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44

2018.06.27

트렌드

노량진은 공부하는 곳? 아니, 노는 곳

식당, 술집, 오락실 등 즐비…저렴한 가격으로 젊은 층 모아

  • 입력2018-06-26 11: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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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노량진 골목 입구. 큰 음식점부터 노래방, 카페 등 여느 번화가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다. [박세준 기자]

    서울 노량진 골목 입구. 큰 음식점부터 노래방, 카페 등 여느 번화가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다. [박세준 기자]

    서울 학원가로 유명한 노량진 골목을 직접 들어가 본 사람은 아는 풍경이 있다. 외관은 공무원시험 준비생(공시생)의 메카라는 별명답다. 서울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에서 동작경찰서 방향을 내려다보면 각종 공무원시험 학원이 즐비하다. 하지만 노량진로에서 만양로로 접어드는 골목에 들어서면 분기점에 큰 오락실이 보인다. 그 양옆으로 저렴한 음식점과 술집이 줄지어 있다. 여느 번화가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공시생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공간이겠지만, 최근 이곳에 수험생이 아닌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다른 번화가들과 비교해 현저히 싼값이 매력 포인트다. 게다가 컵밥 거리부터 공시생을 위한 식당들까지 저렴한 음식도 많아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 좋은 데이트를 즐기려는 연인이 늘고 있다. 

    지난해 설과 추석, 공시생들의 고충을 듣고자 노량진을 찾았다. 옷차림을 보면 공시생인지 아닌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일단 그들이 입은 옷에는 단추가 거의 없다. 대부분 트레이닝복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옷 색깔은 검은색, 회색, 흰색. 그 외에 다른 색은 보기 어렵다. 그나마 겨울에는 노량진의 색이 다양해진다. 색이 다른 패딩을 위에 걸치기 때문이다. 공시생은 다들 잰걸음으로 거리를 지나갔다. 서로 얼굴도 보지 않았다. 시선은 땅에 두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았다. 간혹 두꺼운 수험서를 들고 있거나 백팩을 메고 있었다.

    수험생 떠나니 어쩔 수 없다

    공무원시험 준비생들이 모여 사는 노량진 골목은 여전히 적막했다. [박세준 기자]

    공무원시험 준비생들이 모여 사는 노량진 골목은 여전히 적막했다. [박세준 기자]

    6월 11일 찾은 노량진 풍경은 그때와 많이 달랐다. 일단 단추 있는 셔츠나 블라우스를 입은 사람이 눈에 많이 띄었다. 트레이닝복 바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간혹 치마를 입은 사람도 보였다. 거리를 걷는 속도와 시선도 달라졌다. 앞을 보거나 동행과 이야기하며 천천히 걸었다. 음식점이 즐비한 거리에서 만난 대학생 김모(24) 씨는 “서울에서 노량진 물가는 따로 계산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음식 가격이 싸다. 공시생은 아니지만 친구들과 종종 노량진의 맛있고 저렴한 식당을 찾아다닌다”고 밝혔다. 

    거리 초입의 모습도 1년 전과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지난해 추석 때만 해도 가장 많이 보이는 가게가 스터디룸이나 카페였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음식점이나 테이크아웃 전용 카페로 업종이 바뀌어 있었다. 인근에서 오래 장사를 해왔다는 이모(52·여) 씨는 “해가 갈수록 시험 준비를 하러 노량진에 들어오는 사람이 줄어드니 생긴 결과”라고 말했다. 



    지금이야 공무원시험으로 유명한 거리지만 과거 노량진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준비하는 재수생이 많았다. 1975년 서울 종로구 대성학원이 노량진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수험생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서울 강남 재수학원들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공무원시험 학원이 노량진에 들어오면서 공시생 비율이 크게 높아졌다. 지금은 공무원시험 준비 역시 인터넷 강의로 하는 경우가 많아져 노량진을 찾는 수험생이 꽤 줄었다. 

    수험생 감소를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이 일대 최대 규모의 고시식당인 ‘고구려 식당’의 폐업이다. 식당 측은 사장의 건강 악화와 수험생 수의 급격한 감소로 5월 18일 저녁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고 알렸다. 

