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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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 에이즈’ 토종벌 습격사건

낭충봉아부패병에 양봉 농가 초토화 … 과수·채소 농가 등이 2차 피해 입어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1-08-29 13: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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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꿀벌 에이즈’ 토종벌 습격사건

    2010년 10월 12일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토종벌 장례식을 치르는 농민들(위). 말벌 습격에 맞서 싸우는 토종벌.

    8월 10일 경기 수원시 농촌진흥청 마당에는 독특한 모양의 벌통 10여 개가 놓여 있었다. 전남 구례군에서 온 이성희 씨 등 전국 각지의 토종벌 양봉(養蜂) 농민 50여 명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농촌진흥청 잠사양봉소재과 최용수 연구사로부터 낭충봉아부패병(囊蟲蜂兒腐敗病) 예방법을 듣는 자리였다.

    ‘꿀벌 에이즈’라고 부르는 낭충봉아부패병은 벌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기 전 말라죽는 질병. 토종벌(土蜂)과 서양종벌(洋蜂)로 구분하는 꿀벌 중 토종벌이 특히 취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강원도에서 발병을 공식 확인한 뒤 급속도로 확산해 전국 토종벌의 93%가량이 이미 폐사했다(한국토봉협회 추산).

    단기간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이유는 마땅한 치료법이 없기 때문. 바이러스 질환이라 벌통 하나가 감염되면 전체 벌이 폐사할 때까지 속수무책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벌통 하나당 3만~4만 마리씩 모여 사는 토종벌 생태에 비춰볼 때, 1000통 이상 벌을 키우는 농민은 최대 수천만 마리의 죽음을 지켜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3대째 토종벌을 길러왔고, 토종벌 분야 농민으로는 유일하게 ‘신지식인’으로 선정된 김대립 씨가 그랬다. 충북 청원에서 1000통 넘게 벌을 기르던 그는 “지난해 9월 감염이 시작돼 이제 350통 남았다”며 “벌들이 비실대다 죽어나가는 걸 보면 가슴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올해 5월 중국에 좋은 약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현지로 달려가 각종 영양제를 1000만 원어치쯤 사왔습니다. 지금 벌에게 먹이는데, 면역력이 강화돼 바이러스를 이겨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비실대다 죽는 모습 가슴 무너져”



    김 씨의 말이다. 벌에게 ‘보약’을 먹이는 사람은 김씨 외에도 많다. 충북 옥천의 양봉 농민 김미연 씨는 “6년근 홍삼 엑기스와 프랑스산 영양제를 먹인다”고 말했다. 역시 충북 옥천에서 벌을 기르는 농민 오승환 씨는 “산에서 영지버섯을 따다 달여 먹이는 중”이라고 했다.

    이번 농촌진흥청 설명회가 눈길을 끈 것은 연구진이 바이러스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밝힌 덕분. 최 연구사는 “개량 벌통을 사용하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벌통도 추가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꿀벌은 애벌레나 성충이 벌통에서 죽으면 냄새를 없애고 부패를 막고자 신속히 사체를 내다버리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꿀벌질병관리센터 매뉴얼에는 “애벌레가 한두 마리씩 떨어질 때 주저하지 말고 애벌레 있는 방을 잘라내 소각하라. … 감염된 애벌레 한 마리가 성봉(큰벌) 10만 마리를 감염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꿀벌 에이즈’ 토종벌 습격사건

    2010년 10월 12일 양봉 농민들이 토종벌을 살처분 대상에 포함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토종벌 전멸하기 전 대책 세워야

    최 연구사는 “전통적 형태의 벌통은 벌집이 고정됐기 때문에 내부의 벌 상태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벌집을 움직이기 쉽게 만든 개량 벌통을 사용하면 애벌레가 벌집 밖으로 떨어지기 전부터 농민이 감염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즉시 감염된 애벌레를 제거하고 여왕벌을 격리하는 게 중요하다. 열흘 정도 산란을 막아 애벌레가 태어나지 않도록 하면 벌통의 바이러스 밀도가 감소해 추가 감염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농촌진흥청이 5월부터 7월까지 충북 충주에서 이런 방식으로 벌통을 관리한 결과, 바이러스에 감염됐던 6개 벌통 모두 추가 감염률이 0%로 나타났다. 이에 김미연 씨는 “낭충봉아부패병 발병 이후 정부가 나서서 벌 기르는 법을 알려준 건 오늘이 처음이다. 이 방법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당장 벌통을 바꿔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농민들은 ‘꿀벌 에이즈’ 발병 2년 만에 국내 토종벌 산업이 사실상 붕괴한 것은 정부 책임이 크다고 입을 모은다. 질병 확산을 방치하던 정부는 전국 토종벌의 90%가 사라진 2010년 9월에야 낭충봉아부패병을 가축전염병으로 고시했다. 그와 동시에 240억 원 규모의 저금리 융자, 기술교육비 지원, 방역체계 구축을 대책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이때는 벌이 다 죽어 방역할 벌통조차 없었다. 농민은 정부가 피해 보상에 소극적이라는 점에도 분노한다. 현재 정부는 토종벌 폐사에 대해 보상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이런 상황에서 낭충봉아부패병 때문에 과수·채소·화훼 농가 등이 2차 피해를 입고 있다. 식물의 약 40%는 곤충의 수분(受粉)을 통해 열매를 맺는다. 이 중 80%는 꿀벌이 담당한다. 꿀벌이 줄어들면 농업에 차질이 생기게 마련이다. 올해 당장 전국 배 생산량의 20%를 차지하는 전남 나주시 배 농가 상당수가 꽃가루를 구입해 인공 수분을 했다. 강원 춘천시 사과 농가도 비상이다. 춘천시농업기술센터가 지난봄 사과 재배 농가의 개화 상황을 표본 조사한 결과, 1000㎡당 평균 꽃 개수는 1만2800개로 전년의 60% 수준에 그쳤다.

    현 상황이 생각만큼 심각한 건 아니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낭충봉아부패병이 토종벌을 죽일 뿐, 서양종벌은 건재해 농업에 큰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2009년 현재 한국에서는 3만5304가구가 꿀벌을 기른다(농업진흥청 추산). 이 가운데 토종벌 농가는 1만7368가구로 양종벌 농가 1만7956가구보다 다소 적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서양종벌이 있다고 해서 우리 농업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농촌진흥청 잠사양봉소재과 이명렬 과장은 “토종벌과 서양종벌은 특성이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토종벌은 여러 꽃과 풀을 옮겨 다니는 방식으로 꿀을 생산한다. 반면 아카시아꽃, 밤꽃을 좋아하는 서양종벌은 주로 단일꽃 꿀을 만드는 특징을 보인다. 서로 수분하는 식물 종이 다른 셈이다.

    토종벌이 전멸하면 앞으로 서양종벌을 공격하는 질병이 나타났을 때 심각한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한다. 1990년대 초반 ‘중국가시응애’라는 벌레에 의한 꿀벌 질병이 유행했을 때 서양종벌이 타격을 입고 토종벌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이 때문에 장기적으로 두 종류의 벌이 함께 생태계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토종벌 산업을 되살릴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일찍이 “벌이 사라지면 식물이 멸종하고 인류도 4년 이상 버틸 수 없다”고 경고했다. 농민은 정부가 이제라도 토종벌을 보존하고 확산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대립 씨는 “낭충봉아부패병이 발생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토종벌 생태에 대한 연구 자료가 거의 없었다. 충북 등에 조금이나마 남은 벌이 다 죽기 전, 이제라도 산학연 협력 연구체제를 구축해 토종벌에 맞는 질병 예방법과 치료법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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