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사람 이긴 게 처음도 아닌데 뭐 이렇게 호들갑인지. 다들 어디서 오랫동안 자다 왔나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알파고 vs 이세돌’ 대전에 대한 이어령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장의 반응이다. 그는 “사람이 체스게임에서 컴퓨터한테 진 게 벌써 19년 전 얘기다. 무인자동차가 인간이 운전하는 자동차보다 사고발생률이 낮은 것도 이미 온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얘기”라며 “바둑 역시 데이터를 바탕 삼아 최적의 답을 찾아내는 게임이라는 점에서 앞선 사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김진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빅데이터 MBA과정 교수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대국 전부터 알파고의 ‘5-0’ 승리를 내다본 김 교수는 “바둑을 ‘직관과 통찰의 게임’이라고 하는 건 무수한 경우의 수(數)가 있는 상황에서 각각의 수(手)를 계산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컴퓨터가 수를 둘 때마다 이길 확률을 치밀하게 계산해 돌을 놓는다면 사람이 ‘감’만으로 이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다”는 얘기다. 김 교수는 “직관이 계산을 이기는 건 계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뿐”이라고 덧붙였다.
인공지능의 압도적 우위
김대수 KAIST(한국과학기술원) 생명과학과 교수가 “알파고의 승리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인공지능 기술력이 아니라 컴퓨터 정보처리 속도의 발전”이라고 밝힌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김 교수는 “많은 언론이 알파고의 학습능력에 주목하는데 사실 알파고가 기보를 익히고 바둑 실력을 기르는 데 사용했다는 강화학습 방법은 인공지능 분야에서 ‘기초 중 상(上)기초’ 단계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파블로프의 개’나 ‘스키너의 상자’ 실험 등을 통해 인간은 일찍부터 뇌 신경망의 작동 방식에 대해 알았거든요. 반복 시도와 시행착오 교정을 통해 사고능력을 발전시키는 프로세스는 이미 과학적으로 충분히 규명돼 있어요. 그걸 기계에 이식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김대수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이미 많은 인공지능이 이런 능력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학습량과 정보처리 속도가 알파고 수준에 이르지 못했을 뿐이다. 미국 인터넷 기업 구글에 따르면 알파고가 2014년 개발된 후 지난 2년간 습득한 바둑판 정보는 약 3000만 개. 사람이 1000년 동안 바둑만 둬야 도달할 수 있는 양이다. 이번 대국을 앞두고는 3주 동안 약 3억4000만 번의 반복학습도 거쳤다. 그 뒤 이세돌 9단 앞에 바둑돌을 내려놓는 순간, 이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순식간에 검토해 ‘최선의 수’를 골라냈다. 그 배경에 있는 게 강력한 컴퓨팅의 힘이라는 얘기다.
과학계에서는 현재 알파고의 성능을 약 5000대의 최고 성능 컴퓨터가 동시에 구동되는 수준으로 보고 있다. 우리 눈에는 알파고가 한국에서 랩톱 형태로 이세돌 9단 앞에 ‘앉아 있는’ 듯 보이지만 실체는 미국 중서부 구글 데이터센터에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대국장에 놓인 컴퓨터는 초고속통신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진짜 알파고’의 판단을 전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러니 전문가들이 “현재 인공지능 기술은 이미 바둑에서 ‘인간 최고’를 이길 만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구글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확보하고, 클라우드 컴퓨팅으로 지원해 이를 실현했을 뿐”이라고 입을 모으는 것이다.
강홍렬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설명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사람과 컴퓨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람 신경세포는 1초에 열 번 안팎으로 작동하지만 컴퓨터는 20조 번 작동한다”고 했다. 인간은 이제 어떤 종목이 됐든, 그것이 특정 인풋을 통해 특정 아웃풋을 도출해내는, 규칙이 정해진 시뮬레이션 게임일 경우 인공지능에 맞서기 힘들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다.
이어령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장은 “나는 사람들이 알파고 승리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놀랐다. 그동안 수많은 과학자와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인공지능 기술의 위협에 대해 경고하지 않았나”라며 “이번 대국이 대중에게 인공지능의 실체에 대해 좀 더 분명히 알게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평했다.
