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경찰청이 일당을 검거한 지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았지만 중국 내 위조 조직들은 경찰의 단속을 비웃으며 보란 듯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위조 주민등록증은 사기 범죄부터 범죄자의 신분세탁, 위장취업 등에 악용되지만 정부는 뾰쪽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상태다.
경찰이 위조범 일당과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현재 인터넷에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위조 주민등록증을 구할 수 있다. 실제 경기경찰청이 검거한 위조범 일당도 인터넷 카페 등을 운영하며, ‘위조’ ‘타블로’ 등의 단어로 검색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중국에 있는 위조범의 e메일 주소를 알려주며 접근했다. 사람들이 e메일을 보내면 자동 메일링으로 각종 샘플링을 보여주고,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에게는 국제전화로 중국의 브로커와 연결해줬다. 위조 주민등록증을 원하는 사람은 사진과 도용하고 싶은 주민등록증이나 그 신상정보를 적어 e메일이나 국제택배로 중국에 보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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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직은 위조 요청을 받은 지 일주일 안에 구매자가 건네준 사진과 주민등록증, 위조한 주민등록증을 국제택배로 보내준다. 위조 주민등록증 가격은 그 정교함에 따라 달라진다. A급은 70만~100만 원으로 위조 판별 전문가가 전문장비를 사용하지 않고는 구별하기 힘들 정도다. B급은 40만~50만 원으로 주민등록증을 자주 접하는 일선 검문 경찰, 동사무소 직원도 구별하기 어렵다. 그 아래 C급은 육안으로 구별이 가능하다. 실제 중국 조직이 위조한 주민등록증은 사용 중에 발각된 경우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경기경찰청이 이들 조직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세관의 통보 때문이었다. 국제택배물로 들여오는 책, 키보드, 밀폐용기 등에 주민등록증이 들어 있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세관이 경찰에 제보한 것. 세관 직원도 중국에서 들여오는 주민등록증이 위조일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주민등록증 전문가들은 중국에서 위조한 주민등록증은 수작업이 아닌 기계 설비를 이용해 대량생산한 것으로 본다. 기계에 이름, 주민등록번호 등 정보를 넣으면 위조 백지증과 위조 홀로그램 코팅지를 이용해 즉석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 일각에선 국내의 주민등록증 제작 기술이나 기계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을지 모른다고 의혹의 눈길을 보내지만 정부는 그럴 가능성을 일축한다. 행정안전부(이하 행안부) 주민과 관계자는 “주민등록증은 한국조폐공사에서 철저한 보안 속에서 생산하기 때문에 기계나 설계도가 유출될 수 없다. 다만 갈수록 인쇄 기술이 발달해 전문가가 아니면 판독이 불가능할 수준으로 위조가 가능해진 것은 사실이다. 이는 플라스틱 카드를 신분증으로 쓰는 나라들의 공통된 고민”이라 밝혔다.
위조 주민등록증을 구입한 사람은 주로 한국인 행세를 하려는 조선족이다. 수배 중인 유명 사업가 이모(45) 씨는 위조 주민등록증과 여권, 외국인등록증 등을 사용해 호주 국적의 ‘앤디 김’으로 행세하기도 했다. 한 중학생은 직업군인 남자친구가 자신을 미성년자로 의심하자 성인 신분증을 만들었다. 경기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이삼종 형사는 “국내에 위조 주민등록증 수요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중국에서 제작해 국내로 보내는 중국 내 점조직이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뿌리 뽑고 싶어도 법 테두리 밖이라 안타까울 뿐”이라고 말했다.
(왼쪽) 중국 위조 조직은 주문받은 위조 주민등록증을 국제택배로 한국에 보냈다. (오른쪽) 위조 일당에게 접근하기는 무척 쉽다.
한편 국내에서는 기존 주민등록증을 도용해 위조한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2월 24일 서울 동대문경찰서는 실제 땅 주인의 주민등록증과 등기권리증 등을 위조해 주인 행세를 하며 21억 원의 근저당권을 설정하고 이를 대기업 계열사에 담보로 제공해 10억 원 상당의 윤활유를 받아 처분한 일당을 구속했다. 이들은 위조 주민등록증 등을 이용해 28억 원을 은행에서 대출받으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실제 땅 주인 행세의 시작은 주민등록증 위조였다. 이들은 범행에 앞서 주민등록증 등 각종 문서 위조 전문가인 고모(57) 씨와 유모(58) 씨를 찾아갔다.
고씨 등은 동대문구 청량리동 한 주택가 반지하방에서 위조공장을 운영했다. 위조 장비는 컴퓨터와 스캐너, 컬러프린터, 돋보기안경, 적외선 조명등, 일부 특수 장비 등이다. 이들은 노숙자, 소매치기범 등에게 1장에 20만 원 정도를 주고 구입한 주민등록증의 기존 정보를 지운 뒤 위조할 개인 정보를 새겨넣는 방식으로 일했다. 위조는 간단한 기술만 배우면 당장 제작이 가능할 정도로 손쉬웠다. 특수 장비라고 표현했지만 일반 공구업체 등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것들. 간단한 방식이지만 기존 홀로그램 코팅지를 재활용했으므로 위조방지 무늬가 있어 육안으로는 가짜인지 식별이 불가능하다. 위조 주민등록증은 120만 원에 사기범, 수배자, 전과자 등에게 팔려나갔다. 동대문경찰서 강력팀 류병규 형사는 “붙잡힌 일당도 대부분 수배자로, 이들은 가짜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검문검색을 피해왔다”고 말했다.
존재하지 않는 유령 인간을 만들어내거나 다른 사람 행세하며 살 수 있게 해주는 위조 주민등록증 구하기가 인터넷 쇼핑만큼 손쉬운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행안부 주민과 관계자는 “위조를 막기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주민등록증은 1968년 주민등록법이 개정되면서 만들어진 뒤 10년 주기로 인쇄 기술, 보안 요소 등의 발전에 발맞춰 변화했다. 현재 플라스틱 카드 형태는 1999년 9월 탄생했다. 행안부는 홀로그램 무늬, 발급일자 등 공개된 보안장치 외에도 위조를 막는 장치 7~8가지를 주민등록증에 새겨두었다. 하지만 위조 기술도 발전해 이 중 5~6가지는 충분히 위조가 가능한 상태다.
이에 행안부가 준비한 ‘방패’는 전자주민등록증이다. 행안부는 지난해 10월 “2010년 9월 제출한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전자주민등록증 설계와 시스템 구축을 서둘러 2013년부터 5년 동안 전자주민등록증으로 교환, 발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자주민등록증의 전자칩에는 기존 주민등록증에 담긴 정보를 넣을 예정이다. 또 주민등록증에 적힌 주민등록번호 유출을 막기 위해 외부에는 대신 발행번호만 적는다는 생각이다. 법규도 명확히 해 국가가 불필요한 개인 정보를 수집하거나 개인의 동선을 파악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막을 방침이다.
하지만 행안부의 뜻대로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1999년, 2006년에도 정부가 위조 주민등록증 우려 등의 이유로 전자주민카드를 도입하려 했지만 정보 독점 및 사생활 침해 논란으로 보류됐다. 지난해 행안부는 “위조 방지와 개인 정보의 근원적 보호에 중점을 두고 설계했다”라며 반대 측을 설득했지만 여전히 일부 시민단체는 ‘빅브라더의 출현’을 경계하고 있다. 결국 양측의 실랑이가 계속되는 한 위조 주민등록증을 막을 방안은 현실적으로 없는 셈이다.