    노량진의 청년인구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5월 31일 기준 서울 동작구 노량진1·2동의 인구통계를 살펴보면 노량진1동의 20대 인구는 총 5519명, 노량진2동은 2333명이다. 2016년 9월만 해도 1동 5710명, 2동 2527명이던 것이 소폭 감소했다. 공무원시험 응시자는 해마다 느는데 노량진에서 숙식을 해결해가며 공부하는 인원은 줄고 있는 것이다. 

    수험생과 공시생을 상대로 장사하던 업주들은 차츰 외부 손님을 겨냥해 업종이나 영업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씨는 “아무래도 기존 장사 방식과 달라 어려운 점이 많다. 게다가 수험생은 줄어드는데 임차료는 오르니 이래저래 사정이 좋지 않다”고 밝혔다. 

    수험생의 지갑이 가벼운 만큼 인근 식당의 음식 가격은 저렴하다. 특히 ‘고시식당’이라는 별명을 가진 노량진 공무원시험 학원 인근 식당들은 음식 양으로 유명하다. 뷔페 형식의 한 끼 가격은 5000원대. 식권을 미리 사면 4000원대다. 매끼니 육류, 채소, 국이 갖춰진 식단으로 메뉴가 계속 바뀌고 무한리필이라 양껏 먹을 수 있다. 맛도 나쁘지 않아 몇 년 전부터 인근 학교의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졌다. 

    직장인 이모(27) 씨는 “먹방 유튜버의 영상을 보고 노량진에 왔다. 6000원대 중국음식을 무한리필로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있다고 해 (오늘은) 그곳에서 식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노량진역 3번 출구 근처에서 고시식당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식당에는 이씨 같은 사람이 종종 보였다. 식사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 식당이 꽉 차지는 않았다. 하지만 책과 수첩을 식탁에 올려놓고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사이로 휴대전화 카메라로 자신이 먹는 음식을 찍는 이들이 보였다. 그들이 공시생이 아니라는 것은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서울 인근에서 보기 힘든 오락실이나 플스방이 노량진에서는 여전히 성업 중이다(왼쪽). 수험생들의 메카로 불리는 노량진이지만 서울에서 가장 저렴한 술집이 즐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박세준 기자]

    서울 인근에서 보기 힘든 오락실이나 플스방이 노량진에서는 여전히 성업 중이다(왼쪽). 수험생들의 메카로 불리는 노량진이지만 서울에서 가장 저렴한 술집이 즐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박세준 기자]

    과거 공시생의 배를 채워주던 컵밥 포장마차도 이제는 공시생보다 놀러온 사람들이 더 많이 찾는 명소가 됐다. 포장마차가 학원 근처에 있을 때는 꽤 많은 수험생이 이곳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하지만 무허가 노점 영업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2013년 포장마차 대부분이 철거됐다. 그 대신 사육신묘 인근에 새롭게 터를 잡았다. 동작구청과 노점상들의 협의로 컨테이너박스 형식의 ‘컵밥 거리’로 자리를 옮긴 것. 6월 11일 찾은 컵밥 거리에도 컵밥을 먹어보려는 사람이 주를 이뤘다. 이곳에서는 컵밥 말고도 쌀국수, 찹스테이크 등 다양한 음식을 3000~5000원 선에 팔았다.  

    1년 전까지 노량진에서 수험생활을 한 공무원 이모(28) 씨는 “사실 컵밥 거리까지 가서 밥을 먹는 수험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원래 컵밥은 줄 서지 않고 빠르게 먹은 뒤 학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이점이었는데, 지금은 일단 학원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게다가 고시식당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지 않아 수험생활 내내 컵밥을 한 번도 먹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밝혔다. 

    고시식당이 아니어도 인근 식당의 음식 가격은 대개 6000원 선이었다. 한 쪽씩 파는 피자가게, 밥과 국을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돈가스 식당, 제육볶음을 주문하면 생선구이가 함께 나오는 식당 등 메뉴도 다양하다.

    멸종한 놀 거리가 아직 남아 있다

    노량진의 싼 물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마트 진열 상품들. [박세준 기자]

    노량진의 싼 물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마트 진열 상품들. [박세준 기자]

    저렴하고 양 많은 음식이 있으니 애주가들도 이 거리로 모이기 시작했다. 직장인 윤모(30) 씨는 “최근 뜨는 샤로수길이나 경리단길은 연인과 가기에 좋은 거리일지는 모르지만, 친구와 함께 찾기에는 가격이나 분위기가 부담스럽다. 하지만 노량진은 음식 가격도 다른 번화가에 비해 훨씬 저렴한 데다 과거 취업준비를 하던 추억도 떠올릴 수 있어 친구들과 한잔하기에 딱 좋다”고 말했다. 