문제는 알파고의 승리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 전반에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 등에서 묘사된 ‘인공지능의 인간 지배’가 머지않아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66쪽 기사 참조). 인공지능학자인 제리 카플란 미국 스탠퍼드대 법정보학센터 교수는 저서 ‘인간은 필요 없다’에서 인공지능이 발달한 시점의 지구를 ‘햇빛과 고독만이 존재하는 유리 사육장에, 모두의 이익을 위해 우리가 맞아들였던 기계 경호원들이 가끔씩 끼어들어 모두 순조롭게 돌아가는지 살피는, 벽과 담장 없는 동물원’이 될 수 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감성 없는 지성
다른 과학자들 중에도 인공지능의 혁신이 인간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적잖다. 구글에서 인공지능 분야를 연구 중인 과학저술가 레이 커즈와일은 저서 ‘특이점이 온다’에서 2045년이 되면 사람 뇌 안에 나노 로봇을 넣어 뉴런의 상태와 활동을 인공지능 시스템에 업로드하는 기술이 개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때가 되면 기계가 지금 같은 인간의 보조장치 수준에서 벗어나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될 거라는 게 커즈와일의 전망이다. 미국 컴퓨터과학자 빌 조이도 나노테크놀로지와 로보틱스, 유전공학이 합쳐지면 개인의 두뇌 전체를 생체로봇에 다운받을 수 있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미래에 도달하기까지, 아직은 갈 길이 멀다고 주장하는 이도 적잖다. 특히 연산을 벗어난 분야에서는 인공지능이 걸음마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가 있다. 현재 수많은 인공지능학자는 기계가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수준의 감정을 갖도록 하는 데 연구를 집중하는 상태다. 특히 인간의 감정과 느낌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진 시각, 청각, 후각 및 촉각 분야 연구가 활발하다. 미국 MIT 감성컴퓨팅 연구팀은 컴퓨터가 사람의 얼굴 표정, 눈의 움직임 등을 인식해 감정을 읽는 능력을 모방하는 기술을 개발 중이고, 음성인식 인터페이스가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짜증을 읽어낼 수 있는 방법도 찾고 있다. 또 다른 연구자 그룹은 기계 표면에서 아홉 종류의 서로 다른 정서적 감촉, 즉 간질이기, 찌르기, 긁기, 찰싹 때리기, 쓰다듬기, 토닥거리기, 문지르기, 누르기 접촉 등을 인식하도록 설계한 신경망 장치 ‘허거블’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들 장치는 아직 인간의 ‘인풋’을 인식하고 미리 설계된 프로그램에 따라 적절한 ‘아웃풋’을 내놓을 뿐, 스스로의 판단에 따른 감정적 대처는 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허거블’의 경우 요양병원 환자 등이 ‘자신’을 안거나 쓰다듬으면 해당 접촉 및 자극의 강도에 따라 서로 다른 여섯 가지 반응을 보이지만, 이는 약속된 결과에 불과하다. 이런 약속된 반응이 언젠가 진짜 감정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존 설 미국 버클리대 철학과 교수가 저서 ‘마인드’에서 ‘인간의 지능이나 정서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수많은 진화과정을 통해 환경이 제공하는 복잡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진화의 산물’이라며 ‘이 과정은 두뇌에서 일어나지만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질적 특성을 가진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감성을 가진 인공지능 컴퓨터 운영체계(OS)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그녀(Her)’에서도, 주인공인 OS 서맨사는 연인 테오도르에게 “What’s wrong?”이라고 물어놓고는 테오도르가 “How can you tell something’s wrong?”이라고 되묻자 “I don’t know. I just can”이라고 답하고 만다. ‘wrong’이라는, 인간이 삶과 진화를 통해 습득한 그 감정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치아 카쿠 미국 뉴욕시립대 물리학과 교수 역시 저서 ‘마음의 미래’에서 ‘인공지능은 큰 발전을 이뤘다. 특히 인공지능을 이용한 계산능력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개선됐다. 그러나 ‘생각하는 기계’를 만드는 분야의 발전 속도는 지루할 정도로 느리다. 아직 로봇은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고 평했다.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승리했을 때 환호한 것이 알파고 ‘본인’이 아니라 알파고 개발사 구글 딥마인드 관계자들인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알파고는 현재 자신이 바둑을 두고 있다는 점, 그것이 승부를 가르는 스포츠이며 자신의 승리가 사회 전반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 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과학계 정설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 상태에서 인공지능의 경쟁력이 되기도 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간이 기계와의 승부에서 불리한 이유 중 하나는 감정이 있다는 점이다. 한 실험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이 과거에 분노했던 경험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기억력과 계산력이 떨어진다. 이세돌 9단 역시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감정적으로 흔들려 평소답지 않은 실수를 수차례 했다는 평을 들었다”고 밝혔다. 반면 상황 인식능력이 아예 없는 지성체 알파고는 수 싸움에서 밀려도 당황하지 않고, 승기를 잡은 뒤에도 흥분하지 않으며 끝까지 차분하게 경기를 이끌었다.
