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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봉이 만난 영화, 영화인|‘추격자’의 하정우

평범한 듯 살벌한 살인마의 광기 발산

평범한 듯 살벌한 살인마의 광기 발산

평범한 듯 살벌한 살인마의 광기 발산
그는 잔인하다. 못과 망치를 이용해 사람을 죽인다. 사람의 머리에 못을 대고 망치로 내려친다. 관객들은 이렇게도 살인할 수 있구나 하고 살인의 끔찍함과 잔혹함을 몸서리치게 느끼겠지만, 그럴수록 그의 얼굴에서는 쾌감의 미소가 번진다. 왜 그런 도구를 이용해 사람을 죽였느냐고 묻자 “목도 졸라보고, 칼로도 해봤는데 애들이 되게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러다 돼지 잡는 걸 보고 그렇게 했어요”라고 대답하며 히죽 웃는다. 실제 연쇄살인을 저지른 유영철 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영화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마 지영민 역을 맡은 배우는 하정우다.

하정우의 본명은 김성훈. 탤런트 김용건의 아들인 그는 연예인 2세 중 한 사람이지만 빠른 시간 안에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브랜드를 확보했다. 누구의 아들로 기억되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한 사람의 배우가 되겠다는 욕망이 실제 이름과는 전혀 다른 하정우라는 이름을 갖게 했을 것이다.

1978년생인 그는 20세 때인 98년 배스킨라빈스 CF 모델로 데뷔해 ‘마들렌’ ‘잠복근무’ ‘프라하의 연인’ 등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2005년)를 통해서다. 군대의 고참과 신참 사이의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하정우는 비로소 자신만의 색깔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강렬한 남성적 힘과 섬세한 여성적 부드러움이 공존한다. 그의 선한 눈빛에는 악마적 매혹 또한 숨겨져 있다.

하정우는 이어 김기덕 감독의 ‘시간’ ‘숨’ 등을 통해 조재현에 이은 김 감독의 페르소나로 등장했다. 그는 ‘시간’(2006년)으로 판타스포르토 국제영화제 감독주간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재미교포 김진아 감독의 ‘두 번째 사랑’(2007년)으로 도빌 아메리카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하정우가 대중적으로 가장 가깝게 다가간 작품은 지금까지의 젠틀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연쇄살인마 역을 맡은 ‘추격자’다. 올해 한국영화가 거둔 빛나는 성취의 하나로 기억될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는 신인감독의 광기에 가까운 열정이 묻어나는 작품이지만, 대중은 주연을 맡은 김윤석과 하정우의 연기를 통해 그 열기를 전달받는다. 작품의 든든한 버팀목 구실을 하는 김윤석의 연기도 일품이지만 연쇄살인마 역을 맡아 소름 끼치도록 냉정하고 잔혹한 연기를 하는 하정우의 변신은 충격적이다.

“지영민은 출장안마 여성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이다. 그가 살인하는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어린 시절의 상처일 수도 있고 여자를 향한 막연한 복수심일 수도 있다.”

이미 영화 속에는 수많은 연쇄살인마가 등장했다. 자칫 식상한 캐릭터가 될 수 있는 연쇄살인마를 하정우는 매우 독창적으로 연기한다. ‘추격자’에서 지영민을 맴돌고 있는 불안한 공기는 전적으로 하정우가 창조한 것이다. 정형화된 연기가 아니라 실제 살인마의 내면에 밀착해 불안하게 떠도는 공기까지 포착하려는 그의 섬세한 노력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지영민이라는 캐릭터는 사이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의 상투성을 벗어난다.

평범한 듯 살벌한 살인마의 광기 발산

‘추격자’에서 하정우는 기존의 젠틀한 이미지를 탈피한, 연쇄살인범의 독특한 야수성을 깊이 있게 표현해낸다.