    노량진 초입에는 유행이 지나 다른 곳에선 찾아보기 힘든 업소도 적잖다. 대표적인 것이 오락실과 플스방이다. 플스방은 콘솔용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10여 년 전만 해도 대학가와 번화가를 중심으로 성업했다. 하지만 온라인 및 모바일 게임 등의 발달로 최근에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2000년대 중·후반의 유물 같은 플스방이 노량진에선 성업 중이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이곳을 찾아 친구들과 게임을 한다는 송모(28) 씨는 “물론 PC(개인용 컴퓨터)로 집에서도 축구게임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대학생 시절 친구들이 모여 얼굴을 맞대고 서로 놀려가며 게임하던 것만큼 즐겁지 않다. 그래서 최근 여기 플스방이 있는 것을 알게 돼 친구들과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강남, 홍대 앞 등 번화가에서도 오락실을 쉽게 볼 수 있지만, 노량진 오락실은 장르가 다르다. 홍대 앞이나 강남 오락실은 다트, 인형 뽑기 등 가볍게 즐기는 게임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노량진 오락실은 격투게임이나 펌프 같은 리듬게임이 많다. 지금은 사라진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동네 오락실의 모습과 닮았다. 

    노량진에서 유명한 오락실은 총 2곳. 초행길이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오락실은 ‘어뮤즈타운’이다. 서울에서 리듬게임을 가장 잘 갖춘 오락실로 손꼽힌다. 다이소를 끼고 만양로 14가길로 들어가면 크게 보이는 오락실이다. 처음 오락실에 들어서면 노래방으로 착각할 수 있다. 동전을 넣고 노래를 부르는 코인 노래방 기계가 곳곳에 놓여 있고, 한가운데에 게임기 판이 몇 개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고작 이 정도인가’라고 실망할 즈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2층이 이 오락실의 메인이었다. 2층은 리듬게임기로만 꽉 차 있었다. 저녁시간이 다 돼가는데도 게임을 즐기는 사람으로 붐볐다. 최모(20) 씨는 “오락실 마니아에게 ‘노량진=게임 장소’로 통한다. 한판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으니 잠깐 머리를 식히는 용도로는 온라인 게임보다 오락실이 나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공시생의 거리

    또 다른 유명 오락실은 격투게임의 성지로 불리는 ‘정인게임장’이다. 만양로18길을 걷다 보면 찾을 수 있다. 외관은 허름하지만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들어가자마자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스트리트파이터2’였다. 1990년대 초반 인기를 끌었던 이 게임이 2018년에도 여전히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작게임에 밀리지 않고 꽤나 선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임기 4대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붙어 있었다. 직장인 박모(38) 씨는 “친구들과 가끔 이곳을 찾는다. 물론 게임 고수가 많아 한 번도 이겨본 적은 없지만 게임기 앞에 앉으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설렌다”고 밝혔다.
     
    확실히 1년 만에 노량진 분위기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수험생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수험서 서점이 밀집한 거리를 지날 때는 다시 트레이닝복이 교복인 학교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자들은 면도를 제대로 하지 않아 거뭇거뭇 수염자국이 남아 있었다. 여자들도 화장기 있는 얼굴을 찾기 어려웠다. 여름이라 티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사람이 많았다. 

    이 거리에도 식당은 있었다. 하지만 식당 밀집지역에 있는 식당들과 달리 조용했다. 대화하며 식사하는 테이블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시선은 식탁에 펴둔 책이나, 영어 단어를 정리해둔 수첩에 고정돼 있었다. 1년 전 노량진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서 1년째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인 양모(26) 씨는 “노량진이 그렇게 면학 분위기가 좋은 곳은 아니라는 사실은 꽤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학원에 등록하는 수험생은 여전히 많다. 인터넷 강의도 있지만, 정해진 스케줄대로 움직이고 싶은 사람은 직접 학원에 나와 강의를 듣는 것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인근 부동산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지방에서 올라온 수험생은 여전히 노량진에 방을 구하는 편이다. 신림 등 한산한 지역에 비해 다소 소란스러운 편이지만 학원이 가깝고, 음식점 밀집지역만 지나면 조용한 동네라 자취방을 구하는 수험생이 여전히 많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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