“기계가 못하는 일을 찾아라”
이런 인공지능의 속성은 최근 많은 영역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미국 예일대 ‘생명윤리를 위한 학제간 센터’ 연구자 웬델 월러치는 저서 ‘왜 로봇의 도덕인가’에서 ‘인공지능은 현재 논리적인 플랫폼에서 개발되고 있다. 이런 점은 도덕적 과제에 대응하는 면에 있어 컴퓨터가 인간 두뇌보다 더 나은 어떤 장점들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밝혔다. ‘컴퓨터는 어떤 과제에 대응하면서 더 넓은 범위의 가능성을 계산할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이 고려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사항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NIH) 연구팀은 2007년 의사표시를 하기 어려운 상태의 위독 환자에게 적합한 치료법을 결정할 때, 친지의 의견을 듣는 것과 컴퓨터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 가운데 어느 편이 나은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또 상당수 병원이 수십만 건의 환자 질병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인공지능이 바람직한 치료 방법을 제안해주는 ‘의사결정지원도구(Decision Support Tools)’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전기자동차업체 테슬라의 설립자 일론 머스크는 지난해 3월 한 기술 콘퍼런스에서 “앞으로는 사람이 자동차를 직접 운전하는 것이 불법화될 것이다.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많은 이가 인공지능이 사람의 감정을 흉내 내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해도 지금까지 인간이 수행해온 많은 역할을 빼앗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삶에 충분히 위협적이라고 말한다.
지구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인간은 고도의 지능을 필요로 하는 일, 질병 진단이나 법률적 판단, 심지어 운전이나 바둑 등의 활동도 독점적으로 향유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영역에서 기계는 인간에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경쟁자가 되고 있다.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다보스포럼)에서 WEF는 ‘디지털과 바이오산업, 물리학 등의 융합’을 바탕으로 새로운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여파로 향후 5년 동안 선진 15개국에서만 약 510만 개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밝힌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인간만의 영역
이에 대해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장(수학박사)은 “알파고의 이세돌에 대한 승리는 이러한 변화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기계의 지능이 매우 빠른 속도로 인간을 추월하고 있음을 확인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그가 지적하는 문제는 그럼에도 우리 교육이 여전히 산업시대의 패러다임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박 소장은 “우리 학생들이 지금처럼 학교에서 단순하고 반복적인 학습만 계속할 경우 머지않아 시작될 기계와의 경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 사람만 할 수 있는 일, 스스로 사고하고 창의력을 발휘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방향으로 교육체계 전반을 개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김대식 KAIST 전기및전자과 교수도 저서 ‘이상한 나라의 뇌과학’에서 ‘인간 뇌가 만들어내는 대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답 또는 질문이다. 세상이 우리에게 던진 문제에 대한 답을 찾던 것이 지금까지의 경제라면, 우리가 던진 문제를 세상이 풀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최근 개봉한 영화 ‘캐롤’에서 사랑에 빠진 주인공에게 친구는 “특정한 어떤 사람이 좋아질 때도 있지. 그 사람에게 끌리거나 끌리지 않는 이유는 알 방법이 없어. 우리가 아는 건 그 사람에게 끌리느냐 아니냐 뿐이야”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은 결코 해석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인간만의 영역, 그것이 인류의 희망이자 가능성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