지금까지의 젠틀한 이미지 벗고 연기 변신 성공

연쇄살인마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세계적으로도 넘쳐난다. 국내에서는 화성 연쇄살인을 소재로 한 ‘살인의 추억’ 등이 있고, 할리우드 영화로는 연쇄살인마의 섬뜩함을 심리학적으로 접근해간 ‘양들의 침묵’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연쇄살인은 인간의 삶 중에서도 아주 극단적인 현상이지만, 일상을 벗어나는 특별한 소재는 영화 속에서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보편적 접근이 용이하게 각색된다. 우리의 기억에서 잊히기 힘든 유영철 사건을 모티프로 창조된 것이 분명한 ‘추격자’의 시나리오는 그러나 단순히 연쇄살인마를 소재로 한 공포나 스릴러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영화의 미덕은 연쇄살인마를 추격하는 수직적 동선이 팽팽하게 살아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수많은 삶의 모습이 섬세하게 살아나 있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접근했다. 살인에 대한 죄의식은 전혀 없고, 취미로 사람을 죽이는 인물로 생각했다. 지영민은 사회성이 없지만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해서는 프로페셔널한 의식이 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대처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인물이다.”

‘추격자’에서 지영민의 정체는 일찍 노출된다. 누가 범인인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범인을 조기에 드러내는 것은 작중인물과의 동일시가 아닌, 관객을 객관적 위치에 놓고 게임을 풀어가겠다는 뜻이다. 나 감독은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소재를 요리해 나간다.

나 감독은 하정우에 대해 똑같은 테이크가 하나도 없는, 가장 창의적인 배우라고 극찬한다. 적어도 나 감독이 하정우의 연기를 보고 NG를 내는 것은 No Good, 즉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연기 말고 또 다른 연기를 보여달라는 뜻이다.

“하정우는 세포를 가지고 연기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감독에게 다 보여준다. 시간도 없는데 빨리 자신을 파악해 가장 좋은 것을 쓰라는 뜻이다.” 하정우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의 도시 일상에 찌든 현대인이나 김기덕의 ‘시간’ ‘숨’에서 보여준 회색빛 도시의 감각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폐쇄적이며 무섭도록 집착이 강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갖는 원시성과 야수성을 깊이 있게 드러낸다.

하정우가 지영민을 연기하면서 최우선적으로 생각한 것은 일상적인 자연스러움이었다. “나는 연쇄살인마라는 생각을 버렸다. 그냥 주변에서 만나는 평범한 인물을 만들려고 했다. 무엇보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연기하려 했다.”

보통사람 같은 일상적 연기가 오히려 공포 연출

지영민은 경찰서 지구대에서 수사를 받으면서 여자 형사를 보자 “생리하시나 봐요.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게”라고 말할 정도로 철면피한 남자다. 편집증 강박증 같은 연쇄살인마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증세는 있지만, 하정우의 연기는 특별하게 튀지 않는다. 우리 주변의 보통사람 같은 그의 일상적 연기가 오히려 더 끔찍한 공포를 자아낸다.

“밖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안을 보는 느낌으로 5개월 동안 촬영했다. 지금도 하정우가 아닌 지영민이 되어 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촬영이 끝났지만 아직도 내 몸 어딘가에 지영민이 있는 것 같다. 그의 습성이나 패턴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어 일상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다. 담배도 늘었다. 그러나 ‘추격자’를 끝내고 나니 마침표 하나를 찍은 느낌이다.”

‘추격자’는 스릴러와 공포 어느 장르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연쇄살인마의 상투적 도식성을 탈피하며,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팽팽한 동선 위에 인간 본성에 대한 섬세한 탐구를 통해 살아 있는 드라마를 보여준다. 쫓기는 자인 지영민 역의 하정우는 관념적 살인이 아닌, 관객들이 현실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살인의 공포를 창조한다.

하정우는 현재 그를 연기자로 인정받게 만든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윤종빈 감독과 함께 ‘비스티 보이즈’의 촬영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리고 전도연과 ‘멋진 하루’라는 신작의 촬영을 시작한 상태다. 한국영화 차세대 남자배우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하정우의 다음 행보를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창조력 넘치는 에너지로 새로운 인물을 보여주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주간동아 2008.03.04 625호 (p78~80)

  • 하재봉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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