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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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나도 촌닭…화엄의 삶 ‘이문구 생각’

소설가 한승원, 이문구 10주기 추도 “‘관촌수필’처럼 그리움 새록새록”

  • 한승원 소설가

    입력2013-03-04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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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도 나도 촌닭…화엄의 삶 ‘이문구 생각’

    2월 26일 ‘이문구를 생각하는 밤’ 모임에서 한승원 작가가 이문구에 대한 추억을 말하고 있다.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였다. ‘이문구를 생각하는 밤’에 함께 자리하려고 전라도 바닷가 해산토굴에서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연희문학창작촌까지 천 리 길을 달려갔다. 이날은 이문구가 작고한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10주기를 맞아 그를 그리워하고 그의 삶과 문학을 생각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나는 이문구를 회고하는 이야기를 하기로 돼 있어 약간은 우울해하면서, 그에 대한 만감에 젖은 채 갔다. 차례가 되자 나는 단상으로 나가 고인을 회고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내가 22세, 명천 이문구는 20세 되던 해 봄, 서울 미아리 고개에 있는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강의실에서였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떨고 있었다. 흥분했기 때문일까, 이승과 저승으로 갈린 서로의 처지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를 늘 꿈속에서 만나곤 한다. 그가 죽어 저승에 간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이야기를 이었다.

    “그 문예창작과 강의실에는 당시 아무아무대학 문학 콩쿠르에서 장원 혹은 최우수상, 우수상을 수상한 경력을 가진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강의실은 장차 소설가 이문구, 박상륭, 조세희, 한상윤, 시인 이세방, 이건청, 그리고 나를 배출할 열기가 수런대고 있었지요. 시쳇말로 하면 별들이 번쩍거렸습니다. 그때 이미 시인으로 등단한 이세방, 후에 ‘난장이’ 연작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조세희를 비롯한 많은 내로라하는 청년 문학도가 그 강의실에 모여 있었던 것입니다. 한데 나와 이문구만 아무 별도 달지 않은, 시골에서 갓 잡아다 놓은 촌닭이었습니다.”

    김동리 선생의 충격 예언



    내 이야기를 듣는 좌중은 숙연했다.

    “소설가 김동리 선생이 소설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동리 선생 수업은 학생이 제출한 작품 한 편을 교탁 위에 놓고, 발음 좋고 목청 좋은 학생 한 명을 불러 낭송하게 하고 학생 50여 명과 교수가 귀를 쫑그리고 들은 다음, 눈 초롱초롱 밝은 학생들에게 평을 하게 하고 맨 나중에 총평하는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학기 초 맨 처음 소설을 제출했고, 번쩍거리는 별을 달고 있는 영웅심 가득한 청년 문사들에게서 감상이라는 뭇매를 맞은 바 있었습니다. 다음에 이문구가 소설을 제출했는데, 그때도 한 학생이 교탁에 작품을 놓고 읽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작품은 한 남자가 서울행 기차를 타고 가면서 사랑에 고뇌하다가 투신자살하는 줄거리였습니다. 나긋나긋한 만연체의 아름다운 문장이었는데, 아마 ‘기차는 레일을 훑었다. 장사꾼들의 말은 사이소에서 사시유로 바뀌었다가 사세요로 바뀌었다’ 이런 것이 들어 있었던 듯싶습니다. 낭송이 끝나자 학생들은 문장에 대한 것은 제쳐 놓고 문학적 성과, 줄거리, 사건, 주제의 빈약성과 감상성에 대해 찍고 까기 바빴습니다. 한데 총평을 하는 동리 선생 표정은 진지하고 냉철했습니다. 원고를 이리저리 넘겨 보던 동리 선생은 ‘이 학생은 장차 우리 한국 소설문학계에서 대단한 스타일리스트가 될 것입니다’ 하고 예언했습니다. 이문구의 소설을 찍고 까던 학생들은 모두 면목 없어 하면서도 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리고 학기 끝 무렵 기말고사를 치렀는데, 동리 선생은 칠판 한가운데에 이렇게 시험문제를 출제했습니다. ‘이문구의 소설에 대해 써라.’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자기들이 찍고 까고 두들겨 팼던 이문구의 소설에 대해 아는 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회고의 말을 끝냈다.

