 맞다. 하지만 변종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시작하면 현 백신은 당장 무용지물이다. 변종 바이러스의 정체를 파악해 백신을 완성하기까지 최소 수개월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항바이러스 치료약도 변종 바이러스 대유행이 시작되면 금세 준비 물량이 동난다. 결국 1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바이러스가 유행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환자의 이동을 통제하고 증상이 나타난 환자를 격리, 관리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100년 전과 비교하면 이마저도 쉽지 않다. 

이번 메르스 전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비행기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지구촌은 훨씬 더 가까워졌다. 100년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인권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뚜렷한 법적 근거 없이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인류 문명의 발전이 역설적으로 바이러스가 활동하기에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준 것이다. 

2003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5년과 2018년 메르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것이 나타나 우리를 덮칠까. 지금까지 인류는 운이 좋았다.




주간동아 2018.09.19 1156호 (p96~97)

  • | 지식큐레이터 imtyi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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