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KIA 타이거즈 중견수 로저 버나디나. [동아일보]
2017년에도 로저 버나디나(34· KIA 타이거즈)가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면서 중리미엄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사실 버나디나는 중리미엄보다 ‘우리미엄’(우승 프리미엄)을 누렸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2017년 최고 중견수를 뽑아보라면 버나디나보다 박건우(28·두산 베어스)를 꼽는 팬이 훨씬 많을 테니까요.
기본적인 타격 기록인 OPS(출루율+장타력)만 봐도 박건우가 1.006(전체 5위)으로 버나디나(0.913)보다 높았습니다. OPS는 안방 구장의 영향을 많이 받는 기록. 박건우는 ‘타자들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 서울 잠실야구장을 안방으로 쓰면서 ‘도핑 전력 없이’ 이런 타격 성적을 남겼습니다.
OPS 1.0을 넘으면 흔히 최우수선수(MVP)급 활약을 펼쳤다고 평가합니다. 박건우는 MVP급을 넘어 ‘역대급’이었습니다. 21세기 들어 OPS 1.0을 넘긴 중견수는 박건우가 처음입니다. 전체 외야수 가운데서는 이 기간 OPS 10위.
타율 0.366 역시 21세기 중견수 가운데 가장 높은 기록이고, 전체 외야수 중에서는 3위입니다. 중리미엄이 없더라도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꼭 받았어야 할 선수가 박수만 치다 시상식장을 빠져나온 셈입니다.
그나저나 중견수는 다른 외야수하고 뭐가 다르기에 중리미엄이라는 표현까지 존재하게 된 걸까요.
중견수는 빠른 발이다
2017년 한국 프로야구 중견수 가운데 OPS(출루율+장타력)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보인 박건우(두산 베어스). [동아일보]
그런 이유로 ‘야수’를 공격수와 수비수로 나누면 이들은 수비수에 더 가까운 존재입니다. 특히 중견수는 10년 전과 비교할 때 더욱 그런 존재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중견수의 임무가 바뀐 것입니다.
2005~2007년 한국 프로야구에서 중견수로 출장한 타자가 기록한 OPS는 평균 0.736(3위)이었습니다. 이는 야구에서 대표적인 공격수라 할 수 있는 1루수 지명타자 다음으로 높은 기록. 2015~2017년이 되면 이 순위는 6위(0.755)로 내려갑니다. 이번에는 대표적인 수비수라 할 수 있는 포수, 유격수 다음으로 낮은 기록입니다.
선수 면면을 봐도 중견수 스타일이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0년 전에는 제이 데이비스(48·당시 한화 이글스), 박재홍(45), 이택근(38·이상 당시 현대 유니콘스), ‘큰’ 이병규(44·당시 LG 트윈스)처럼 팀 간판급 타자가 중견수로 나서는 일도 많았습니다. 이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낱말은 ‘호타준족(豪打俊足)’이었습니다.
이제는 중견수 하면 박해민(28·삼성 라이온즈), 이대형(35·kt 위즈), 이종욱(38·NC 다이노스) 같은 ‘쌕쌕이’ 스타일이 먼저 떠오릅니다. 이들은 여전히 ‘준족’이지만 OPS 변화에서 알 수 있듯 ‘호타’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왜 중견수가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바뀌었을까요. 이는 득점 환경 변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2005~2007년 한국 프로야구는 팀당 평균 4.27점을 기록했습니다. 10년이 지난 다음에는 5.41로 1.14점이 높아졌습니다. 야구에서 점수가 많이 난다는 건 장타가 늘어났다는 뜻이고, 그러면 외야 수비의 중요도는 더욱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외야수에게 필요한 역량은 두 가지. 하나는 공을 빨리 쫓아가는 것, 나머지 하나는 그 공을 잡아 빨리 내야로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공을 빨리 쫓아가려면 당연히 발이 빨라야 합니다. 내야로 공을 되돌려주는 건 발과 어깨가 경합을 벌이는 영역. 이번에도 발이 이깁니다. 미국 메이저리그 연구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 어깨가 강한 외야수보다 포구가 빠른 외야수가 내야로 공을 더 빨리 되돌려주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중견수에게 제일 중요한 역량은 ‘빠른 발’, 즉 준족인 겁니다. 타고투저가 심한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내야수인 2루수보다 중견수가 수비에서 더 중요한 포지션이 됐습니다. 2루수 평균 OPS(0.771)가 중견수(0.755)보다 높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2루수 쪽으로 땅볼을 많이 치는 왼손 타자가 늘어난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재미있는 결과입니다.
중견수는 센터다
그럼 ‘수비 스펙트럼(Defensive Spectrum)’이라는 표현은 아시나요. 세이버메트릭스(야구 통계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빌 제임스가 고안한 수비 스펙트럼은 이렇게 생겼습니다.‘지명타자-1루수-좌익수-우익수-3루수-중견수-2루수-유격수-포수-투수.’
이것은 야구에서 공격이 중요한 포지션이 더 앞쪽에 나오도록 야구선수 포지션 10개를 정리한 결과물입니다. 세이버메트릭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순서는 거의 변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2017년 한국 프로야구는 두 가지에서 차이가 납니다.
먼저 1루수가 지명타자보다 공격력이 더 중요한 포지션입니다. 사실 이건 2000년대 중·후반에도 그랬습니다. 이는 그때부터 한국 프로야구에서 ‘붙박이 지명타자’를 활용하는 팀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아 생긴 일입니다. 이호준(42·전 NC), 홍성흔(42·전 두산) 정도를 예외로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견수와 2루수의 자리가 바뀝니다. 타고투저 시대를 맞아 모두가 타격 기록을 끌어올리기 바쁠 때 중견수는 제자리를 거의 벗어나지 못한 까닭입니다. 바꿔 말하면 중견수가 수비 중심으로 변화했는데 여기에 공격까지 잘한다면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7년 포스트시즌(PS)에 진출한 5개 팀 중견수가 기록한 OPS는 평균 0.805로 탈락 팀(0.738)보다 10% 가까이 높았습니다. 수비가 제일 중요한 포수 역시 PS 진출 팀 0.706, PS 실패 팀 0.673으로 PS 진출 팀 포수가 타격 성적이 더 좋았지만 그 차이는 5%로 중견수의 절반 수준이었습니다. 유격수는 PS 진출 실패 팀이 0.761로 오히려 5강팀(0.755) 기록보다 높았습니다.
그러니까 중견수 성적에 따라 어떤 팀은 잘나갔고 어떤 팀은 못 나갔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2017년 한국 프로야구에서 중견수는 중리미엄을 받을 만한 포지션이었습니다. 타고투저가 이어지는 한 계속 그럴 개연성이 높습니다. 이런 시대에 박건우가 이렇듯 ‘안녕하지 못한’ 대우를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여쭤봅니다. ‘여러분 응원 팀의 중견수는 안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