    “나보다 두 살 연하였지만, 그는 마치 형처럼 당시 광주에서 교직에 있던 삼십대 초반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충고를 하고 개안을 하게 했습니다. 바다 이야기를 한 번 파고들어 보라고 충고한 것도 그였지요. 그리하여 나는 바다 생태와 역사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포용하며 사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포용하는 화엄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문구를 생각하는 밤’은 한국작가회의가 주관한, 조촐하고 조용한 추모 성격을 띤 만남의 자리였다. 이문구 생전 그와 각별한 사이였던 후배 시인 이시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은 이문구의 삶과 역정을 잘 아는 만큼 그를 진실로 사랑하고 아끼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친구와 선후배들) 40명만 연희문학창작촌 한 방에 초대했다. 사실 유족 측에서 조용하게 치러달라 청을 하여 그리 되었다고 한다. 그가 유언으로 “내 이름으로 된 상도 만들지 말고, 문학상도 만들지 말고, 문학비도 세우지 말고, 문학관도 짓지 마라”했던 것이다.

    그의 성품처럼 모두가 추억함

    어떤 문제든 크게 떠벌리기 좋아하는 세상 속에서 그 밤, 그 자리는 한마디로 명천 이문구다웠다. 이문구는 그의 대표작품 ‘관촌수필’ 주제나 문장이나 분위기처럼 소박하면서도 우주적인 자궁을 떠올리게 하는 웅숭깊은 의뭉스러움을 가지고 살았던 입지전적 사람이다. 서슬퍼런 유신독재 속에서 저항적으로 ‘민주’를 꿈꾸며 살았던 그는 밖으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은 채 은밀한 연출을 통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어냈다.

    평론가 백낙청 선생은 이문구와 가장 절친할 수 있었지만, 그의 세계와 인격이 갖고 있는 범접할 수 없는 무게가 함부로 인간적으로 가까워질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요즘 세상 젊은 평론가들이 이문구를 운위하지 않는 것은 한국문학의 불행일 수 있다고, 문장이 까다로워 외국어로 번역되지 못하는 것이 서운하다고 술회했다.

    입심 좋은 소설가 황석영 선생은 걸쭉한 입담으로 이문구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기 문학 라이벌은 이문구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학적, 인간적으로 강단 있기로 소문난 소설가 윤흥길 선생은 ‘관촌수필’ 한 대목을 낭송하여 그에 대한 그리움을 풀었고, 후배 소설가 한창훈도 자기가 진실로 좋아하는 부분이라며 소설 ‘우리 동네’연작 중 한 대목을 낭송했다. 두 달인의 낭송으로 이문구 소설이 가진 탁월한 입담이 드러났고, 장내는 웃음으로 가득 찼다. 동화, 동시를 쓰는 안학수 작가는 이문구의 동시 3편을 낭송했다. 보령에 사는 그는 자신은 독실한 기독교도인데, 이문구 선생이 자신의 신앙을 같잖게 여기고 꾸짖어 그 뒤로는 별 볼일 없는 신앙인 노릇을 한다고 말해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가 낭송한 동시 3편은 모두 절편이었다. 특히 ‘연기’라는 시는 탁월했다. 이문구의 성품처럼 한데 어우러지는 화해와 화엄의 삶을 제시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이문구에 대한 총체적인 회고의 시간을 가졌다. 이문구는 군사독재의 시퍼런 서슬 속에 살면서도 올곧게 문학적인 삶을 살아낸 소설가라고 규정하고, 그와의 사귐에 대한 이야기를 절절하게 풀어놓았다. “이문구가 정말 그립습니다” 하고 염무웅 선생은 회고의 말을 끝냈다.

    우리는 식당으로 옮겨 그를 추모하면서 술과 밥을 먹었다. 그가 살아생전 친하게 어우러져 살았던 소설가 최인석, 송기원, ‘문학나무’라는 문학잡지를 함께 만들고 이번 봄호에 그의 10주기 특집을 꾸민 소설가 황충상, 그를 사숙한 전성태, 김형수, 김종광 등 젊은 후배 작가들과 시인 김사인, 정희성, 김정환, 곽효환, 강형철, 평론가 구중서, 최원식 선생, 다산학자 박석무 선생 등 여러분이 그의 미망인과 이미 결혼하여 딸을 둔 이산복(고인의 아들) 군에게 굳세게 살 것을 당부했다.

    작가 이문구는 194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6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토속어를 통해 전통적 삶의 미덕을 일궈내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확보했다. 작품으로 ‘관촌수필’ ‘장한몽’ ‘산 너머 남촌’ 등을 남겼으며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03년 2월 25일 예순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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